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는 과연 김정태가 만들었는가? 등등 백령회의 허상에 대하여 1

카테고리 없음|2020. 11. 17. 18:54

"백령회는 과연 1937년 김정태가 만들었는가?"

 

2020년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은 한국산악계의 수준이 얼마나 허약한지 잘 드러낸다.

백령회는 어떠한 단체인가?

김정태는 어떠한 인물인가?

일제하 한일간 등반경쟁에서 승리한 민족적 자존심이라고들 하며, 한국산악회와 한국산악계의 원류라고도 일컫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손경석 말고는 고민을 해본 이가 없으니 이 지경이다. 김정태의 글을 받아쓰기만 했다. 교차 검증, 팩트 체크가 들어간 책은 없다.

 

결론은 이렇다.

백령회는 1937년이 창립이어서도 안되고, 김정태가 만들었다고 해도 안된다. 불가불가불가(不可).

다시한번 간곡히 말한다.

백령회는 1937년 창립이어서도 안되고, 김정태가 만들었다고 해도 더 안된다.

 

중요한 부분이 이럴진대, 

나머지 백령회 관련, 일제시대 조선인 산악사의 진실은 어떨지 기대가 되지 않나요?

 

등산사에 관심있는 이들은 대부분 '백령회는 김정태가 만들었잖아'라고 즉각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건 다 까닭(!)이 있다. 

산악관련 책과 잡지가 한결같이 그렇게 주장하니까 말이다.

 

경기고산악부 OB의 회보 "라테르네 2호(1953년 발행)의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도 결정적인 반증의 자료가 된다. 

 

김정태의 발언, 특히 "등산50년"이 백령회에 관한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보니, 읽고 받아쓰기하기에 바빴다. 이제 100년이 가기 전, 아래와 같은 근원적인 화두, 이제까지 보기 어려웠던 '낯설기'를 해본다. 

 

1) 백령회는 과연 김정태가 만들었는가.

2) 백령회는 과연 금요회의 후신인가?

3) 백령회는 과연 1937년 창립되었는가?

4) 인수봉에 조선인 클라이머 리더급 60명이 몰래 올라 '‘혈맥(血脈)이 통하는 암우(岩友)’라는 사진을

   찍은 것은 과연 1940년인가.

5) 왜 1930년대 백령회 자료는 증언 말고 하나도 없을까? 

   백령회 회장 엄흥섭은 유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1930년대 사진 한장 없을까?

   같은 시기 김정태는 사진이 많다.

6) 왜 조선산악회 열혈 회원 김정태는 백령회에 동참했을까?

7) 왜 백령회는 김정태를 친일인사라며 꺼리다가 회원으로 받아 주었을까?

8) 백령회는 과연 어떤 혁혁한 등반을 했을까? 하나라도 들어 보소!

9) 김정태의 초등기록은 왜 불신받아 마땅한가?

10) 왜 몇명 되지도 않는 회원인데, 회원마다 김정태가 창립회원인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할까

11) 결정적으로... 백령회는 정말 대단한 단체일까?

12) 김정태에 대해 잘 알 백령회원들이 왜 그의 '글쓰기'에 반발하지 않았을까? 그건 win-win게임

13) 한일 초등경쟁이라 했는데, 일본 클라이머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어, 그러고보니, 이런거 궁금해지네. 역대급 의문이네.^^

이제 한국에 다행히 등산박물관이 있어, 이런 의문들을 창출해내고, 규명을 진행해 본다.

제발, 백령회에 관한 한, 기승전'비밀결사'론은 잊으시라.

 

---------------------------------------

 

참 여기서 코오롱 등산학교의 이용대가 등장한다. 

지난 주말 시골에서 코로나 와중에 가족과 오랫만에 늦가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지난 3월 '라테르네' 발굴 블로깅을 보고, 연일 전화를 해 온다. 주말에 말이다! 내용도 아름답지 못하다. 이렇다.

 

이런 글 왜썼어 뭐좀 알고 써. 손경석씨가 김정태의 이 글을 안볼 수가 없어. 같은 회보에 자기 글도 실려 있잖아.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쏜살같이 전화를 툭 끊는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밭에서 가을햇살을 즐기고 있는데, 또 전화가 온다. 

