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2 - 백령회는 과연 금요회의 후신인가?
한국산악계가 자랑하는'백령회'는 과연 '금요회'라는 조직으로부터 시작할까요?
"1937,8년 백령회는 1933,4년경 금요회로부터 시작했다"라는 게 통설(!)이다.
김정태와 손경석의 이 말을 그냥 '받아쓰기'하지 말고 의문을 품어보자.
출발점이 될 질문은 이렇게 해야 한다.
'어떤 계기가 있어, 왜 그들은 1942년 그해 겨울 금요회를 만들었을까?'
공룡학자들이 뼈하나로 공룡을 재현하듯이, 나는 금요회에 대해 이렇게 종합 판단한다.
금요회라는 club은 아예 없었고 meeting은 있었다.
금요회는 백령회 이후에 생겨났다.
금요'회'(meeting)는 백령'회(Club)'내의 공부모임에 불과하다.
금요회라는 모임은 일본인이 주축이 된 조선산악회에로부터 배운 것이다.
금요회가 생겨난 연도도 정확히 비정할 수 있다. 1942년 겨울이고 기껏해야 1년정도 지속되었다.
왜 이때 만들었는가?
그건 1941~42년 마천령산맥 대종주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난 후 공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서이다.
다시말해 금요회가 백령회의 전신이라는 것은 어떤 '음모'를 위해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
근거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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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처음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의아했다.
어랏, 3만불 시대도 아닌 그시절 주말도 아닌 금요일날 클라이밍을 하는 모임이 있었다니.
일제시대는 천국이었나?
일제시대때 산악'회'와 등산'회'에서 '회'의 뜻은 전혀 다르다.
금요회라는 명칭에서 오늘 그 전형적인 예를 보자.
일제하 조선인 산악운동을 알기 위해서는 두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백령회 멤버들의 출생년도는 언제일까?
두번째로 그들은 어디에서 클라이밍을 처음 배웠을까?
엄흥섭 회장은 1945년 37세로 돌아갔으니 1909년생, 주형렬은 1914년생, 와타나베 엄(김정태의 파트너)도 1914년경, 김정태는 1916년생 양두철은 1917(8)년생이다. 백령회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나이가 중요하다.
두번째, 록클라이밍이 다른 스포츠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배가 필요하다. 팀이 필요하다. 혼자서 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학생산악부 출신은 학교에서 배운다. 방현은 세브란스 치과대학 산악부에서, 고희성은 양정고보 산악회에서 배운다. 그렇다면 사회인들은 어디에서일까?
백령회 멤버들의 학력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아무도 없다. 산악인들의 학력에 관심 많은 손경석도 그들만큼은 지나친다. 백령회 멤버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클라이밍을 보거나 배웠을까? (그들은 김정태를 빼고 서대문파로 지칭(손경석이 만들어낸 용어로 보임, 진실은 아닌걸로 추정)될만큼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쪽에 터를 잡고 있었다. 당시 그 동네는 부유한 동네가 아니었다.)
백령회 멤버들의 주소와 직업을 보면 화이트칼라로 보이는 이들이 없거나 극히 적다.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김정태는 스스로 배웠다고 하고 있다. 그의 파트너 엄흥섭(와타나베 엄)은 와타나베 양화점에서 제화공(구두만드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서양인과 일본인의 등산화와 스키화를 만들면서 그들에게서 등반세계를 알게 되었다.
어떤 이에 의하면, 와타나베 엄의 등반실력은 김정태보다 나았다고도 하고 있다. 그는 1947년 죽고, 김정태는 '등산50년'에 '나의 세컨드'라고 지칭하고 있다. 짐작으로 엄흥섭은 소학교를 나왔거나 또는 못나왔을 수도 있다.
김정태는 "등산50년"에서 평생 그만큼 구두를 잘 만드는 이를 보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아무래도
소학교를 졸업했거나 못하고 현장에서 뼈가 굵었을 거로 보인다. 그리고 1942년 겨울부터 1943년 이어진 "금요회"는 격주로 모여 등반 전반에 대해 학습을 했다. 발제자는 민주적으로 평등하게 전회원이 돌아가면서 나누었다. 엄흥섭은 나이로 보나, 클라이밍 실력은 발군인데 비해 발제는 맨 마지막 6월 둘째주에, 그것도 주제를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나머지는?
엄흥섭 회장은 제법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듯 한데, 학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장남인 엄익환의 글에는 있을 수도 있겠는데, 발견하지 못했다.
손경석은 엄익환과 절친한 친구이다. 평소 엄익한에게 부친인 엄흥섭에 대해 많은 말을 들었다고 하고 있는데도 책에서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내보일만한 학력(=고보)는 아닌 걸로 보인다. 주형렬도 알려진 바가 없다. 소학교 졸업일 가능성이 많다. 양두철은 학력을 적긴 적었는데, 흥미롭다.
