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6. 김정태는 과연 1930년 인수봉을 올랐는가?

카테고리 없음|2020. 11. 26. 18:24

백령회의 핵심 김정태는 1930년에 인수봉을 올랐다고 하고 있다.

과연 사실일까?

 

 

우리를 이끌 오늘의 핵심 질문은 이렇게 해야 한다.

1916년생 소년 김정태를 30년 전후 클라이밍에 빠지게 한 건 무엇일까요?

 

1) 1927년 엄마의 손을 잡고 백운대에 오른 사실

2) 여자

3) 돈

4) 모방범죄

 

1)엄마의 손을 잡고는 너무 평이하다. 2)여자 - 당시 산에는 여자가 없었다는 데에서 불가.

3) 우이동 소년이라면 나무(돈)하러 산에 가지만, 그는 돈벌러 간게 아니니 불가.

4) 모방범죄. 모방이라. 음.

소년을 들떠게 한 게 모방이라면 무엇을 모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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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태는 끊임없이 자신의 등반 년도를 바꾸어 나간다. 

어떤 필요성에 의해 교정 또는 미세조정을 해 나가는 것 같다. 99퍼센트가 연도를 2,3년 높인다. 

예외가  없을 수 없다. 바로 인수봉 초등이다 그는 1년 늦추었다 왜그랬을까?

 

1975년 중앙일보에 "등산50년"이라는 제목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인수봉 초등 부분에서 이렇게 적는다.

 

"백운대 등반 이후 우리 5명은 1929년 9월 마침내 인수봉 등정을 결행했다. 

이때 나는 14세였다"

 

이 연재가 이듬해 한국산악회판 단행본 "등산50년"으로 다듬어 나오게 되는데 이렇게 바뀐다.

 

"이렇게 해서 인수봉에 처음 붙은 것은 그 이듬해(30년)가을 9월이었다." 

 

김정태가 1930년이라 했는데, 중앙일보가 실수로 1929년이라 한 건 아닐 것이다. 

14세라고 하는데, 1927년 백운대 초등을 11세라 하니 14세는 1930년이 되어서일까?

아니다.

 

1929년은 좀 복잡한 연도이기 때문에 고친 걸로 본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수봉 초등이 1925년 전후 영국인 아처일행이나 언더우드로 추정되었고,

일본인으로서는 이이야마 다츠오가 1929년 가을에 등반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김정태가 이이야마 다츠오보다 빨라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일단 그의 말을 따라 1930년이라 하자.

흥미롭게도 김정태가 1929년에서 1930년으로 바꾼건 사실 '신의 한수'였다^^

 

이 후 세월이 흘러, 인수봉 초등이 1926년경이 아니라 1929년 9월 영국인 아처 일행이 인수봉을 초등했다는 설이 유력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아처보다 빨리 올라 갔다고 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 설은 아무래도 1995년 전후 사람과 산의  김우선 기자가 영국산악회까지 찾아가 아처의 초등기를 발굴해서 쓴 기사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김정태가 자기의 인수봉 초등이 1929년이라고 방치'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기라고 말을 바꾸거나 또는 그의 기록 전체가 '의심'을 사게 되었을 것이다."

 

김정태의 '신의 한수' 교정 덕분에, 지금까지 그의 등반기록 전체를 맥락을 잡아 연구한 이가 없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김정태의 텍스트를 "받아쓰기" 따라쓰기' 하면 안된다는 거.

진위 여부를. 이런 걸 텍스터 비평이라 하나, 원전비평이라 하나 모르겠다.

 

이제 김정태가 인수봉 하강을 어떻게 배웠나 살펴보자.

 

 

1)좀 고급질문.

 

인수봉은 그 이전 그가 했던 릿지성 등반하고 확연한 차이가 있다.

바로 하강을 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어디에서 어떻게 로프하강을 배웠을까?

 

북한산 하이킹을 하건 자생적으로 릿지를 하건 인수봉 클라이머를 보고 궁금한 사실.

올라가는 건 어떻게든 올라간다 치더라도, 내려올 땐 어떻게 하지. 로프처리를 어떻게 하지?

묶고 내려올텐데, 그렇다면 로프는 어떻게 회수하지?

 

클라이밍을 하는 이야 당연히 인수봉 정상에 하강장치- 앵커가 있다는 걸 말할텐데, 틀렸다.

