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11, 김정태는 1935년 인수B길을 개척했을까?
김정태가 스스로 뽑는 대표작 중 대표작으로 1935년 인수봉의 인수B길 개척이 있다.
착실하게 등반을 한 일본인의 1936년 인수A길 개척보다 1년 앞선 조선승리라는 쾌거가 되버린다.
이런거 곧바로 '달달' 외우면, 우물안 개구리 신세밖에 안된다. 오늘 치른 수능 고득점 못받는다.
뭔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는가?
인수B길 등반은 지금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산악계는 그의 말을 '받아쓰기'만 해왔거나,
또는 같은 계(界)의 일이라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 긁어 부스럼, 좋은게 좋은거라면서 - 해왔다.
참고로 그놈의 산악계 '의리 으으리'하는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선구자적인 선배들을 1980년대 어떻게 예우했는지 한 단편을 다음 글로 보여주겠다.
이제 이 위대한 - 꼭 1935년이 아니라도! - 등반이 언제 초등되었을까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가 왜정시대때 한 초등기록 전체를 다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날아가는 새도 흔적을 남긴다.
그가 '스스로' 남긴 증거를 수습(收拾)여 진실에 눈을 뜨자.
이번에는 짧고 굵게 끝을 맺겠다.
옛날 자료 읽는 자미(滋味)의 늪에 빠져, 글을 쓸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해서이다.
아니, 그렇게 어렵지 않은 증명이기 때문이다.
한국산악계에서는 인수B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1928년생 손경석은 처음에는 감히 함께 할 수도 없는 대선배로 예우하다 언제부터인가, '갈등과 협력'을 반복한다. 그런 손경석조차 "한국등산사"에서 1935년 5월 인수B길 초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차 이런 판에 한국산악회나 다른 사람들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그들은 이왕이면 일본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여겼을 거라 본다. 그러나 무턱대고 시절을 앞당기다보면, 김정태가 태어나기도 전에 초등학교 입학하는 꼴이 된다.
김정태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기록에 관해서는 엄청났고, 자료에 대한 (배타적) 소유욕도 대단했다.
국토규명사업때, 손경석이 엄익환(엄흥섭회장의 장남)과 김정태의 텐트를 함께 쓴 적이 있다.
둘은 피곤해 죽겠는데, 김정태가 랜턴아래 잠도 자지 않고 오래도록 일기를 썼다고 기억을 한다.
1996년 한국산악회의 강성우는 10일에 걸쳐 자원봉사해서 그의 일기 전체를 복사한다.
1988년 김정태의 사후 유족이 한국산악회에 기증한 것으로 보다시피 엄청나다.
한국산악회는 그동안 이 1차자료를 어떻게 했을까?
인수B길 초등은 이렇게 1935년 1월부터 12월까지 일기만 보면 증명될 것이다.
허나, 그 자료는 나에게 없고, 없다고 해도 대세에 영향은 없다.
진실은 스스로 자명(自明)한 법이니까.
사실, 김정태는 해방전후부터 내내 한해도 빠지지 않고 한국산악회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여느 백령회원의 얼풋한 기억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의 등반기록을 '말로' 재현해 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김정태가 이런 기록 정신의 보유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정태는 언젠가(!) "초등반 초록(抄錄)"을 작성했다.
이 언젠가만 규명이 되고, 그 진실성만 확보가 되면 그 이후의 기록들은 거짓이라고 보아야겠다.
김정태는 그 초록에 대해 위와 같이 회고한다.
"따라서 나의 등반 이외의 것은 코스에 따라 년대 또는 인명에 대해 미확실한 것,
착오된 것도 있어...."라고 하고 있다. 자기의 등반기 만큼은 진실에 가깝다는 선언이다.
이제 우리는 두가지를 확인해보자. 이 글은 언제 썼고, '초등반 초록'은 언제 발표를 했을까?
김정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은 1969년 월간 등산 10월호(통권 5호)의 일이다.