사람과 산에 손경석이 연재한 '인물로 보는 한국등산사(10), 한국산악운동을 묵묵히 이끌어온 백령회원, 양두철'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양두철은 1924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1930년 소화공과(昭和工科)라는 중학 과정의 학교에 입학하고 암벽등반에 입문한다. 그때가 1931년이라고 한다. 그 분의 등산경력 중에 1937년 북한산 노적봉 초등은 다음에 완벽한 산악인으로서 백령회원이 되는 등용문이 된다."
1930년 소화공과라는 중학과정의 학교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애매한 이름의 학교라니. 이름만 놓고 보면 상당히 '친일'스럽다. 혹시 '메이지ㅁㅁ'처럼 통신수업처럼 집에서 교재를 갖고 중학교 과정을 하는 그런 건 아닐까 싶다. 암벽등반에 입문한게 14살이라고 한다. 1931년은 상당히 의아롭다. 당시 조선인들 중에 등반을 한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싶다.
1931년 조선산악회 창립때 함께 한 박래현 등 4명 정도가 겨우 눈에 띨 정도로 이른 시기인데, 과연 14살의 그에게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가벼운 문제가 아닌데 여기서는 그냥 지나친다. 선의로 해석하면 동네 뒷산인 인왕산 슬랩 바위를 일본인 클라이머들의 흉내내서 올랐다라고 본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백령회 리더들은 모두 고보를 나오지 못했다. 당시 고보 졸업생은 요즘같은 평범한 고등학교가 아니라 엘리트를 의미한다. 경기고보나 경북고보 평양고보의 모자의 실선은 각각 하나둘셋이다. 그 모자가 길을 걸어가면 선망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고보를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무식하다는 뜻은 아니나,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금요회에 대한 '정설'은 1933,4,5년경부터 엄흥섭 회장이 주도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금요회의 존재에 대한 공식적인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는 걸로 간주한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엄흥섭 회장의 장남이 엄익한(1926년생)인데, '한국산악회보에 1926년에 금요회가 있었다고' 발표를 했다고 한다. 사람과 산에 '산악계 이끌 인물들 1920년대에 나타났다'라는 글에서 손경석은 ' 이 연대에 적지 않은 의문이 있고 이것은 후일에 미루고'라고 두리뭉실하게 넘기고 있다.
산악인 엄익한이 1926년이라고 과감히(?) 주장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물증이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리고 도대체 후학들에게 어떤 말을 들으려고 과감하고, 오히려 어른의 명예에 누를 입힐 말을 했을까? 1926년이면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거두절미하고 한국에서 외국인에 의해 인수봉 초등도 되기 전이다. 클라이밍이 싹트기 전에 클라이밍을 했다는 말인데, '근거가 없다'라는 근거를 더 찾을 필요가 있을까?
1926년이면, 엄흥섭 19세, 주형렬 12살, 양두철 8살이다. 이건 무슨 황당한 씨추에이션인가. 그렇다면 금요회는 클라이밍은 전혀 나오지 않은 전혀 다른 단체일 뿐이다.
대충 1934년설을 놓고 보자.
엄흥섭 회장이 25세, 주형렬은 20살, 양두철은 16,7세이다. 백령회 창립멤버로는 확실한 이들이 어디에서 클라이밍을 배웠을까? 서대문파라고 한다고 하면, 인왕산에서 일본인들이(당시에도 조선인 클라이머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대문파가 아닌 김정태의 회고에는 인왕산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는 걸 보고 흉내는 낼 수 있을 터이지만, 클라이밍은 극소수 생이지지(태어나면서 아는)자들 빼고서는 '배워야' 가능한 일이다.
김정태의 "등산 50년"과 손경석의 "등산백과(1962년)에는 당시 최강 난이도 루트로 주봉후면 크랙코스를 소개한다. 이 초등자는 1940년 엄흥섭회장, 주형렬 그리고 양두철이다. 김정태는 아니다(당시 백령회원이 아니었으니 당연하지만^^)
그동안 그들은 도대체 아미산파인지, 무당파인지 어디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가 1940년 마치 깜짝스타처럼 등장했을까? 왜 이 기간이 아예 빠져 있고, 사진 한장 없을까? 다시말하지만, 공개된 백령회 단체사진 중에 김정태 없이 찍은 거 없다.!
다시말해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그들은 단 한건의 등반기록도 없다. 그동안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1937년 노적봉 정면벽 슬랩코스는 김정태가 쓴 손경석의 '등산백과' 초등코너에는 없다.
왜 넣었을까? 김정태는 이때 양두철과 교유하지도 않았다.!!!
