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평전, 저자 김응교의 일제시대의 기술 중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들
"좋은 언어로"는 평전으로서는 드물게 신동엽이 남긴 유물을 통해 그의 일생을 내밀하게 복원하려 한 수작이다. 저자 김응교가 2005년 쓰고, 2019년 소명출판사에서 다시 출간했다. 1962년생인 저자는 학자로서 완숙기라고 하겠다. 백석과 윤동주 등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고, 일본에서 10여년 교수로 활동하기도 한걸 보면 분명 일제시대에 대해 깊이 천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중 일제 시대를 기술한 부분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몇부분 있다.
'신동엽은 1930년생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와중에,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수재로, 일본관광학생단에 뽑혀 일본을 다녀왔다'라는 대강의 줄거리에 김응교는 아래와 같이 해석을 하고 있다. 페이지로는 12페이지 정도의 부분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 더욱이 동엽이 태어난 1930년은 일본이 중국에 싸움을 건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1년 전으로 일제는 바야흐로 조선에 있는 모든 것을 긁어가 무기를 만들던 시절이다.
숟가락, 젓가락마저 빠앗겨야 하는 식민지의 기막힌 현실은 동남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
수확물은 일본에 다 빼앗겨 쌀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은 대부분 콩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지금 이구절은 신동엽이 막 태어난 시절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숟가락 젓가락마저 빼앗겨야"는 이른바 '공출'은 1940년 너머 태평양 전쟁 시절 전시 총동원체제 때 일 아니던가. 그리고 쌀 뿐만 아니라 '콩'도 공출의 대상이었으니, "사람들은 대부분 콩죽으로 끼니를 때웠다"라는 구절 역시 쉽게 쓴 글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콩깻묵을 콩죽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
참 똘망똘망하게 잘 생겼다. 허나 여느 초등학생 사진에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히라야먀 야키치'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신동엽'이라는 식의 해석을 붙여야 할까? 신동엽에다 '민족'의 이미지를 더하려 하는 의도일까?
1938년 동엽은 여덟 살에 '부여 공립 진죠(尋常) 소학교'에 입학한다.
'진죠 소학교'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일본의 학제로 1942년 폐지되고 '국민학교'로 불리기 시작한다.
부여소학교에 입학하는데, 부여소학교 동문선배로 그 유명한 JP 김종필이 있다는 것은 왠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런데 그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왜일까? 4월의 시인, 혁명의 시인이 나고 배운 똑같은 장소에 민주와 혁명의 파괴자인 김종필도 함께 했다는 것이 불만족스러워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1942년은 오기이다.
심상소학교의 심상(尋常)을 일본어로 '진죠(じんじょう)'라고 읽는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럴거라면 진죠소학교가 아니라 '진죠 쇼갓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심상소학교는 이미 우리에게 이 용어로 고착화되어 있는 판에 굳이 그렇게 표현할 일은 무엇일까. 왜 책을 재출간할 때 그대로 둔걸까? 참고로 심상은 평범함과 보통을 구한다라는 뜻이겠다.
놀랍게도 이 시기의 신동엽을 연구할 수 잇는 사진과 자료가 풍성하다.
특히 지금까지 신동엽의 소학교 성적표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복잡다단하고, 1차자료를 '무시'해온 한국의 근현대사를 비추어 보면, 초등학교 시절 성적표가 모두 보관되어 왔다는 것은 말그대로 흥미롭다.
그런데 우리가 더 흥미로워 해야 할 것은 학교 철문도 떼어가던 총력전하에서도 시골 조선인 초등학교 통신부를 '평상시'처럼 작성했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닌가. 태평양 전쟁때 물자부족에 심각히 시달리면서도 일제의 말단 조직이 이렇게까지 자기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니... 이 책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인 법이라 나는 궁금하다.
당연하게도(^^), 아니 우리의 기대 그대로, 1945년 신동엽이 입학한 전주사범학교부터 1950년 전쟁 전후 그가 입학한 전시대학시절 성적표는 책에 없다. 아니 1970년대 초등학교를 나온 나의 성적표나 사진은 어디에 남아 있기는 할까?
일제 검도교육을 받았던 신동엽 사진이다. 이 사진을 두고서 저자는 이렇게 예단(!)한다.
오늘날 민족 시인으로 불리는 신동엽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사진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리 놀라운 풍경이 아니었다. 이 사진을 보고 신동엽이 친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몰역사적이고 무분별한 태도다. 오히려 우리는 이 사진에서 군국주의가 한 아이에게 강요한 '국가의 폭력'을 볼 수 있다.
사진 한장을 놓고서 '국가의 폭력'으로 나아가는 해석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소년이 검도를 하는 사진을 보고 그 누가 '친일을 했다'고 하겠는가. 저자의 신동엽에 대한 과잉보호의식이 이해되지 않는다.
검도 자세를 취한 이 사진 한 장에서, 어린 동엽의 긴장된 표정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상흔을 엿본다. 어쩌면 신동엽이 민족적 주체성을 탐구하고 나아가 동학을 연구하며 민족서사시 '금강'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 사진에서 '제국주의의 상흔'을 엿보고, 민족적 주체성, 동학, 민족서사시. 상처를 운운하기까지 한다. 그럴까? 과잉의 해석은 아닐까?
