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창간한 월간 '등산'이 1971년 제호를 '산'으로 바뀐 이유는 무얼까요?

카테고리 없음|2020. 10. 7. 01:24

생각해보면 이런 것도 궁금합니다.

1969년 5월에 태어난 월간 '등산'이 왜 지금처럼 월간 '산'으로 바뀌었을까요?

바뀐 때가 1971년 1월인데요. 



이 질문은 1) 창간 당시 편집장이었던 최선웅은 어떤 제호(題號)를 점찍고 있었는가.

2) 그게 왜 월간 '등산'으로 바뀌었는가?

3) 하필이면 1971년 산으로 바뀌었는가?로 나누어집니다.


        * 창간호 등산이라고 씌여 있슴


1) 최선웅은 원래 '산山'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 이유는 1962년 엄마를 졸라서 산 일본어 산서 "세계산악명저"(전 6권)에 영향을 받아서입니다.

3) 이 책만 사주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갈께 다짐했는데, 그게 되나요.

4) 이 책은 등반기술서가 아니라 산과 문학, 산과 영화. 산과 미술 등, 

   산에서 벌이는 인간의 향연 또는 인간과 산의 각종 교집합의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5) 이 책은 그가 제일 아끼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6) 1968년 산악잡지를 꿈꾸는 그가 선택한 잡지명은 당연히 '산'이었습니다.

7) '산'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모든이들이 모이는,

    또는 역피라미드처럼 모든 것- 등산행위. 문학, 예술, 우정 - 이 싹트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 등산으로 표기된 1970년 10월, 11월호

 

7-1) 그런데 1969년 3월 23일 한국산악회 회장인 노산 이은상선생에게 글씨를 받으러 갔습니다.

8) 노산 선생이 최군, 산보다 '등산'이 좋지 않을까 해서 현장에서 위의 표지처럼 '등산' 글자를 받고 잡지명도 등산으로 결정했습니다.


9) 그러나 최선웅은 '산을 오른다'는 행위적인 측면의 등산보다 산을 내심 선호했죠.



10)그러나 6월호부터 잡지 발행이 힘들어집니다.

11) 다음해인 1970년부터 이은상 선생의 동생인 이신상씨가 발행인으로 들어옵니다.

12) 그러나 여전히 적자입니다.


13) 1970년 10월호부터 방일영이 이끄는 언론계,정재계 등산모임 '신우회'가 경영을 맡습니다.

14) 신우회에서는 발행인 김영관, 편집주간으로 조선일보 문화부장이었던 이일동을 선택합니다.

15) 이일동은 문화부장이니만큼 문화계 예술계 학계 등등 최고 고수들과 교유하던 인물입니다.


15-1)10월달부터 11월달까지 최선웅과 이일동은 산악잡지의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싸웁니다.

산악잡지냐 vs 문예지냐라는 거죠.

싸움에 패한 산악잡지파 최선웅이 중이 떠나야지 하면서 홀홀단신 무림의 세계로 떠나갑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팩트'입니다. 월간 산과 최선웅 선생님이 잡지에서 공개한 팩트입니다.


이제 1971년 1월호 김영관 발행인은 권두언에서 관련 구절을 보겠습니다.


잡지 등산은 해해를 기하여 제호를 산으로 바꾸었습니다. 등산보다 산은 보다 간결 간명하면서도 그 지니는 뜻과 내용이 더욱 포괄적이며 총합적이어서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애독자 여러분의 뜻과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지니는 뜻과 내용이 더욱 포괄적이며 총합적이어서"를 해석해야 할 시간입니다.


           *등산개제 산으로 표기된 첫 책 1971년 1월호. 이 글자는 서예가 김응현 선생 작품


여기서부터는 제 짐작. 추측입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1970년대 월간 산 기자들은 기사를 써지 않았습니다. 

외부 필진들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받는 일을 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알피니스트 최선웅이 떠난 마당에,

그런 외부 필진인 문인 예술가들이 매력을 느낄, 

자기들이 놀 공간으로서 산악잡지 이름이 '산'이 좋을까요? '등산'이 좋을까요?


그들에게는 행위적 측면의 등산보다는, 방안에서도 가능한, 모든 것이 비롯하는 '산'이 좋습니다.

철학, 그림, 음악, 시. 소설의 교집합은 산이죠.

단팥빵의 앙꼬는 당연히 산이 되어야 하는거죠.


         * '등산 개제' 없이 그냥 산으로 표기됨


16) 그래서 이일동은 1971년 1월 잡지명을 '산'으로 바꿉니다. 

17) 그래서 이때부터 이항녕 교수. 시인 모윤숙. 화가 박고석. 시인 신석정. 소설가 정비석, 화가 천경자. 서경보 스님, 안병욱 교수 등등  각계 명망가들이 필진으로 등장합니다.


18) 당시 실질적으로 자금을 제공한 건 신우회가 아니라 방일영 회장입니다.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이 보기에도 '산'이 더 확장성이 있는 용어라서 좋아했을 겁니다.


  *1980년 6월호. 조선일보사가 인수하여 펴낸 첫 잡지. 

  글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계산무진'의 산을 차용


19) 1980년 본격적으로 조선일보는 월간 산을 인수합니다. 제호도 그대로입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어언 50년동안 월간 산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20) 결국 최선웅이 옳고 이은상이 틀렸습니다.

21) 애초부터 아이러니죠. 순수(?) 알피니즘을 추구한 20대 중반 젊은 친구가 오히려 '산'을,

     하이킹을 좋아하는 늙은 지식인 이은상이 '등산'을 선택했다는 것은. 

     세상 일이란 게 서로 반대쪽을 원하는. 수레의 양바퀴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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