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10, 김정태가 엄흥섭과 이시이 상을 건너가는 방법.

카테고리 없음|2020. 12. 1. 20:06

백령회 글이 길어지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너댓꼭지를 쓰면 내가 혼자 읽고 생각했던 얼개는 거의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좀 다른 접근을 해 볼까 한다. 시간낭비가 되지 않고, 그시절을 알아가는 재미와 교양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옆에서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으나 - 인생이라는게 옆에서 본다 해도 알 수 있을까 -

김정태의 산악인생 초반부에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두명이다.


첫번째가 해방 전 둘도 없는 자일 파트너 역을 했던 엄흥섭(와타나베 엄)이 있고,

그들을 뒤에서 후견하고 산악계로 나아가도록 했던 일본인 이시이 상이 있다.


엄흥섭은 해방되기 전에 - 1943년경으로 짐작 - 애석하게 죽었고, 이시이 상은 패전하면서 쫓겨갔다.(고 보여진다)

또한 둘다 기록자가 아니라 김정태에게 어떤 '해'를 끼칠 사람들이 아니다. 


따라서 '멀리 떠나가버린' 그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는 김정태의 멘탈리티를 짐작해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


1931년 창립한 조선산악회는 연보 4권과 계간소식지(또는 월간 소식지)를 20회 못미쳐 발행했다. 

연보와 달리, 소식지에는 그때그때 회원들의 활동상이 들어 있어 해방 이후 초등 기록 작성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김정태는 그것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손경석은 없던 걸로 추정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논해보기로 하고,


"조선산악"은 총 4권 발간된다. 회보에는 광고가 너댓개씩 실려 있는데, 우리가 주목할 광고 두개를 우선 보자. "조선산악회"이 해방후 어떻게 접수되는지도 느낄 수 있다.


광고멘트는 이렇다. 

"워킹과 스포츠 시즌이 다가왔다. 스키용품과 스케이트 장비 준비는 카도야로!'

'카도야'점은 운동용품과 저울 등 도량기기 등을 팔았고 그 중에 '카도야 산악용품부'로 광고한다.


이 매장은 단층이 아니라 복층 건물로 제법 잘나가던 큰 상점으로 보인다.

맨 오른쪽에 보이듯이 조선산악회 사무소가 이 건물 위층에 있었다. 조선산악회 사무소는 창립때는 다른 곳이었는데, 2,3년 지나 해방될 때까지 이곳에 터 잡았다.


김정태와 방현 등이 해방 후 며칠 지나 조선산악회의 간사장을 만나 '인수인계'를 논한다. 여기서 인수인계는 무엇을 말할까?

김정태는 단순히 책과 장비 그리고 비품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조선산악회'의 인수인계로 짐작된다. '도장'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지막글에 논하겠다.



1943년 백령회 회원 주소록이다. 맨 위 회장역을 맡았던 엄흥섭이 있고, 그 밑에 본성경삼이라는 창씨명의 누상동 사는 주형렬이 있다. 주형렬은 저때 무직이었다. 그아래 김정태도 무직이고.


적산기업을 불하받아 성공한 게 오늘날 한국의 많은 대기업들 아닌가. 따라서 조선산악회의 '인수인계' 및 새로운 아이덴티티 창출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백령회는 조선산악회를 인수인계한 걸로 보인다. 이 부분은 백령회 마지막 챕터에서 논하겠다.


맨 밑 진한 빨강으로 칠해 놓은 이가 엄흥섭이다. 김정태와 함께 수많은 개척등반을 함께 한 이다.

보다시피 그는 조동창 이기만과 함께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파란색 펜글씨는 낙서이다.



2007년경 찍은 같은 사진에는 이렇게 깨끗하다. 그렇다고 창씨개명이 친일의 징표는 아니다. 할 필요가 없으면 안해도 되었다. 엄흥섭은 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 본다. 그는 배움이 짧았던 걸로 보인다.



역시 같은 자료, '1943년 사업계획표'이다. 백령회원들은 어디에서 배웠는지 모르겠는데, 회의 운영도 평등하게 돌아가면서 한다. 스키발표, 촬영. 스키 강습회 산악기상 등등을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금요 세미나에 엄흥섭은 여기에서 맡은 꼭지가 없다. 


"조선산악"에 실려 있는 와타나베 제화점 광고이다. 스키, 스케이트, 등산화 전문점이다.

