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9. 김정태는 1935년 1월 금강산을 갔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정태는 1935년 1월 금강산에서 최초로 적설기 등반을 했다고 주장했다.
눈길을 걸은 게 아니라 - 놀라지 마시라 - 빙폭 등반을 했다고까지 한다.
왜 이 허위(?)의 등반 경력을 꼭 넣어야만 했을까?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러 떠나 보자.
오늘 우리가 함께 할 의문 - 그는 과연 몇년에 조선산악회에 가입했을까요?
*좌측부터 1976년판 "등산50년", 가운데 "한국산악등반사"라는 제본 책 중에는 1983년 전후 김정태는 "한국의 등산사 고찰 정사 초록"이라는 제목의 연재물이 있다. 이 자료는 산서회의 근대등반연구팀의 조장빈 선배의 선물. 오른쪽은 경기고 산악부의 1950년대 회보 모음집 '라테르네'
"라테르네"를 보면서 그의 책과 글을 읽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미심쩍었던 게 풀렸다. 가수 김민기가 논에 가득한 물을 빼는 건 바가지로 퍼서가 아니라 물꼬를 내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라테르네는 내게 물꼬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책과 글은 함께 놓고 읽어야 제맛이다. 단순히 오류를 바로잡는다는 게 아니라, 그의 멘탈리티가 읽히기 때문이다.
오늘은 1935년 1월 한인 최초로 적설기 금강산을 초등반했다는 경력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주장은 "등반 50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천길빙벽초등반"에 이렇게 적고 있다. 빙벽등반이라...!
연주암을 지나자 비봉폭과 무명폭이 잇따라 날아갈듯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경사가 더 급한 무봉폭의 우측으로 돌아 45~65도 가량 경사진 채 60m쯤 얼어 올라간 비봉폭을 탔다.
한국산서회 카페에 조장빈 한국산서회 근대등반사팀의 조장빈 선배가 " 우산 손경석의 "한국등산사 읽어보기 8, 김정태와 엄흥섭의 금강산 비봉폭 초등반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견했다. 무봉폭과 비봉폭에 관해서 차분한 논지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설득력있게 글을 전개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순한 수준에 그치기에 한국산서회 카페를 참고하길 강추한다.
월간 산이나 손경석의 "한국등산사" 등 그 어떤 기록에도 1935년 초등설은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의 증언말고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제 보겠지만, 1935년까지만 해도 빙벽은 물론이고 금강산을 갔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는 무엇이든 하자마자 무엇을 해치웠다는 식으로 적는다. 1930년 생전 처음 14살 전후 친구 네명이 인수봉을 보자마자 당일날 올라버린다. 1935년 전후 당일날 4명이 5시간만에 인수봉의 B길을 초등개척한다. 이제 생전 처음 찾는 금강산에서 마찬가지이다. 빙벽에는 거의 젬병인 일본인 이시이를 현지에서 만나 곧바로 한국에서 최초로 기록될 '본격 빙벽등반"과 비로봉까지 함께 해치운다. 이게 그 뿐만 아니라 일행들도 다 처음인데도 말이다. 자연스러운가?
재미있는 것은 그가 굳이 1935년 금강산을 찾은 이유다. 1940년경 일경의 눈치를 피해 인수봉에 60여명의 조선인 산악인이 올랐다고 했을때, 그는 그곳에서 처음 만난 이들이 많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아직 10대인데도 불구하고, 조선 산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1932년 일본인 이이야마 일행의 금강산 스키 초등반, 1932년 동경제대대의 금강산 원정, 1933년 이즈미 세이이치의 겨울 금강산 등반 등에 대해 말이다.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지금도 이 기록을 알고 있는 이 몇명이나 될까?
그는 1935년 벌써 "마치 금강산이 일본인들의 독무대와 같이 되어 버린데 분개하고 자극을 받은 까닭도 있다"라면서 민족간의 경쟁 구도, 민족의 대표라는 포지션을 세팅하고 있다.
김정태의 왠만한 등정기록은 오직 '그의 증언'말고는 없다.
이제 그의 앞선 증언이 그의 뒷 증언에 대한 반증의 증거가 되는 신묘한 묘법을 보자.
