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도의 '행복의 일요일' -북한산과 도봉산이 등장하는 최초의 가요는 무엇일까요?
도봉산과 우이동 북한산이 함께 나오는 대중가요는 무엇이 처음일까요? 아마도 1958년 송민도가 부른 "행복의 일요일"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대중가요 가사집을 살펴보지 않고도 추측할 수 있는 실마리가 없지는 않다. 북한산과 도봉산은 함께 언급될 그런 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도봉산이 1절이고 우이동이 2절일까? 왜 우이동은 일제부터 벚꽃놀이의 대명사인데 굳이 버드나무를 넣었을까? 등등 송민도가 부른 "행복의 일요일"에 대한 등산박물관식 코멘트를 해 볼까 한다.
언젠가 TV에서 가수 현숙이 유쾌하게 '다람쥐가 꿈꾸는 도봉산으로 그대 손을 잡고서...'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이어지는 2절에는 우이동도 나오길래, 어랏 이런 노래도 있네 싶었다. 다음에 찾아보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가 잊어버렸는데, 오늘 문득 떠올랐다.
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인데, 가사는 이렇다.
행복의 일요일
1, 다람쥐가 꿈꾸는 도봉산으로 그대 손을 잡고서 같이 갈거나 하늘의 눈구름도 둥실 춤추고 흐르는 시냇물은 맑기도 한데 송사리 숭어떼가 물장구 친다
행복의 일요일은 사랑의 꽃이 핀다. 가슴에 꽃이 핀다 2. 실버들이 늘어진 우이동으로 그대 손을 잡고서 같이 갈거나 그늘 숲 파랑새가 노래를 하고 나리꽃 하늘 하늘 반겨 주는데 일곱빛 무지개가 아롱 거린다 행복의 일요일은 사랑의 꽃이 핀다 곱게도 꽃이 핀다.
3, 벌거숭이 뛰노는 광나루가로 그대 손을 잡고서 노 저어 갈거나
1)왜 1절이 북한산을 제치고 도봉산일까?
북한산 국립공원 안에 도봉산이 들어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교통수단이 지금같지 않던 시절 서울사람들이 자주 찾은 곳은 우이동, 정릉 등 북한산 계곡과 봉은사 근처 뚝섬 근처 등 한강변이었다. 도봉산은 너무 멀기도 했고 딱히 찾을 이유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작사가가 1절에 도봉산을 넣은 건 다분이 의도적이다. 시선을 산(도봉산) --> 계곡 (우이동) --> 한강(광나루)로 이동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리고 계절적으로 1절, 봄눈 녹을 무렵 --> 2절 봄 --> 3절 여름으로 하고 있어 시간과 공간이 잘 결합된다.
2) 왜 '다람쥐가 꿈꾸는' 도봉산이라고 했을까?
행복한 일요일날 우리 들뜬 마음처럼 움직이는 포유류로 다람쥐 말고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말, 일본의 등산가 이이야마 다츠오가 쓴 "조선의 산"에도 포유류 사진으로는 다람쥐만 두번 등장할 뿐이다. 유럽알프스라면 산양이겠지만, 산양이나 사슴 등은 우연히도 만나기 어렵고 다람쥐가 그나마 귀여운 놈이라서일 거라 본다.
참고로 산을 잘 오르는 이를 '다람쥐처럼 잘 오른다'라고 하는데, 이 비유는 조선 후기 담정 김려 선생이 1797년에 함경도 부령에 유배가서 남긴 "問汝何所思(문여하소사)-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시리즈 중에 석씨 성을 가진 형제를 그린 시에서 발견했다.
3) 왜 우이동에 실버들일까?
우이동은 벚꽃으로 유명했다. 일제시대 경성인들은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들도 우이동으로 봄꽃 구경하는 걸 즐겨했다. 반야월 선생도 1917년생이니 이를 잘 알았을 수 밖에 없다.
그는 1940년대 "결전태평양 일억총진군" 친일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해방 후 이를 속죄하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1절의 다람쥐에 이어 2절에도 의미있는 동물로 댓구를 하려 해서일 수도 있겠다. 벚꽃과 인연을 지은 동물은 없으니 말이다.
참고로 연초록 버드나무와 노란 꾀꼬리는 3000년전부터 동양인이 시를 읊을 때 함께 등장하는 세트였다. 그러나 시인은 노란색 꾀꼬리 대신에 파랑새를 선택했다. 그 다음에 노란 나리꽃 때문이었을까?
반야월 선생은 등산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1절에 '숭어'를 넣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1950년대라 하더라도 도봉산에 숭어가 있었을리 없다. 2절에 나리꽃도 아름답긴 하지만, 나리꽃에 감응하는 이들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해서 역설적으로 이렇게 북한산과 도봉산이 함께 들어간 최초의 노래라는 무대 뒤(^^)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단 하루 주어진 주말이라 행복의 '일요일'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채 복구되기도 전인 1950년대 말 한 시인이 꿈꾸는 행복은 이랬을 것이다. 서울 근교의 산과 계곡 그리고 한강변은 이랬을 것이다.
'''''''''''''''''''''''''''''''''''''''''''''''''''''
덧붙여) 일제하 선우일선이 부른 조선8경이라는 노래가 있다. 유튜브에서 들어볼 수 있다. 조선의 아름다운 8곳을 부른 건데, 경주 석굴암의 일출과 해운대의 달맞이가 들어가 있고, '캠프의 부전고원'이라는 구절이 있다. 한여름 경원선 타고 올라가 부전고원에서 캠프하는 맛이 어떠할까?
생애 마지막까지 티벳 무인구를 탐험하고, 산악계 최초로 해외 원정을 다녀 온 경희대 박철암 교수는 월남하기 전 청춘시절, 온갖꽃이 피어 있던 부전고원을 아련하게 회상한다.
덧붙여 2) 송평인 기자는 설악산 산양의 친구 박그림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박그림의 산양에 대한 관심은 95년 설악산의 세계자연유산 신청이 검토되던 때 한 유네스코(UNESCO) 조사관의 길잡이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조사관은 박씨에게 “설악산만큼 아름다운 산은 다른 곳에도 많다”며 “그런데 왜 이 산에는 야생동물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고 “야생동물이 없는 산은 죽은 산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박씨는 그 조사관의 말에 충격을 받고 처음 야생에서 산양을 봤을 때의 감동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호랑이가 없는 시베리아 산림은 얼마나 황량할 것이며 무소가 없는 남아프리카 초원은 또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