엄흥섭이 '와타나베 엄'으로 불린 건 이 매장의 제화공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등산화를 잘 만들다보니, 일본인들 그리고 서양의 등산가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들을 통해서 '클라이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40년, 1941년 엄흥섭 회장과 김정태를 소개해 준 이가 와타나베 엄이라는 것도 이래서이다.

당시 최고 난도였던 주봉후면 크랙을 백령회팀이 초등한다. 와타나베 구두점을 찾는 클라이머돌에게도 이 빅뉴스가 퍼져나갔을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와타나베 엄은 김정태에게 '괴물 조선인 클라이머'가 있다고 전달한다. 김정태는 그래서 1941년 봄, 만장봉에서 엄흥섭 회장을 만나 곧바로 의기투합하고 백령회에 가입하고, 반대로 여름이 오기전 엄흥섭은 조선산악회에 가입을 하게 된다.


와타나베 엄은 구두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고 김정태가 회고한다. 그들이 만난 건 10대 때이다. 그때 인기가 많았다는 걸 보면,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고 사환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일은 숙련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게다가 엄흥섭에 관한 기억은 다른 백령회원들은 별로 하지 않고 있다. 다만 클라이밍 기술은 김정태보다 더 뛰어났다는 회고는 있다. 김정태가 초등기록을 작성할 때, 엄흥섭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짐작으로는 그 등반은 엄흥섭이 리딩을 해서 예우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엄흥섭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데다,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엄흥섭에 대한 기록은 김정태만 하고 있다. 어떤 기록에는 2살정도 어떤 기록에서는 3,4살 정도 많다고 적고 있다.(지금 당장 일일이 자료를 찾지 않고 써고 있다. 나중에 교정하겠다.)

나이 조차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는 건 아쉽지만, 김정태는 그를 '세컨드'라고 부른다.


김정태는 평생동안 그처럼 구두를 잘만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있다. 이 외에 그에 대한 회고는 거의 없다. 왜 그랬을까? 아쉬운 대목이다.



김정태의 "등산 50년"에는 개척루트가 많은 만큼, 의외로 등반루트 소개는 단촐하다.

마찬가지로 엄흥섭에 대해서도 최소한으로 말을 아낀다.





2) 이시이에 대하여.


이시이는 김정태에 의하면 역시 4,5살 많고 일본대 산악부출신이다.


조선산악회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한다.

일제시대 조선산악회는 단위산악회가 아니라'한국산악회나 한국산서회처럼 상급단체 성격이다.

평소 등산활동은 자기 취향대로 자기 '팀'끼리 하고, 월례회에서 서로 교감한다.

조선산악회 회장은 경성제대 교수를 비롯하야 일군의 학자가 있고, 산관련 업무를 가진 사람들도 있을것이고 그리고 클라이밍 '팀플레이'를 하는 팀이 있다.

김정태는 이시이 그리고 엄흥섭과 주로 활동한다. 이즈미는 이즈미대로, 이이야마는 이이야마로, 금강산협회의 오쿠노는 오쿠노팀으로 활동한다.


김정태가 '한일경쟁'의 코드로 분식하는 건데 실제로는 팀경쟁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본다.

김정태는 1936년 인수B 코스를 초등하면서 일본인 산악인들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그 결과 이시이의 소개-추천-으로 조선산악회에 가입한다. 조선산악회에 가입하려면 두명의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또 한명은 아무래도 학자가 아니라 클라이머, 아무래도 정통 클라이머인 이이야마일 가능성이 높다.


김정태는 이이야마를 경쟁자로 그리는데, 사실은 그렇지 많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이이야마가 귀국했을 때 최선웅과 함께 세명이서 만나는데 그때 어떤 분위기였을지 궁금하다.

김정태와 이이야마의 관계를 짐작할, 이이야마가 형노릇(!)을 했을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백두산 마천령산맥 대종주를 끝내고, 1943년 리더 엄흥섭은 '스키'에 부족함을 느꼈나 보다.

'자비로' 김정태와 박순만 등 4명을 일본에 스키유학을 보낸다.

그때 간곳이 초진인가 하는 온천장인데, 그곳을 김정태 등은 어떻게 알고 가게 되었을까?

손경석은 패전후 그곳의 별장에서 기거하는 이이야마를  그곳에서 만난다. 음. 그렇군,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나름 '추리'와 글이 잘나가는데, 여기서 그만해야 해서. 혹시라도 들어오는 분들께 불편을 끼쳤네요. 숫자나 팩트는 일일이 찾지 않고, 기억으로만 했기에, 약간의 오류는 있을 듯 합니다. 찾아서 소문없이^^ 교정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글은 내일 완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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