김정태는 1937년 3월 "백령회"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조선산악회에 입회했다는 건 왠만하면 말을 하지 않는다. 조선산악회는 일제하 일본인이 주축이 된 산악회고, 그는 매 순간 그들과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한국등산사고찰"에도 백령회 발족은 길게 적는데, 조선산악회 입회는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등산50년"에 의하면, 금강산 빙폭을 초등한 이시이의 소개로 1937년 방현, 김정호, 엄흥섭과 함께 조선산악회에 입회했다고 적고 있다. 학자가 아니라 클라이머이기 때문에 그는 어떤 뛰어난 등반을 해냈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중요한데 '1935년 인수B 개척'에서 논할까 한다.
놀랍게도그의 후반생 말과 달리 조선산악회는 그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띤다. 자 이제 해방된지 17년 뒤인 1962년부터 1970년까지는 조선산악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는 매 등반을 한일간 경쟁으로 볼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하다.
손경석의 1962년 작 "등산백과'초판과 1964년 "등산의 이론과 실제"로 개제된 다음 1969년 3판, 1970년 6판의 모습이다.
맨 뒤에는 한국산악회 등반위원회 편 "한국의 록클라이밍 코스와 초등기록"이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까지 내내 등반위원장은 김정태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그가 주도하여(= 오직 그만이)쓴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962년판부터 1970년 판까지 금강산 초등 기록은 바뀐게 없다. 따라서 김정태는 이 기록에 대해 '공인'을 했다고 보아도 역시 무방할 것이다.
먼저 기록을 보는 법부터 보자.
맨위에 코스명이 있고, 초등정일과 그 아래에는 어느 팀 소속으로 누가 개척했는지를 적고 있다.
1970년대부터는 인수b 개척을 1935년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1937년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시 적도록 하고.
그리고 김정태와 엄흥섭 그리고 이시이는 놀랍게도 계속해서 C.A.C 소속이라고 하고 있다
C.A.C는 김정태가 속하고 싶어하는 백령회와 라이벌이라는 조선산악회의 약칭이다!
1962년부터 1970년까지 김정태는 이 표기를 그대로 고수한다!
이 '분열된 자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금강산 외금강편에 김정태는 조선산악회 회원으로 활동을 했고, 놀랍게도 1935년 빙벽초등기록은 없다. 연도를 앞당기기조차 하는 그에게 1935년 무봉폭 초등과 동계 한국인 설악산 초등기록은 의미가 없어서일까? 손경석이 그의 입맛대로 맛사지를 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리가!
손경석의 입김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1956년 경기고 산악부의 회지 '라테르네'를 보자'
라테르네에는 1950년대 초 37세 청(장)년 김정태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글 하단에 1937년은 가리방 긁은 친구가 1938년을 잘못 오기해서이다.
글을 보자
(같은 시기) 한반도의 일인의 산악활동에 비하여 우리 한국인은 어떠했냐 하면 겨우 근교의 암장에서 대부분이 ㅁ순하며 일인들 활동에 마음만 닳고 있던 중에 서울과 금강산 등의 록 베리에이션 등반에 많은 업적으로 선구자였던 Group의 하나가 1938년 3월에 적설계 금강산 집선봉 S.I 초등반을 결행하게 된 것이 첫 진출이었다.
'겨우'라고 하고 있고, 서울과 금강산 등의 록베리이에션 등반에 많은 업적으로 선구자였던 Group중의 하나'는 조선산악회내 김정태, 엄흥섭 팀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는 일본인 이시이를 뜻한다. 그들이 1938년 3월에 위의 손경석의 '등반연대표'중에서 1939년이라고 적혀 있는 금강산 집선봉 S.1 초등반을 말한다. 둘 중에 1938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만약에 1935년 빙폭과 동계 설악산 한국인 초등이 만의 하나, 실제 있었다고 하자. 그 등반은 비중이 약해서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그 등반은 그에게 결코 평가절하할 등반이 아니다.
같은 글에서 김정태는 한국에서 적설기 등반의 시초는 1931년 1월 이이야마 다츠오 팀이 한 스키등산이라고 보고 있다. 당시 겨울 금강산 입산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인데,.... 세상을 놀라게 했다라고 적고 있다.