새로운 자료(나도 읽은 자료)를 손에 들고서 무시하는 투로,

백령회는 1937년이야. 이재수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양두철의 증언도 있고...다 자료에 있잖아. 라테르네 한권갖고 말고 책을 좀 많이 보고 글을 써.

- 내가 입술을 열려는 참에 그보다 더빨리 전화를 또 툭 끊는다. 허 참.

 

잠시후 전화가 또 와서는, 또 다른 책을 펼쳤는지,

ㅁ 김정태가 백령회를 만든게 아니야. 그것도 몰라? 손경석의 "한국등산사"를 한번 봐.

하고 장시간 혼자 말을 이어간다. 그러나 여기부터 허망해서 전화기를 손에서 놓았다.

 

 

이용대는 왜 자기가 쓴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대신에 손경석의 "한국등산사"를 언급했을까?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내가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참동안 황망해 한 이유가 밝혀진다.

 

김진덕씨, 이런데 관심 갖는 거는 좋은데, 공부 많이 해야 해.

하면서 그 특유의 (비)웃음소리가 들리면서 전화를 툭 끊는다. 그 목소리! 

나는 이번엔 입을 열 생각을 안했다.

 

 

그가 산서회에서 내가 총무를 하는 동안에도 내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를 항상 '김진덕씨'라고 부르는 속내를 짐작한다. 대학산악부나, 명문 산악회, 등산학교를 나오지도 않은 6두품, 3두품 쯤 취급하는 속내다. 김진덕씨는 클라이밍을 안해서... 이 말을 몇번이나 한다. 내가 인수봉 동양길이니 선인봉 표범길. 요델길 등을 선등한다고 말해도, 시간 지나면 또 그런 말을 한다. 

 

하여간 아래는 그 아웃싸 김진덕씨의 답변이고. 

혼자 책보고 혼자 생각하고 조용히 글쓰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니,

이 변방에 혼자 외치는 이의 블로그를 찾아 올 일도 없겠다만, 혹시라도 들어와서 읽고,

혹시 틀렸다고 하더라도, 맞다고^^ 칭찬하고 싶더라도 이제 전화주시지 마시라.  

 

라테르네2호를 발굴한 것에 대해 치사 한마디 없고, 참내.

대부분 사람들은 후학이 뭔가 용을 쓰면, 대부분 틀리고 하나라도 맞으면, 그걸 칭찬부터 하겠다.

아래는 기존 자료들을 "짜깁기"하지 않고, '창의적'인 접근을 해본다.

'혼자만 알고 있으면 무슨 재민겨^^'

 

-----------------------------------------

 

 

 

거의 유일한 근대등산사가인 손경석은 백령회 창립 멤버 중에 김정태가 들어있는지 아닌지 평생 고심했다. 고민의 완결판이 2010년 "한국등산사"이다. 여기에 김정태는 아니다라고 적시했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손경석은 1953년부터 이 의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1953년 그는 경기고 산악부 ob 회지인 "라테르네 2호"에 '새로운 산으로의 사모'라는 일기체 글을 기고했다. 그런데 같은 2호에 37세 김정태가 '백령회 회고'라는 글을 남긴다.  김정태의 글을 한번만이라도 찬찬히 읽었다면 평생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게 등잔밑이 어두운 법, 어쩔 수 없다.

 

손경석은 한국 적설기 등산사가 들어있는 라테르네 4,5,6호는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이용대의 추측과는 달리 2호는 '유심히'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았다니까요! 간발의 차로 놓쳐버렸다니까요! 그 결과 손경석 스스로 평생 김정태가 창립회원인지 아닌지에 대해 '무용'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어느 글에서는 양두철의 증언대로 아니었다가 하다가. 어느 글에서는 김정태의 글을 따라 창립회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느 글에서는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른다고 하기도 하고 그렇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백령회 활동이 김정태와 연동되고, 일제하 조선인 산악사와 결부되기때문에 백령회 활동이나 산악사도 글에 따라 엿가락처럼 된다. 그러다가 2010년 그의 나이 팔십넘어 나온 결정판 "한국등산사"에서는 아니라고 하고 있다. 오락가락한 관련 자료들은 다음에 글을 지면으로 발표할 때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냥 넘어간다

 

''''''''''''''''''''''''''''''''''''''''''''''''

 

왜 사람들은 백령회를 김정태가 만들었다고 믿고 있을까? 