1930년에는 하강장치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김정태가 인수봉을 올랐다 치자.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발군의 파트너도 아니고,  우리처럼^^  평범한 친구들하고 그것도 5명이나 데리고...

그것도 20m 로프(지금은 60m 로프)로 말이다.

하강을 해야 할텐데, 하강을 어떻게 배웠을까? 

과연 네명을  하강시킬수 있을까.can you?

 

당연한 이야기이지만,그는 '책'을 통해 배우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모방범죄를 했다. 

식민지 소년을 들뜨게 한 건, 바로 산악영화였다는 것...... 그는 그렇게 밝히고 있다.

 

 

그때 마침 교본이 된 것은 단성사에서 보게 된 독일의 산악영화 '몽브랑의 폭풍'과 '마의 은령'이었다. 거기에는 본고장 알프스에서... 어마어마한 암벽과 빙벽을 오르며 로프(자일)매기, 다루기,  확보법 등 모든 기본을 보여주어 몇번이나 침을 삼키면서 보았다.

 

이렇게 적고 있다. "몽블랑의 폭풍"은 엄청난 흥행작이었다. 영화사학자에게 묻고 싶은데, 몽블랑의 폭풍같은 명작을 과연 조선인이 운영하는 단성사에서 개봉했을까? 아니면 일인 영화관에서 개봉했을까? 순차개봉 동시개봉도 할까?

-> 배급사의 배급정책에 따라 일인극장과 단성사 등 한인 대상 극장에서 동시개봉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레니 리펜슈탈이 등장할 때이다.

그의 책과 당시 그가 주연한 산악영화는 한국에도 수입 소개되어 있다.

 

일단 위키피디아를 보면, '마의 은령'은 1929년 11월 현지개봉,

'몽브랑의 폭풍'은 1930년 가을 현지 개봉이다. 

이게 일본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 개봉되려면 1년은 걸리지 않을까?

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서 네이버 뉴스 라이버러리와 국립중앙도서관을 검색 - 이런 세상이 올 줄 그 누구도 몰랐다.- 해보았다.

 

내가 만약 13살 또는 14살 어린이라고 치자. 

영화를 보고 혼자서 하강을 배우고, 일행과 함께 인수봉을 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면,.

놀라지 마시라.

 

 

지금 김정태가 말하고 있는 영화는 몽블랑의 폭풍이 아니라 몽블랑의 왕자이다.

주제가 몽블랑 초등에 관한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1934년 12월 18일자에 개봉 기사가 나와 있다.

 

김정태는 몽블랑의 폭풍이 아니라 몽브랑의 왕자가 정확한 제목이다.

몽블랑의 폭풍을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에 록클라이밍 기본이 들어 있던가.. 다시 보아야겠다.

 

 

마의 은령은 사의 은령으로 개봉되었는데, 이 역시 1931년 2월 7일 개봉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는 매일신보와 조선 스키구락부의 후원으로.... 희락관에서 상영한다고 하고 있다.

희락관이 아무래도 일인 운영 극장일 것이다.

 

즉 그가 본 영화는 1929년 현지 개봉한 마의 은령은 1931년 2월에.

혹시 몽블랑의 폭풍은 1930년 가을이니 조선에는 1931년 가을 또는 1932년 가을일 것이다.

몽블랑의 왕자는 1934년이고.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된다.

그는 1930년 14세 나이에 인수봉을 갔을 수가 없다. 내려왔을 수가 없다.

14살 백운대오르다가 서양인이 인수봉오르는 걸보고 크라이밍에 환상을 품었다는 것도 억지이기 쉽다는 걸이제 알아야한다. 그때 그럴 서양인들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여유롭게 그가  1934년쯤 '몽블랑의 왕자'를 본 그해 가을 인수봉을 올라간걸로 보고 싶다. 

그래보았자 18살밖에 안된다.

2020년에 18살이 인수봉 아무런 사전 클라임교육없이 오를 친구 없다.

김정태는 18살이라해도 해방후 그누구도흉내못낸 등반이다.

그는 천재적 등반가였기 때문에 이후 짧은 시간에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

 

 

일단 이렇게 끝맺고, 사진자료와 좀더 자료를 찾아 있다면 보강하여 블로깅하고 E북에 담겠다.

 

 

 

다음번은 1935는 인수B길을 올랐을 리가 없다.라는 주제로 글을 올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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