적설기 등반은 김정태가 발군의 기량을 보인 북한산과 도봉산의 '암벽'등반하고는 레벨이 다른 것이다. 그가 꿈꾸는 슈미트이즘. 알피니즘의 핵심인 거다. 흔히 말하듯, 암벽은 주형렬, 적설기 등반은 김정태라는 말이 있다. 김정태는 적설기 등반에 강했고, 그가 꿈꾸는 것은 고산 거벽의 알피니즘이었다.
그런데!
이 표는 같은 글에서 1931년부터 김정태가 정리하고 있는 적설기 등반의 기록들이다. 여기는 훨씬 자세한데도 1935년 빙폭 초등은 없다! 왜 적지 않았지?
조금 더 냉정하게 어쩌면 냉정하게 정리해 보자.
가슴은 뜨겁게 그러나 진실은 가슴에 있지 않을 것이다.
1952년 라테르네2호를 보자.
김정태는 스스로 자랑할만한 등반기록을 자선해서 올리고 있다.
로프 없이도 할 만경대 릿지와 오봉 릿지도 초등기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금강산 빙폭 초등은 그만도 못한 것인가?
더 놀라지 마시라.
김정태는 스스로 자기의 등반'기'를 1935년이 아니라 1936년부터라고 하고 있다!
1935년은 천재 클라이머 김정태가 막 클라이밍에 눈떠서 몰입한 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16년생 김정태는 1929년이 아니라,1934,5년경부터 클라이밍을 했을 거라 본다. 영화를 보고서!
그래도 스무살이 안된다.
이제부터는 더이상 1935년 금강산 빙폭초등 초등이라는 구술을 '받아쓰기'하면 안된다.
대신 이런 질문을 던저야 한다.
왜 그는 1970년대 그 어느 시점부터 1935년 금강산을 갔다고 말하고 싶어할까?
1931년 일본인의 최초 금강산 스키등반이 있었는데,
7년후 1938년 그가 집선봉 동계 등반을 한 건 일본에 비해 너무 늦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일본인 산악인들과 '가급적' 대등한 '경쟁'을 했다고 주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김정태는 내심은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방식으로 산행기를 쓰는 사람이다.
등반의 목적과 기쁨을 '친구와의 우정 속에 어려움을 극복하며 산에 오르'는데 두는 게 아니라,
등반을 '한일간의 경쟁과 승리, 승리와 열패'라고 보는,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관점을 내재화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1935년 일본인이 금강산 동계등방 러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그가 기차간에서 우연히 만난 이시이라는 일본인과 의기투합하는 건 또 무언가.
심지어 그와 동계 빙폭을 초등반했다고 '구술'하는,
백령회 가입할 때 그의 친일적 행동으로 기존 회원이 탈퇴까지 했다고도 하는,
1960년대에도 '조선산악회원'의 아이덴티티를 언뜻 보여주고 있는,
그가 그렇게 완벽하게 얼굴을 바꾸어 쓰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해방 후 그가 온 영혼을 한국산악계에 바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고개 들어 흰 설산과 거벽을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홍종인? 이은상? 이인정?
후배 중 어느 누가 그의 길을 걷고 - 또는 함께 걷고 - 있다고 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경력을 자꾸 앞당기다 보면, 과장하면 심지어 태어나기 전에 학교를 다닌 것처럼 될 수도 있다.
'한일간 축구경쟁'에 딴지 거는 건 아직도 우리에게 금기어가 아닐까.
이글을 다 읽고나서 이런 의문이 들면 좋겠다. 김정태보다 5년 정도 앞서 적설기, 스키, 동계 등반에 뛰어든 일본인 산악인들조차도 빙벽 등반을 제대로 시도조차 않고 있는 터였다. 적설기 설벽등반 스키등반조차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김정태가 과연 '빙폭'등반을 시도할 생각이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스키하고 빙벽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않는가. 슈미트 영화를 보아서?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는 대체로 1931년 마터호른 북벽을 초등한 슈미트 형제의 글(또는 영화)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고 있다.(참고로 김정태는 슈미트 형제의 나이를 자기와 비슷한 16세, 18세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한국나이로 26세, 22세의 20대였다.
내가 생각하는 김정태는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그런 후배를 원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