해방 후 일본의 산서를 읽은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해방후 일본어로 씌여진 산서를 우연히 만난 두명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그들에게 '인생의 책'이 되었고, 그로부터 평생 산을 떠나지 않고 산악계의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이 글은 그 두명이 그때 그시절 만난 책과의 인연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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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난 건데 김영도 선생님의 말씀이다.
일제 때 고보를 나왔다고 해서 다 일본어를 잘하는 거 아니다.
일본어로 말이야 할 줄 알고, 교과서야 읽지만 일본어로 씌여진 문학책을 읽을 수 있는 거 아니다.
한자를 안다고 일본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또래라도 '暖簾'을 곧바로 일본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 많지 않다.
내가 일본어를 잘하는 건 그후 이태도록 끊임없이 일본어를 읽고 배웠기 때문이다.
곧바로 수긍할만하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어공부에 매진해서 교과서는 잘 알지만, 지금까지 영어소설 몇권을 읽었으려나.
해방후 조선에는 '산서'라고는 영어와 독어 그리고 일본어로 된 것들 밖에 없었다.
영어는 미국이 적성국가가 되던 40년 전후 흔적을 감추었으니 해방후 서울대 입학한 이들도 ABC부터 했다.
독일이 동맹이라곤 하지만, 평양고보를 나온 김영도의 말에 의하면 독일어도 그리 많이 배우지 않았다 한다.
이제 불각시에 해방이 되었다.
1920년대생 두명의 젊은이를 이야기할 차례다.
그들은 산을 제대로 알기 전 각각 일본어로 씌여진 '인생의 산서'를 각각 한권씩 만나 평생 그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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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도
1940년대 그는 평양고보를 다녔다. 전쟁중이라 새책은 드물었고, 헌책방을 순례하다가
오시마 료키치(大島亮吉))의 『山-硏究와 隨想』를 만났다. 평양은 산도 없을 뿐더러 '산'을 몰랐던 그가 표지와 제목에 이끌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 책을 산것은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상황은 지금처럼 산서를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만나게 된 그 책 말고는 다시 기약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산서들 중에 골라서 산 것이 아니라 그 책만이 하필이면 그때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리고 그렇게 많이 발행한 것 같지도 않다.
해방후 그는 혼자서 삼팔선을 넘었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인들이 두고 간 책들로 수많은 헌책방들이 있었는데, 그는 길을 걷다가 다시 그 책을 만났다. '나는 빈 주머니를 털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구한 책이 6.25때 다시 내 곁에서 떠나고 말았다.'
김영도는 전쟁이 끝나고 학교를 끝내고 교사로서 공화당 당직자로 살았다. 산행은 하이킹 위주였는데, 그러다가 1970년경 산악계와 만났다. 그로부터 그는 영어, 일어, 독일어로 씌여진 수많은 산서를 읽고 번역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지침을 바꾼 청춘의 책은 오시마 료키치의 '산 연구와 수상'이고, 청춘시절 다른 일본어 산서가 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미문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책의 세계가 펼쳐내는 다양한 세계를 탐험하는 애서가적 면모가 강하다. 댁에 가보면 다양한 분야의 손때묻은 책들이 많다. 때문에 산서만 일부러 찾아 읽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김영도와 이 책에 관해서 더 읽으실 분은 다음카페 한국산서회에 들어가셔서 김영도의 인연 을 검색하시면 됩니다.
2) 손경석
일제시절 산악영화에 반해서 하이킹을 시작한 그는 산서에도 빠졌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책을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컬렉터, 소장가로서의 면모는 그때부터 드러난다. 어쩌다 산서를 만나면 그게 영어이건 독일어건 프랑스어이건 일본어이건 가리지 않고 사기 시작했다.
1962년 펴낸 역작 '등산백과'의 자서부분이다.
1947,8년 경 당시 그가 읽은 책들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어로는 '행위와 몽상', 낭가파르바트 원정기, 프랑스어로는 장 코스트의 알피니스트의 혼, 영어로는 스마이드의 책을 언급하는데, 조심스럽긴 하지만 해방전후 외국어 공부의 환경상 이런 책을 꼼꼼히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신에 '일본인의 것으로는 전부중치의 "산과 계곡"이라는 수상집을 퍽 좋아 읽었다.'라고 하고 있는데, 일본어에 능통한 그였기에 아마 이 책은 탐독했을 것이다.
김영도가 오시마 료키치의 '산-연구와 수상(1939년 초판)'을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지금까지도 일본산악계의 고전이라고 하고, 당시에도 유명한, 요절한 산악인이자 책이었지만, 식민지 평양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책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전부중치는 1930년대 당시 이미 일본산악계의 최고 저술가로 알려졌고, 이 책 제목은 당시 탄생한 산악잡지의 제목으로도 되고, 하면서 엄청나게 발행되었다.