그건 김정태 스스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김정태가 언제부터 창립멤버라고 스스로를 밝혔을까? 산악인을 위한 지면이 없던 시절이라 그 추정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손경석에 의하면 1966년 한국산악회 연보 "한국산악"의 글 "한국산악회의 창립전후(1)로 추정된다. 

 

 

손경석은 1969년 나온 월간지 "산수 4호'에 백령회 관련해서 '창립회원 이재수의 회고에 의하면, "회장 엄흥섭. 양두철 김정태 고 주형렬 등이 창립멤버"라고 하고 있다. 

 

이재수의 회고에는 김정태가 창립멤버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역시 창립멤버이자, 주형렬 김정태와 함께 트로이카였던 양두철은 김정태와 라이벌 의식이 있던 회원이고, 그는 김정태를 창립멤버가 아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왜그럴까 이들은 지금 'ㅁㅁ회'와 '백령회'를 혼동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손경석은 이 시절에는 김정태를 창립멤버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백령회원들의 자전적 기록과 증언을 비판적으로 보고, 교차검증해 나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김정태의 유명세때문일까?  김정태 = 백령회 창립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산악계 오피니언 리더들이 계속 그렇게 발신을 하기 때문이다.

 

1) 월간 산의 경우 :

2019년 불과 얼마전 월간 산은 창간50주년 기념해서 한국산악계를 빛낸 50인을 선정했다. 선정위원은 김승진 안중국 전 편집장, 이용대 그리고 익명처리된 이들인데 그 중에 김정태가 있다. 그들은 김정태를 선정한 이유 중에는 이렇다.

 

고 김정태 1935년 한국인 최초 인수봉 등정 1935년 금강산 비봉빙폭 초등 1937년 북한산 노적봉, 도봉산 선인봉 초등 1937년 백령회 조직

 

보다시피 1937년 백령회 조직이라 나와 있다. 그리고 볼드체의 김정태 경력은 모두 '세탁'된 거다. 경력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상을 주었다. 전부다 틀렸다. 다음 시리즈에서 밝혀보겠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태는 당연히 첫손에 상을 받아야 할 분이다.

 

2)  여기서 이용대가 서두에 내게 했던 말 "ㅁ 김정태가 백령회를 만든게 아니야. 그것도 몰라? 손경석의 "한국등산사"를 한번 봐. " 그래서 내가 잠시 망연자실했다는 걸 기억하자. 왜그랬을까?

 

 

2007년 이용대가 쓴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는 산서로는 드물게 많이 팔렸다고 한다. 2017년 해냄출판사로 바꾸어 "등산 도전의 역사"로 개명하여 출판하는데....

 

2017년이면 손경석이 "한국등산사"에서 고구정녕히 백령회에 대해 말한지 7년차이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이용대 스스로 여전히 초판과 마찬가지로 "주요 창립 멤버로는 김정태 주형렬"을 꼽고 있다!" 

 

나야 그의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기에, 전화할 때 황당해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나아가 이용대 본인이 본인 책이 아니라 손경석의 책을 펼쳐보고, 그걸 무기로 삼아 독학을 하는 김진덕씨를  비난하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2007년, 2017년 이용대가 2020년 이용대를 조롱하는 것은 참담하지 않은가. 그래서 입을 열 생각도 못했다.

 

검은 점들은 모두 오류 또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그러나 굳이 이를 하나하나 밝혀 주는 데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  나머지 부분도 김정태와 손경석의 옛날 버전의 주장으로 보인다. 다만 조정은 조종의 오기라는 건^^ 말해 주어도 되겠지. 

 

두 문단만 놓고 보아도 이 정도이니... 나는 그의 글을 인용한 적이 없다.