"등산50년"을 당장 볼 수 없어 손경석의 이 표를 믿는다면, 김정태는 여기서도 조작을 시도하는 걸로 보인다. 김정태가 자기가 1937년 백령회 창립했다 또는 활동했다라는 걸 '만드려고' 해서라고 본다.
이건 진실이 아니라면, 금요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손경석에 의하면, 주형렬은 클라이밍의 대부, 김정태는 적설기 등반의 대부. 박순만은 스키의 대부라고 하고 있다. 양두철은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의 '사나이'였다 그들은 그동안 뭐했지.
'금요회'에서 오직 연구를 했단 말일까. 클라이밍이 수능과목도 아닌데.
서대문 뒤에는 곧바로 인왕산이 있는데. 세검정 지나 조금 걸어가면 노적봉이 나오는데. 노적봉에 김정태팀과 일본팀이 1935,6년 치열하게 초등을 벌이고 있었다는데.
그들은 그때 금요회라는 명칭이었다고 한다. 이 명칭은 생각하면 재미있다.
화요회,. 목요회 등등은 당시 사회주의 이념서클이나 친일단체 등에 흔한 이름이었다.
고보도 나오지 않은(무시가 아니다!)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금요회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을까?
산악계 명칭으로도 불가능하다. 토요회나 일요회라면 모를까 말이다. 그 이유는 다들 알지 않는가.
일본에서 명멸한 수많은 산악회에 이런 명칭이 없을 것이다.
해방 후 수천 수만의 한국 클라이밍 산악회에 이런 명칭은 없다고 본다.
인터넷 하이킹 산악회에서는 전국에 한두개씩 있긴 있네. 주중에 한가한 고령화 사회라서 가능하다.
왜냐고? 클라이밍은 '주중'에 할 수 없는 팀플레이기 때문이고, 한국에서는 영국과 달리 도전정신이 없는 귀족이나 부유층이 즐긴 스포츠가 아니다. 알지 않는가. 일제하 조선인 산악인들 중에 귀족이나 부유층 자제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고종이 테니스 하는 걸 보고 저걸 머슴한테 시켜야지 했다는게 불과 몇십년 전이다. 백령회원들은 고보에서 체육수업도 받지 못한 걸로 보인다.
골프모임은 화요회, 목요회, 금요회가 가능하다. 골프는 그런 모임이지 않는가.
클라이밍 모임에 '토요회' 일요회'라면 모를까 '금요회'라는 명칭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금요회라는 명칭은 아무래도 김정태가 고안해낸 걸로 잠정 추정된다.
그 근거도 찾자면 없을 수도 없다. 1942년과 1943년 백령회 자료집에 '딱한장'이 들어 있다.
제목에 금요일회 연구사항으로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금요회 내용이 있다.
매달 첫째 세째 금요일날 그들은 모인다.
그런데 이건 등반하려 하는게 아니라 지도읽기, 등산식량, 등산용어. 등산의학 등의 주제로 발표와 토의하는 모임이다. 회원 모두가 돌아가면서 말이다.
일제시대때 등산회가 있었다. 이건 산악회(club)를 일컫는게 아니라 따뜻한 봄날 등산 '놀이'를 하자는 거다. 야유'회' 할때의 회(meeting)이다.
'록파티 산악회가 매주 수요일 종로다방에서 집회를 열었다'할때의 집회 할 때의 '회'의 의미다.
백령회 멤버 그대로 금요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때 금요회는 금요일날 모여서 연구하는 집회하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김정태는 이 자료를 갖고 상상의 스토리를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그러니까 백령회내 연구 소모임이다.
그런데 연구모임이 먼저일까? 클라이밍 모임이 먼저일까? 당연히 행위가 먼저이다.
하다보니 좀 더 잘하고 싶고, 알고 싶고 그런거 아닐까.
1934년 금요회라는 명칭이 있다고 하자. 이건 실제 등반을 하자는 게 아니라 연구모임일 것이다.
이런식의 연구를 1934년경 서대문파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했을까?
그 시절 그들은 그 어떤 클라이밍 기록이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세상에 연구를 하다가 클라이밍으로 나아가는 조직이 있을까? 허랑할 뿐이다.
1934년 금요회는 이런 집회가 불가능했을 걸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멤버들을 보면 1942년 백령회는 어떻게 이런 집회가 가능했을까?
백령회는 조선산악회처럼 박사나 교수가 있는게 아니라 오로지 클라이밍 전문이다.
질문은 이렇게 해야 한다. 왜 1942년 그들은 금요회를 만들었을까?
그건 김정태 등이 조선산악회에서 보고 배운 것이라 본다. 그는 1937년부터 조선산악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을 해서 보고 배운바가 있었다. 김정태는 1941년 마천령산맥 대종주라는 위업을 조선산악회의 이름으로 양두철 주형렬 등과 해내고 보다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북한산 도봉산에서 날 좋은날을 잡아 신나게 암벽등반할 때는 필요 없는 주제들이다.