이 귀한 자료는 와운루계회의 홍하일 선배가 제공한 것인데,
'연재, 자서전적 산악사화 3 - 한국의 산과 등산' 그 이전과 이후의 글은 어떨지 사실 궁금하다.
그렇다면 "초등반 초록"은 언제 작성한 것일지 이 기사에 들어 있다.
초등반 기록담이라는 제목하에 1955년의 일이라고 정확히 하고 있다.
이렇게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건 일기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해 이 초등초록이 이화여대 산악부에 의해 150부 프린트가 되었고, 김정태도 아마 그 중 한부를 소장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자료는 손경석의 "등산백과"1962)에 실리게 된다.
초고라고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자기의 기록은 정확하다고 하고 있다.
정확하다는 정황은 또 있다.
'등산백과'는 인기 절찬리에 1970년까지 한 10쇄를 발행한다. 한국산악회는 1959년부터 위원회 제도를 운영하는데, 등반위원회는 그때부터 1970년정도까지 김정태가 위원장직을 맡는다. 그런데도 1970년 등산백과 란에도 바꾸지 않고 있다. 대세는 영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 김정태는 '초등반 초록'에서 자기의 인수B길 초등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김정태는 등산백과 1962년판에서도, 1970년판에서도 일본인들의 인수A길은 1935년으로,
일본인 이시이 상과 엄흥섭 그리고 당신의 인수B길은 1937년 2월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정태는 조선산악회에 1937년 가입한 걸로 보인다. 학자가 아닌 클라이머 김정태가 가입하는데는 인수B길 초등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산악회는 그리 호락한 곳이 아니다.
아참. 인수B길은 해방되서도 일본이름으로 불린다. 쿠사쯔끼. (풀이 많은 곳이라는 뜻)
김정태가 백령회가 아니라 조선산악회원으로 활동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김정태의 인수B길 초등은 조선산악회의 "계간지"와 "월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료는 오직 김정태밖에 가지지 않았고, 손경석도 없었다. 일본과는 교류가 없고.
그래서일까. 1970년 이후 김정태는 슬금슬금 1935년으로 앞당긴다.
나는 이 시리즈의 처음에 말했다시피, 기승전'라테르네'이다.
1953년 라테르네에서 김정태는 1938-1940년 처음에 '인수봉 정면벽 = 인수B길'을 내세우고 있다.
인수B길 초등을 나는 1937년으로 보고 싶은데, 1938년일 수도 있겠다ㅜㅜ
결론은 이렇다. 김정태는 1970년 이후 별다른 근거없이 1935년 인수B길을 초등했다고 한다.
나는 김정태의 여러 증언을 토대로 김정태는 1970년까지만해도 1937년 초등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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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아웃싸 김진덕씨가 보기에 김정태는 그 전에도 없고, 그 이후에도 없다고 본다.
그만큼 한국 산악계에 청춘과 영혼과 인생을 바친 이는 말이다.
그는 다시 없는 큰인물이다.
그라고 어찌 가족이 눈에 걸리지 않고, 세속의 삶이 문밖과 문고리 안에 있지 않겠는가.
아침에 일어날 때, 아침과 밤에 대문을 드나들 때 어찌 고통과 슬픔과 분노가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타협하지 않고 오롯한' 정신하고 나의 이 자세하고 분명 이어지는 게 있지 않겠는가!
"사랑은 그 사람의 슬픈 영혼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라고 어느 글에서 읽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죽은' 김정태를 호명했는지,
아니면 김정태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했는지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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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리즈의 마지막은 백령회 창립은 1937,8년이 될 수가 없다
이시이상과 엄흥섭에 대한 김정태의 추억 추가
김정태와 조선산악회 관계
해방과 조선산악회 인수인계의 문제.- 이부분이 제일 논란이 될 것이다. 로 이어지겠다.
백페이지 정도 팜플렛으로 끝내겠다.
내가 어찌 '전지적 관점'을 갖출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선산악계에서 처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마당이고, 아니면 말고^^,
다른 뛰어난 분들의 관련 글을 기대하는 마중물로서도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