 

 

ㅁ 김진덕씨, 이런데 관심 갖는 거는 좋은데, 공부 많이 해야 해.

하면서 특유의 (비)웃음소리가 들리면서 전화를 툭 끊는다.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서는 공부를 얼만큼 해야 될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가 중요하다. 달달 외우는게 아니라 관점이 중요하다.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학원강사의 단권화 노트를 보지 말고, 원본을 보아야 한다. 낯설게 하기를 해야 한다. 반대해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사적인 흐름을 읽어야 한다. 이게 한때 고액과외선생이 간곡하게 전하는 말씀이다.

 

 

 

"등산, 도전의 역사" 책의 표지엔 "우리가 산에 오르는 한 계속 읽어야 할 책"이라고 적고 있다. 사정이 있어 나는 산에 못간지 제법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책 박스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 이 원문사진을 찍기 위해 결국 도서관에 시간낭비를 해야만 했다.

 

2006년 마운틴에 연재하고 2008년 "한국바위열전"을 쓴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인 손재식이 백령회 관련한 부분이다. 그 역시 김정태를 창설 멤버라고 하고 있다.

 

"마운틴 오디세이"의 저자 심산 역시 1937년 김정태를 창설멤버라고 하고 있다. 모두가 한결같이 백령회 = 김정태 창설로 보고 있다.

 

 

심지어 한국산악회에서도 1937년 김정태가 백령회를 조직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1937년 백령회를 조직하고 1935년 인수B길을 초등했다고 거짓 세탁한 이의 이름을 딴 '김정태상'을 만들었다. 김정태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상을 주다니. 산악계에 거짓이 많은 건 그 '태산준령'부터 그러하다.

 

이런 까닭은 물론 1953년부터 있어온 '자료'를 '자료'로 보지 못한 까닭이다. 김정태는 전쟁때 만든 라테르네를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고 믿어 점점 경력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첫 조작이 손경석이 1962년 쓴 "등산백과"의 부록 '한국등반사'파트에 실려 있다. 이제 67년째가 되었다.

 

''''''''''''''''''''''''''''''''''''''''''''''''''''''''''''

 

이제 늙고 노회한 김정태가 아니라 역시 노회하긴 하지만 젊은 37세 시절의 김정태 육성을 들어보자. 라테르네 2호의 기록에는 그가 일본인 중심의 조선산악회원이었다는 것을, 친일적 등반가라고 기존 백령회원들이 기피(추정이지만 거의 맞을 듯)했던 것을 극구 숨기려 하고 있다. 여우가 물을 건너려다 결국 꼬리를 젖듯이 결국 실패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진실의 물꼬는 복잡하지 않다. 단순하다. 하나로 모든걸 드러낼 수가 있다. 

방안에 가득한 어둠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둠을 쫓아내서가 아니라 촛불 하나를 켜면 된다듯이.

김정태는 1953년, 라테르네 2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떄는 해방된지 겨우 8년밖에 안되어 기억이 생생할 때이다.

 

그는 백령회 이전이라면서 1935년 -> 1941년으로 하고 있다.

아직 미래에 산악계 원로가 될 줄 몰랐던 중견의 김정태의 말을 더 믿어야 하지 않는가?

 

이 말은 두가지로 해석된다. 백령회가 1941년 또는 1942년에 창립되었거나,

또는 그는 1941년까지 백령회 회원이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어느 해석이 옳을까? 

두번째가 맞다. 

그리고 놀라지 마시라. 첫번째도 맞다!

 

 

사(二) 고 엄형과 맺음 챕터를 보자.

 

 

이러한 ㅁ 적때 고 엄흥섭형(엄성환, 엄익환 형의 부친)을 만났다. 나의 세컨드 엄동지로부터 동성동명의 엄흥섭형의 존재를 알았으며, 또한 초면소개를 받았다. 그를 알기 조금 전(前) 그를 중심으로 백령회라는 모딤이 생겼다는 것과 그들의 열열한 수련과 진출이 있음을 들었다.

 

어느 봄날(1914년) 가벼운 만장봉 정상에서 그와 초면의 환담이 끊이지 않았다. 무뚝뚝한 나를 그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대해주었으며......