1929년 창간호만 해도 자그마치 3500부이고, 1936년 현재 14,000부나 발행되었다.
식민지 조선에도 산서 하면 아마 첫손에 꼽히고 팔리어, 당시 등산가들은 읽었던 안읽었던 그의 이름과 책제목을 몰라서는 안되었다고 본다. 이어 해방후 일본인들이 쫓겨가면서 두고 간 책들 중에 산서로는 제일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손경석이 이 책을 만난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도 1936년 판이다. 그때 책이 85년이 지나서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발행부수도 많아서일것이다.
1960년 장면정권은 한일협정의 막후 조정역할로 손경석 등을 일본에 보냈다. 이 역할은이후 박정희 정권때 김종필로 이어졌다. 그는 이때다 싶어 일본산악회를 찾아갔다. 그리도 따로 날을 잡아 당시 회장단과 타나베 쥬지, 미타 유키오, 가다노, 후카다 규야 등을 그 유명한 제국호텔 만찬에 초대했다.(대단한 배짱의 30대 초반 청년^^)
그는 '특사'이니만큼 일본에서도 극진히 대접했을 것이다. '일본 외무성의 안내로 일본산악회를 찾아갔다.' 이 말은 사실인 듯 하다. 당시 회장 히다카 신로쿠로(日高 信六郎(1893년생 ひだか しんろくろう )를 검색했더니 제일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하고 동경제대를 졸업, 2차대전때 이탈리아 대사를 역임할 정도로 실세외교관이고 패전후에도 외교부에 근무하다 1958년 일본산악회 회장이 되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후카다 규야(1903년생)야 회장과 나이도 비슷하고 제일고 동경제대를 함께 하고, 일본산서회 회원이니 이자리에 함께 해도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백명산'을 낸 이후만큼의 필명이 있기 전이다. 이후 손경석은 후카다 규야의 책을 한국에 번역소개하게 된다. 후카다 규야하면 '일본 백명산'만 알고, 그의 책이 몇십년 전에 한국에 번역소개된걸 모르는 사람 많은 건 '안비밀'^^
타나베 쥬지는 나이도 1884년생으로 연배가 제일 높고, 산악계 원로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일본산악회 회원이 아니다(일본산악회 명예회원으로 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상황을 보면, 손경석이 일본산악회를 찾아가 인사를 나누면서 타나베 쥬지의 '산과 계곡'을 탐독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만찬에 초대할 때 그분을 뵙고 싶다고 했을 것 같다.
하필이면 그가 갖고 있던 책이 그 책이어서일 것이다. 일본산악회 회장은 외교관 출신인데다 한일협정의 중요성을 알터라 타나베 쥬지 선배에게 정중히 요청을 했을 것이고. 일은 그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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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그렇게 해서 세월은 흘렀다.
김영도는 "하늘과 땅사이"라고 그가 읽었던 산서들에서 좋은 구절을 모아 번역한 책을 냈다. 이 책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많다는 것도 '안비밀'
이 책 중에는 그가 그렇게 좋아한 오시마 료키치의 에세이가 조금 소개번역되어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베르그슈타이거(등산가)는 누구나 산에 자기의 하이마트(고향)를 가지고 있다.’라는 구절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다.
손경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국 '산과 계곡'을 번역 안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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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손경석의 글에 등장하는 일본산악회 회장 3명을 검색해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띤다.
그들은 모두 산행기 - 산서를 썼다는 것.
여기서 또 자학사관에 빠지게 되네.
우리의 한국산악회 역대 회장단들이다.
한분한분 찬찬히 볼 것도 없이, 노산 선생말고는 산서 한권 세상에 선보인 이 없구나.
갑자기 더워진다.
덧붙여) 일본에서는 헌책방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비씨지 않다. 1975년판 오시마 료키치의 책은 우리돈으로 1만원 하면 살 수 있다. 우리나라 헌책이었다면 얼마나 되었을까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앞으로 갈수록 더할 것이다. 우리는 신간산서를 사지 않으니....
The End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9월 15일 한국산악회를 만들었다.
한국산악회 상층부는 당대의 지식인들이니만큼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해방전 정통 '산서'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그 이야기를 남긴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노산 이은상과 홍박 홍종인 이숭녕박사가 오래도록 산악계를 이끌었지만 그들에게서는 일본의 향기가 없다.
심지어 홍종인은 일본이야기를 하면 역정부터 낼 정도로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백령회 회원들은 실제 등반에는 능했지만, 고급 산악문화를 즐겼다는 흔적은 없다. 그리고 백령회 회원들 중에 해방후에 산악계에 헌신한 이는 김정태 말고는 없다. 세브란스 의전의 방현은 충분히 그랬을 터이나 그 역시 해방 이후 산악계에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