나는 1970년대 유신시대 피곤한 초등학교 학생생활을 해야 했다. 억지로 해야 했던 게 너무 많다. 줄지어 학교에 등교하기. 잘 놀다가 태극기 하강식 하기. 국민교육헌장 억지로 외우기. 강제로 토요일 동네 청소하기. 강제로 반공 표어와 포스터 작성하기. 컨닝하지 못하게 뙤약볕에서 시험보기. 아침 조례후 소총은 들지 않았지만, 군대식 분열로 학급으로 이동하기.
다음에 다른 자리에서 언급하겠지만, 나는 그 시절 지금같아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고문'까지 받았다.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부터 말이다. 고문피해자로서는 아마 전국 최연소, 역대 최연소일 것이다. 지금도 어쩌다 그때 일이 생각난다. 그런 나에게 독재의 상흔이 어딘가 분명히 남아 있을까?
신동엽은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이라서일까? 아니다. 그는 수재라는 것 말고 문학적 재능과 관련하여 그 어떤 자료나 증거가 없다.
근대일본의 교육은 군국주의 국가답게 '문무겸비'를 중요시한 걸로 알고 있다. 1925년생으로 자위대 부활을 부르짖으며 할복을 한 미시마 유키오는 보시다시피 몸짱이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달랐다. 그는 허약한 문학소년이었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강요'하는 검도와 서양 스포츠로 인해 엄청나게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일본은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면서 초등학생들에게도 실전(^^)에서 곧바로 써먹을 검도와 유도교육 등을 강요했다고 본다. 태평양 전쟁때는 적성국가, 미영귀축(米英鬼畜)의 영어도 없애버리고, 국민 스포츠 야구도 미국이 만들었다 해서 불허했다. 신동엽은 이런 상황에서 검도를 한 것 뿐이다. 아니 초딩이 검도했다고 친일을 운운하는 이는 한국에서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법륭사 5층탑에서 찍은 단체사진(*여기서 그는 호류사라고 하지 않고 법륭사라 한다)
1942년 4월 1일 동엽이 5학년 때 일본인 교장은 '특별한 얘'라고 칭찬하면서 조선 아이로서는 유일하게 신동엽을 뽑아 일본 여행의 기회를 준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신동엽은 여행을 떠나기 어려웠으나......
일본인 교장(-대부분의 조선인 학교 교장은 일본인이었을 것이다)은 '조선 아이로서는 유일하게 신동엽을 뽑아'라고 하고 있다.
부여국민학교는 아마 조선인 학교일텐데 '조선 아이로서는 유일하게 신동엽을 뽑아'....라니.
고개가 갸웃거려 검색을 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월간 조선의 JP김종필 관련 글에,
金 총리는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일본인들만 다니던 扶餘錦城公立尋常小學校(부여금성공립심상소학교)를 2년 더 다녔다. 이 심상학교 경력은 지금까지 발표된 金 총리의 공식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경향각지에 널리 퍼져 생활을 했다. 왠만한 시골이 아닌 다음에야 일본인 자식들을 위한 그들만의 초등학교가 따로 있었다. 부여는 작은 동네가 아니다. 따라서 부여에는 일본인들'만'-과 조선인 유지의 자식들 - 다니는 부여금성공립심상소학교가 따로 있고, 부여공립소학교는 조선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맥락을 잘못 잡았고, 의도적이라고 한다면 그리 좋지는 않다.
*졸업때 받은 표창장인 선장장. 시상자는 충청남도 도지사였다.
졸업할 때 수석이었다는 걸 보면 신동엽은 그 시절 제일 뛰어난 5학년 학생이었을 것이다. 전시 체제 때 여행을 통제했던 일제는 조선의 '뛰어난' 학생들을 모아 일본 여행을 시켜주었다. 장차 조선을 '이끌' 똑똑한 식민지소년에게 주는 특혜이자,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더욱더 황국소년이 되라는 '격려'차원에서이다. 신동엽은 그런 공짜 티켓이라는 '자랑스러운' 자리에 뽑힌 것이다. 일본 현지의 동선이 딱 그 목적을 위해 배치되었다.
지금도 각종 학교에서 일등하면 미국 등지에 공짜 여행시켜 주는 걸 염두에 두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신동엽은 여행을 떠나기 어려웠으나......'라고 하는 이하 부분도 좀 그렇다. 황국신민들이 될 가능성이 높은 소년들을 위한 여행비용도 문교부에서 상당히 지원을 했을 거라 본다. 무엇보다도 억지로 간 게 아니라 신동엽이 똑똑해서 특혜로 간 것이다. 여기에 뽑힌 학생은 기뻐했고, 가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신동엽의 아버지는 일제하 군청 앞에서 대서소를 한 걸로 보인다. 권력과 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 부친은 나중에 그가 '고작'(이건 인용자의 표현이다) 고등학교 선생이 되자 무척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