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12-1) 백운산장 이남수 옹을 찾아서
예전에 쓰다가 시간관계상 그만 두었는데요.
'백운산장, 산장지기를 찾아서'시리즈2를 계속합니다. 3으로 마감될 듯 합니다.
오늘은 이해문 선생님의 아들로 2대째 백운산장을 운영한 이남수 옹(이하 존칭생략)를 발견한 이야기입니다.
김정태 선생님의 사후 그 분이 쓴 장비나 책 기타 자료들이 거의 유실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유족이 스키박물관에 일기(유고"를 기증했나 봅니다.
대한스키협회 스키50년사를 제작하기 위해 엄익환(백령회 엄흥섭 회장의 장남, 스키50년사 편집위원장) 자문이 반출한 '자그마치' 66권의 메모 형태의 일지를 백남홍 고문 협조로 전량 복사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복사 실무는 당시 강성우 산악기술위원이 10일간의 자원봉사라 하니, 이 또한 기억해 둘만한 일인 듯 합니다.
백남홍은 1942년 조선체육진흥회국방훈련부에서 주최한 "백두산등행단"의 일원으로 함께 합니다.해방전에 서울을 오가다가 김정태 등을 만났다고 하는데, 김정태가 이 백두산 등행을 주관하면서 만났거나 깊어졌다고 보여집니다. 창씨명이 백산(白山 남홍)으로 할 정도로 산을 좋아한 듯 합니다.
해방 전에도 해마다 일기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료는 그동안 한국산악회 도서관에 열람가능한 상태로 있다가, 현재는 속초의 국립산악박물관에 "열람불가능"한 상태로 수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열람가능할 때 진작에 한국산악회를 찾지 못했던게 참 안타깝습니다.
무엇이든 '육안'으로 보면 영감이 더 떠오르는 법인데 말이에요.
"등산 50년"에 적혀 있는 초기 등반 또는 백령회 관련해서 주목할 부분은 1934~1942년이 될텐데요. 현재로서는 와운루계회의 홍하일 선배의 자료공유로 한 1940년 전후 한 20여장의 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일기는 이렇게 깨끗하게(^^) 필기하여 많이 읽을 수 있는 곳도 있고, 더 흘려써서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전에 제가 읽어낸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한자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연 또는 인연이라 해야겠죠. 유치원에서 몇십명 유아들이 빽빽 울어도 엄마는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찾아 낸다죠.
지금 이 일기는 1941년 1~10일 정도에 씌여진 것입니다.
일기는 오래되다보니 뒷면의 글자가 배어나오고 앞쪽의 글자와 겹쳐서 읽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찾으려 들면 어렵지만, 어떻게 곧바로 알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숨은그림찾기같겠지만 여기에 "우이동, 연초점, 백운대 이남수'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보이는지요?
저로서야 글읽는 즐거움이지만,
낯선 곳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다는 것,
후손들에겐 묘한 반가움과 새삼 애틋함이 샘솟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 백운산장 산장지기를 찾아서 2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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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정태의 일기 중에서 주목할 또는 재미있는 부분들을 모셔옵니다.
당시 등산하면서 준비한 부식입니다. 당시 무엇을 즐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외래어를 카타카나로 써서 알기 어려운데요. 카라멜, 사탕 홍차 담배는 알겠습니다.
1942년 김정태는 메이지신궁 국민연성대회에 참가합니다.
그때 여비로 70엔(?)을 수취했는데요. 왕복티켓이 28엔(실제로는 44엔?)입니다.
24일 암월(岩越,바위를 넘는다라는 뜻의 창씨개명)은 백령회 회장입니다. 역시 읽은대로 통크고 마음이 따뜻한 남자입니다. 40엔을 거마비로 주고, 이시이 상이 10엔을 줍니다.
이시이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엿보게 합니다. 물론 이때 김정태는 '이시이'라는 성을 가진 이의 집일본집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김정태는 이시이를 어떻게 보는지 글을 써다가 말았는데요. 나중에 이어가겠습니다.
자료가 많으면 휘휘 넘어갈텐데, 몇장이 안되니 이리보고 저리보고 자꾸보다보면 뭔가 알게 되는게 있습니다. 이 일기는 1943년 3월 14일 일기입니다. 오른쪽 상단을 보면 월요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3월 15일은 일요일이 되겠죠. 우측상단을 보면 그런데 일(日)이 아니라 특이한 글자입니다. 뭘까요?
무심코 이런 문자유희를 하는 젊은이의 멘탈리티가 특별한 사상의 소유자이기 쉬울까요? 아니면 90퍼센트에 달하는 식민지 교육을 받은 '평범한'식민지 청년이기 쉬울까요? 평범하다는 뜻은 무언지 짐작하실 겁니다.
아무래도 일본(日本)을 한 글자로 만든 느낌이 강합니다.
나는 백령회와 김정태가 '평범한' 조선 소년과 청년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10년대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중 그래도 좀 살만했던 2,30년대 학교를 나온 이들의 전형 말이죠.
그들이 '특별한' 의식이 있으려면, 불구지대천이라는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특별한 사람과의 만남 또는 특별한 교육 또는 특별한 책과의 결정적인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김정태나 양두철 이재수 등등 백령회의 회고록을 보면 그들은 특별한 사람과 만난 적도 없고, 특별한 민족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특별한 이데올러기 책에 경도된 적이 없습니다.
홍하일에 의하면, 회장 엄흥섭은 선린상고(당시 국립고보)를 나온 엘리터였습니다. 그러나 엄흥섭 역시 특별한 사상을 가진 인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서 산과 바위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고 인자하여 모임과 후원을 통해 후배들을 키워주길 좋아하는 선배 같습니다.
백령회는 그냥 평범한 우리들처럼, 산에 관한 책을 좋아하고 산에 관한 친구들과 사귄 것에 불과합니다. 일제때는 그때에 맞게. 지금은 또 지금에 맞게....
다른 계(界)에서 한국산악회 - 백령회 - 독립의식 - 로의 연결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싶습니다. 동교동계의 한화갑이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맹목적인 충성이 지도자를 망친다고. 지금이라도 우리는 차분히 역사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민족해방운동 하지 않고, 빈부차별철폐운동, 페미니즘., 소수자 권익보호운동, 반일운동을 하지 않아도 산악인들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름다운 산악운동이고 벗이고, 즐거움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때도 독립운동 하지 않아도 그들의 산악운동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때 그시절 북한산을 오른 그들이 부럽지 않은지요?
산악운동은 그런 운동과 산을 연계시키지 않아야 더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원치 않았는데, 어어하다 지게 된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건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일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