금요회 주제들을 보자. "지형도를 읽는 방법. 스키입문, 등산식량, 등산운동의 사적고찰, 산악용어. 등산의학, 장비에 대하여. 산악초등반 이야기. 식물, 동물, 채집과 표본, 산악사진에 대해. 일본의 산들. 산악기상. 암벽등반에 대하여."
교재는 아무래도 일본에서 나온 "산악연구강좌"시리즈같은 것일 것이다. 1943년에 나온 '산악기술강좌1,2')일본산악회 관서지부)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손경석은 백령회와 금요회 관련 모든 것을, 진실을 알았던 걸로 보인다.
백령회에 관련 수십건의 기사와 글에서 언뜻언뜻 그런 기색을 보인다.
그런데도 그걸 손경석이 '받아쓰기'해서 리라이팅을 한 건, 손경석의 '의도'가 있어서라고 본다.
손경석은 백령회 자료집 '백령'을 이세상에 드러냈지만, 그 '백령'을 본 이는 지금까지 거의 없는 걸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 백령을 놓고서 그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해도 아무도 진실을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작년에 '백령'이 재발견되었다.
손경석은 차마 '근대등산사가', 학자로서 할 수 없는, 적극적으로 '조작'을 한 기색도 보인다.
손경석은 사람과 산 기고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번째, '백령'에는 1937년 기록부터 있다고 하고 있다.
둘째, '백령'에는 일본어 외에 조선어로 된 기록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서류철의 느낌상, 1930년대 것은 없다고 단언해도 될 것이다.
은근설쩍 1937,8 백령회 탄생설을 동종하려 하고 있다.
지금 당장 '백령'이 없어서 그런데, 기억으로는 조선어로 된 기록은 없는 걸로 보인다.
은근설쩍 '조선어'라는 말을 집어 넣음으로써 백령회 = 민족운동의 뉘앙스를 넣으려 했다.
손경석은 왜 이렇게 했을까?
손경석의 행보, 또는 입장도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그가 김정태와는 긴장관계에 있었지만, 그의 필요에 맞도록 김정태와 백령회를 각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바라본 일제 산악사는 '한일 경쟁적 산악사관, 가끔씩 민족적 경향을 드러내는 산악사'이다. 따라서 백령회는 가급적 앞으로 당기고 싶어하고, 백령회를 당기다보니, 김정태의 등반을 백령회로 둔갑하고, 그러다보니 김정태도 앞당기게 되고.그렇게 된거다.
손경석의 글은 그래서 글마다 왔다갔다한다. 항상 팩트체크를 해야 한다. 나중에 상술하겠다.
결론: 1934년 금요회의 존재에 관한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 주형렬, 양두철도 그리 언급하지 않는 걸로 보인다. 김정태 - 손경석 투톱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글 역시 물적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말'보다는 지금 이 글의 '얼개', '심증' 그리고 '상식'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
끝.
오늘 대강 짐작을 했을텐데, 다음 주제는 1937년 백령회 창립설이다. 이 가설은 있어서도 안된다. 김정태의 자료로 김정태의 글을 비교검토해볼까 한다.
추가)
재일 한국인 이성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방 후의 한국사 연구는 그 이전의 일본사 연구가 근대 국가 형성기의 일본을 고대에 지나치게 투영하여 읽어 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한국의 민족 의식을 투영한 역사 해석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시에 근대의 국민 의식을 전제로 일본 민족과 한민족을 일 대 일 관계로 간주하고 제각각 고대 이래 자기 완결적으로 민족사를 걸어왔던 것처럼 받아들여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후 한국인에 의한 이른바 한일 관계사 연구에서는 일본 민족에 대한 한민족의 우월성을 고대사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의문의 여지없이 시도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만들어진 고대'와 '만들어진 조선인 산악사'에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매글마다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김정태와 손경석을 깔아내리는 게 아니다.
나는 항상 손경석선생님을 사사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여전히 그들을 존경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 산악사는 '하이킹산악회'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알고도 존경할 수 있어야 진짜 후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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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초)* 클라이밍은 국제 공용의 언어이다. 해방후 서울대 문리대산악회. 동대산악회 등등은 일본의 대학산악부와 교류한다. 그들의 글에서 민족을 운운하는. 경쟁을 운운하는 건 보기 어렵다. 당연하다.
오직 한사람만 그렇게 등반을 해석한다.
* 백령회라는 이름은 사실 어렵지 않는 작명이다. 은령회 흑룡회....
은령회 등등 비슷한 이름이 많이 있다. 이부부분도 나중에 적어 보겠다.
* 마천령 산맥 대종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