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최고의 기록사진을 소개합니다.

카테고리 없음|2020. 8. 19. 09:00

금강산은 일제가 관광지로 개발하여 번성하기가 이루 말할 것 없었다. 육당 최남선은 이를 보고 "금강산은 너무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을 파는 색시 같고"라고 말했다 한다. 금강산 개발에 대한 독설이 될텐데 글쎄다. 몇몇 선택된 양반들만 독점하던 시대가 끝나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그 좋다는 금강산을 볼 기회가 생겨났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제시대 금강산을 소개하는 사진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앵글에 담으려 한 것들이다. 천편일률적이다. 등산객과 등산문화가 들어가 있지 않다. 요즘 산악 사진가들이 산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할 때도 그러하듯이 말이다. 사람 없는 시간에 사람 흔적 없는 곳을 골라서 담으려들 하지 않나.



금강산에 관한 수십종의 단행본 중에 제일 가치가 높은 자료들을 담고 있는 책 중의 하나라고 할 "서양인이 본 금강산". 아래 사진은 이 책에서 모셔왔다.


오늘 당시 금강산 등산문화를 보여주는 귀한 사진 한장을 소개한다. 그 전에 당시 금강산 산행문화의 기점인 외금강 온정리부터 보자. 



1926년 외금강 여행의 기착지인 온정리 전경이다. 20년대에 벌써 이 정도이고 30년대 넘어서면 몇백명 (기억이 가물한데, 1000명이 넘는다는 것 같기도 하고)이 상주하는 경성의 번화가 못지 않게 된다. 


이곳은 호텔, 여관 등은 물론이고 각종 술집들도 있어서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었다. 물론 술집에는 기생집, 요정 등등도 있어 돈있거나 셀렙인 식민지 조선인들도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술과 노래를 즐길 수 있었다. 


저멀리 외따로 떨어진 2층 건물은 이곳 최고의 시설인 온정리 호텔이다. 일본인 전용이 아니라 돈있는 조선인들도 저 곳을 선호했다.  



1919년에 이미 이렇게 근사한 빌딩을 세우고 손님을 기다렸다. 조선의 많은 문사들도 금강산 여행기에서 이곳을 언급한다. 




이곳은 금강온천이다. 이곳도 인기가 높은 곳으로 여관과 온천이 팩키지로 가능했다. 물론 온천만 따로 할 수 있도록 개발된 온천들도 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도 적지 않았고, 이곳에서 여관집을 운영하는 집의 초등학생 딸이 패전후 일본으로 귀환해서 이런 걸 놀랐다고 적고 있다. "금강산에서는 조선인들만 거친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일본에 갔더니 일본인들도 다 막일을 하더라는 거"


이 금강온천의 모습을 기억해 놓고 이제 그시절 온정리 거리를 보여주는 최고의 사진을 보자. 온정리 거리를 찍은 사진은 아직까지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오늘 우리는 그시절 이곳을 들렀던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걸었을 거리를 이제 볼 수 있게 된다.



먼저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건물이 바로 위에 있는 금강온천이다. 이곳이 그러니까 온정리 제일 중심가라고 보면 될 것이다. 왼쪽 플랭카드에 적혀 있는 것은 "오토산품" 그러니까 토산품 가게를 뜻한다. 금강산에는 수많은 종류의 토산품들이 팔렸다. 꿀이나 잣 등 농산물부터 나무를 가공한 것, 돌을 가공한 것 등등 말이다. 


사실 이렇게 상가나 산아래 상가거리를 찍은 사진들은 해방 후 우리네 관광지 사진들에서도 만나기 어렵다. 심지어 국민대표 수학여행지였던 설악산 외설악동이나 속리산 법주사 거리도 재현하지 못한다. 그정도로 이 사진의 가치는 높다고 하겠다.


그 시절 이곳을 찾은 조선인들과 수학여행객들은 저런 곳에서 두고온 가족 친구들을 위해 선물을 골똘하게 골랐을 것이다. 금강산은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터라 선물은 반드시 사야 했을 것이다. 기차 출발 시간은 다가오고... 그들의 뒷모습을 상상해본다.



이제 등산박물관의 큐레이팅을 보여^^줄까 한다. 


흐릿한 한자를 읽어보자. 좌측의 간판은 '금강산 토산품"이라고 보인다. 밖에 물건을 내어놓지 않고 있다. 우리는 상가 바깥에 전을 펼치는데 말이다. 아마 이곳 협회에서 관리를 했을 것이다.


오른쪽은 "일지출(日之出일출이라는 뜻, 일본어로는 히노데라고 읽는다)인 듯 하다. 아마도 경성일지출상행(京城日之出商行)의 금강산 지점으로 보인다. 일지출상행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진엽서 등 문서 사진류를 발행하고 유통하는 대표회사였다. 1901년 창업하여 말그대로 각종 수천 수만장의 사진엽서를 발행했고, 사진엽서는 당시를 대표하는 기념품이었다. 


수학여행을 떠난 양정고보, 대구사범 친구들도 저 두곳을 분명 들렀을 것이다. 할아버지를 위해 목재 재떨이를 어머니를 위해 목재 쟁반을 그리고 친구 동생 조카들을 위해 학용품과 두눈으로 금강산의 절경을 돌려가며 볼 사진엽서를 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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