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5 - 김정태는 과연 1927년 백운대를 올라갔을까요?

카테고리 없음|2020. 11. 25. 17:08

백령회는 해방 전이건 후이건 김정태 없이는 큰 의미는 없다.

활동의 폭이나 헌신에 있어서도 그렇고, "등산50년"이라는 기록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1916년생)는 일생을 산 밖에 나오지 않은 '산의, 산을 위한, 산에 의한' 인물이다.

그 계기는 "등산50년"에 밝혔다시피 1927년 소학교 5학년시절 북한산 백운대 등정이다.

산에 대한 '아찔한',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과도 같이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의 첫 산행기록이라고 하는 이 백운대 등산이 1927년이 과연 맞을까요? 



"양정산악70년"의 한 장면, 1957년 5월경, 북한산 백운대의 모습이다.

쇠말뚝이 여기저기로 향햐고 있는 볼쌍사나운 모습을 말이다.

1985년 뽑혀나가기 전 오른 이라면 '저게 도대체 왜 박혀 있지'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 1985년 뽑혀나가기 전 백운대 철심의 모습


지금 이 철심은 1985년 8월 15일 '풍수침략'이라는 누명(?^^)을 쓰고 뽑혀나갔다.

그렇다. 누명이다. 

그렇다고 잘박았다고 치사를 하는 건 절대 아니고. 


1927년 백운대를 오르고, 계절따라 수도 없이,  1929년 봄만해도 벌써 너댓번 올랐다고 하는 김정태도 1927년 이런 모습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그가 오른 날은 일제가 공사를 한 뒤  10일 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백운대 철심 풍수침략을 강변했던 서길수가 등장할 대목이다.



1994년 가람기획에서 펴낸 "친일문제연구1. 일재잔재 19가지" 중에 서길수는 일제의 풍수침략사를 기고한다. 이듬해 김영삼 정권의 청와대에서 불기 시작한 전국의 쇠말뚝 뽑기 운동(해프닝)의 전조가 된다.


당시 철심에 대해서 풍수침략설과 방향표지설이 제기되었는데, 방향표지설의 대표는 1927년 백운대를 올랐다고 하는 김정태였다.


서길수는 김정태와 인터뷰를 하면서 '방향표시인 듯 하면서 풍수침략을 했다'라며 '음모설'을 유포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한국산서회 회보에 올해 기고한 내용이라 다음으로 미룬다), 김정태와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다.


김정태는 '쇠끝을 구부려.... 그 쇠끝을 따라'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습을 보고 기억해야 했다.



철심들이 반듯반듯하게 세워져 있는 모습 말이다.

이게 원래의 모습, 1927년의 모습이다.

철심을 박고 그 위에 나무판대기로 그쪽방향의 명승지를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이다.

지금 우리가 산 곳곳에 하듯이 말이다.


일제는 극악한 음모로 철심 관련 자료를 극비 문서로 '봉인'을 했기에(!?!?) 

2010년경 봉쇄가 풀리기 전까지 사천만 조선인 중에 아무도 철심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1927,8년에 오른 사람들은 '다른 기억, 정확한 기억'을 할 수 있다. 



1927년부터 수도없이 오른 김정태는 그러나 철심이 '구부러져' 있고, '그 구부러진 방향에' 명승지가 있다고 했다.

1927년 백운대가 그의 인생을 바꾼 강렬한 기억인데도 그의 기억이 나중에 굴절된 걸까?

아니면 원래 그가 처음 오른 때가 1927년이 아닌 건 아닐까?


여기서 '라떼'가 등장해야 할 대목이다.


김정태는 해방 후에도 수도 없이 백운대를 올랐다.

정상의 철심을 보고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하면서 원 기억을 계속 되살리고 일행들에게 유포를 시켰어야 옳다. 김정태의 힘은 '과거'에 있으니 말이다.


"라떼는 말이야.  너희들 중 아무도 모를테지만, 이 철심이 그때는 꼿꼿하게 서 있었어....."

지금 서울 출신들이 길을 가다가 "옛날 거리"를 회상하듯이 말이다.


김정태는 '라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1927년 백운대 등정설은 거짓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정태는 - E북을 만들때 상세하게 덧붙이겠지만 - 1927년 봄에 올랐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1927년 봄에 철난간과 돌계단을 만들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이 없는 시절 그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27년 공사를 했다는 것은 백운대 올라가는 쇠불과 발디딤을 했다는 것인데, 

백운대를 자일로 등정하곤 했던 김정태씨가 이때 가보니, 

전에 없던 쇠말뚝이 꼭대기에도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팩트는 '1927년 가을' 지금 위문 위의 돌계단과 쇠사슬 등을 설치할 때 일제가 '함께' 박은 것이다.

사람들이 정상에 설 때 안내판겸해서 방향표지용 철심을 박은 것이다. 

그러나 김정태는 쇠말뚝이 그 이후에 박혀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 


김정태는 1927년에 올라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928년 봄은 어떨까?


일본인들의 순종적(?)인 처신을 보면 1928년 봄까지는 적어도 철심이 구부러져 있거나, 목패 중 몇개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태가 봄에 올랐다고 한다면, 빨라도 1929년이 되어야 한다.


결론은 무엇인가?

김정태가 '등산50년'에 적은 기록들은 모두 2년씩 뒤로 후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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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태는 자기가 등반을 한 연도에 대해서 어떤 상승곡선의 '조작' 규칙이 있다.

슬금슬금 연도를 올린다. 또 튜닝한다. 맞춘다.



이제 1927년 진실을 보자. 

그가 1976년 등산50년에 쓴 마지막 조작 규칙(이후 등산잡지 기록에는 또 있을 것이다.)

에 의하면 백운대 초등은 1927년경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가 이렇게 역으로 꿰어 맞출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이 후 다른 기록들도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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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그는 중앙일보에 1975년 "등산50년"이라는 제목으로 '남기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듬해 1976년 한국산악회편 "등산50년"을 펴낸다.

공교롭게도 1927년부터 정확히 50년 되는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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