 

이러할 적에 처음으로 백령회 리더(창립회장)이라는 엄흥섭을 만났다고 하고 있다. 그와 초면은 1941년 봄이었고. 그를 알기 조금 전에 그를 중심으로 백령회라는 모딤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1953년 글과 196,70년대 동일인의 글 중 무엇을 믿어야 할까? 나중에 보듯이 김정태는 1962년부터 1976년 "등산50년"까지 초등반 연표를 조금씩 조금씩 슬금슬금. 1년씩 1년씩 옛날로 밀어 올린다. 믿지 못할 초등반 기록들이다. 따라서 둘 중에 그나마  어린 아기앞에는 노인들도 무장해제하고 진실해지듯이 1953년 어린 친구들에게는 하는 말 중에 더 챙길 게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거 따로 해석해야 하나? 아니면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지말고, 한번쯤 1976년 김정태의 기록을 순수하게 믿듯이 이것도 한번 순수하게 받아들이자.

 

1) 김정태는 1941년까지 백령회 회원이 아니었다.

2) 그를 알기 조금 전 그를 중심으로 백령회라는 모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生)겼다'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생겼다니까!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때까지는 1941년 가을까지는 유명무실한 동호회 수준이었다. 김정태는 '봄'으로 기억하는데, 가을이기 쉽다. 가을에 김정태가 합류하면서, 그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그때까지는 ㅁㅁ회라고 했다가 그때부터 백령회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재수는 김정태가 들어오면서 활발해졌으니 창립이라고 본거고, 양두철은 그 이전 엄흥섭하고 함께 ㅁㅁ회를 만들었고 등반을 했으니 김정태를 나중에 합류했다고 보는 셈이다.

 

백령회라는 이름이 실제 그당시 그들이 붙인 이름이라면 말이다. 백령회라는 명칭에 대한 증언 말고 단하나의 증거가 없으니 의문이지만 말이다. 희안해... 없어도 너무 없어.

 

 

"그들의 열열한 수련과 진출이 있음을 들었다."라는 구절은 중요하다 다만 글이 너무 길어져서 지치기도 하고 시간관계도 있고해서 해석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다만 글이 또 길어지지만 하나만 팩트체크하자.

 

책을 어디두었는지 찾지 못해 아쉬운데. "한국산악회 70년"에는 인수봉에 조선인 클라이머 리더급 60명이 몰래 올라 '‘혈맥(血脈)이 통하는 암우(岩友)’라는 1940년 가을 사진을 올려놓고 있다. 김정태와 백령회가 주도하고, 정상에서 김정태가 은밀하게 미래를 준비하자는 축사를 했다고 적고 있다.

일본 경찰이 낌새를 채고 수사를 하려다 말았다고까지 적고 있다.

 

 

이거 이제 농담이라는 거 알아야 한다. 1940년까지는 김정태 백령회 아니었으니 말이다. '라테르네' 아니라고 해도 이거 '웃자고 하는 농담이라는 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진지하게 주장하시니 내가 정색하기도 좀 그렇다.

 

생각해보시라. 2020년 여름 내내 인수봉 안가는 이라고 해도, 가을이 되면 인수봉 한번 가볼까 하는 게 인지상정아닌가. 조선인 '리더급^^ 클라이머 60명이 가을에 인수봉을 올랐는데, 일본인 클라이머들은 왜 한놈도 안갔을까? 그들은 뭐 그날 시내에서 할로윈 파티했을까?

 

내게 조선인이 60명 인수봉 언제 갔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1943,4년쯤 된다고 하겠다.  일본인들은 강제 징병을 당해, 젊은 2,30대 클라이머들도 많이 전쟁에 끌려가고 남아 있는 이들도 마음 편히 클라이밍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일본이 패전의 분위기가 점점 확실해지고 해서 여행과 관광을 떠나는 건 '불충'한 행위, '비국민'적인 행위라고 비난을 받을 때였다. 따라서 인수봉에 일본인들은 썰물처럼 빠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일본 경찰이 수상하게 여겼냐고? 그들이 인수봉 정상에서 만세를 부를거라고 오해해서가 아니라 '불충'한, '비국민'행위를 하니까 그런거다. 즉 치안사범이 아니라 풍속사범쯤 보아서일 것이다. 

 

 

** 20201219추가
한국산서회 카페에 조장빈 선배의 '우산손경석의 한국등산사 읽기- 1940년 인수봉대집단 등산사건'을 보면, 

 

 

이렇게 하단에 날짜가 정확히 1940년 11월 3일이라 찍혀 있네요.

그래서 위에 있는 제 가설은 폐기하고요.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첫번째 같은날 찍은 다른 사진 한장이 있습니다.

이 사진을 함께 보면 김정태 엄흥섭리더 등은 특정됩니다. 그러나 당시 함께 했다는, 보성산악부, 세브란스산악부. 양정고보,. 반도산우회 등의 회원들은 특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일본인들은 함께 할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요?

 

의아할 수 있는 일 -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하듯이 자일을 앞에 두고 찍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얼까요? 당시 인수봉 바윗길은 몇개 되지 않았습니다. 제 짐작엔 등반과 하강용으로 각피치마다 묶어둔 건 아닐까라는. 이영준 마운틴저널 발행인이 말했듯. 당시에는 지금처럼 후면 하강루트가 아니라 올랐던 길 그대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중요한 건. 1940년 하루. 조선인들만 해도 이렇게 60명이 오른다는 사실. 

교통이 불편한데도 당일치기로 집에서 출발하여 오르고 내려갔다는 사실.

인수봉이 그리 험악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인수봉에 대한 편견을 버려서야 합니다.... 

 

그리고 6,70년대까지만 해도 크랙마다 나무와 풀들 흙들이 있었고요. 고독길 쪽으로 올라갈 때 마지막 참기름바위라고 하는 곳도 그시절만 해도 제법 굵은 나무가 있어서 그걸 이용하면 쉽게 올라갔다고 합니다. 일제 그시절 '잡고 밟고 오르는 건 뜻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수도 있겠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결국 시리즈로 써고 이참에 글을 쓴 다음 곧바로 오탈자 교정정도 보고 이북(E-Book)으로 내기로 금방 결정했다. 나도 이제 김영도가 구분하듯이, 1 산에 오르는 사람/안오르는 사람, 2, 책보는 사람/안보는 사람, 3 책을 쓰는 사람/안쓰는 사람 중에 1과 2였는데, 3 산책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게 책이 아니라면 무엇이 책이겠는가. 내 첫 책은 백령회의 정체는 무엇인가?가 되겠다. 

 

'백령회의 정체를 보는 고리타분한 받아쓰기들과 숨은그림찾기 하나"쯤 하면 좀 있어 보일려나.

 

 

 

 

 

 

 

사족: 그렇다고 김정태를 깍아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해방후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산악계는 조기 축구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 대만, 북한 수준처럼 주말에 산에 가서 '건강'과 '인자요산'이나 읇조리고, 내려와 술마시는 게 등산인줄 알았을 것이다.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세계 알피니즘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에 힘입은 바라고 본다. 그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진실은 진실이고, 항상 김정태 선생님에게 감사를 올린다.

 

사족2: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인싸들의 세계에서도 백령회에 대해 알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나 인싸들이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무릇 활력있는 세계가 그렇듯이, 약간의 파열음을 내는 아웃싸의 존재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런 효용의 관점이 아니라 천성상 내가 서 있고 싶은 곳이 그곳이다.

 

사족3: 노파심에... 정색하거나 불쾌해 여기지 마라. 공원에 가면 이런사람 저런사람 다 있지 않나. 웃통 벗고 힙합 춤추는 놈, 쓸데없는 말 하면서 막걸리 먹는 사람, 중얼중얼거리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 힐껏보고 그냥 지나친다. 내 글이 얼토당토 하지 않거나 곳곳에 허점을 발견하신 분들은, 반론이나 의문은 환영하는데요. 혹시라도 불쾌해 하지는 마세요 대신 저사람 중얼중얼하고 있네, 하고 그냥 지나치셔도 정신건강상 좋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