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14) 현동완 YMCA 총무는 어떻게 해서 엄흥섭의 스승일까
백령회 리더 엄흥섭과 현동완 YMCA 총무 사이에는 나이가 불과 5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1949년 백령회는 '엄흥섭의 스승되시는 현동완 선생'이라고 호칭을 할까?
결국 추정에 그치겠지만, 그들의 의도는 간파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해방되던 해 9월 15일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는 창립을 했는데, 총회 장소가 바로 YMCA 대강당이었다. 이를 통해서도 당시 YMCA를 이끌던 총무 현동완과 조선산악회 창립을 주도한 백령회와 관계를 얼핏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래에 적겠지만, 백령회 특히 백령회 리더인 엄흥섭과 현동완의 관계는 가볍지 않다.
그런데 1899년 생인 현동완은 조선산악회 창립당시 단순히 이사직을 맡았다. 백령회 측의 입장을 보면, 애초 현동완을 창립회장으로 점찍고 있었는데, 현동완이 이승만의 귀국과 함께 그의 정치행보를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1942년 조선 총독부가 주최한 백두산탐험'연성'회에 참가할 때 연성회 스탭이었던 김정태 등 조선산악회내 조선인 등산가들과 인연을 맺은 민속학자 송석하(1904년생)가 회장으로 영입된다. 그런데 그의 창씨명을 몰라 팩트 확인을 하진 못했다. 아무래도 백령회 이기만 회원의 추천에 의해 송석하가 영입되었다는 설이 맞을 것 같다. 아무튼 창립회장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방후 백령회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다.
현동완은 송석하가 1948년 고혈압으로 사망하면서 제 2대 회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 같지는 않다. 당시 부회장이었던 홍종인이 회를 주도한 걸로 여겨지고, 곧 홍종인이 회장직을 물려받으며 홍종인 체제를 장기간 구축하게 된다.
백령회 리더였던 엄흥섭은 1945년 6월 과로와 식중독으로 사망을 한다. 이후 조선산악회 창립에는 백령회가 주도하지만, 엄흥섭이 호명되지는 않다가 1949년 4주기 행사가 열린다. 현동완이 조선산악회 2대 회장이 되는 해이다.
한국산악회가 70주년 기념으로 낸 화보집 "한국산악회 70년"을 보면서 갸웃거리게 된다. 1949년 현동완이 2대 한국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던 시절 고 엄흥섭 4주기 추도회를 알리는 편지가 있다. 이 글은 해방 후 행보를 볼진대 김정태가 썼을 가능성이 높다. 모시는 이는 조선산악회내 김정태, 주형렬 그리고 채숙 외로 되어 있다. 김정태, 주형렬과 함께 백령회 3인방 중 한명이었던 양두철은 조선산악회에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여기에도 없다.
우리가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 왜 3주기도 아니고 5주기도 아니고 4주기 추도회를 할까? 글의 맥락상 3주기는 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아무래도 현동완이 회장이 되자, 백령회 출신들이 기획한 게 틀림이 없다. 회비를 가지고
두번째로 백령회 리더 엄흥섭(1904년생으로 추정)과 현동완 YMCA 총무사이에는 불과 5살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추모회 편지에서 현동완을 두고서 '엄흥섭의 스승되시는 현동완 선생의 발의로'라고 할까? 이 부분이 항상 머리에 잔상이 남아 있다.
현동완과 엄흥섭 사이에는 과연 어떤 인연이 있길래 그런 호칭이 가능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엄흥섭의 세 아들은 모두 산악계와 스키계에서 활동했다. 특히 1926년생 엄익환은 손경석과 동년배로 둘은 함께 50년대 학생산악계를 이끌었다. 그들은 국토구명운동 중 김정태, 손경석과 같은 텐트를 쓰기도 했다.
엄익환은 부친 엄흥섭에 관한 공식적인 글을 남기지 않은 걸로 보인다. 왜일까? 손경석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어느 글에서 엄익환에게서 그의 부친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더욱더 엄흥섭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손경석은 그 내밀한 이야기를 적지 않고 있다. 김정태도 마찬가지이다. 1975년 '등산 50년'에 '지금도 그를 아는 이들은 그가 생존해있었더라면 산악계 양상도 좀 달라졌을 거라고 아쉽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엄흥섭에 대해 극히 제한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의아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행보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엄흥섭을 '전설' 또는 '은막'에서 햇볕에 드러낼 경우, 그 자신과 백령회의 위상과 아이덴티티에 관해 더 좋을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짐작에 그치는 데 후자일 가능성도 없지 않아서는 아닐까, 자료가 없으니 이런 상상까지 하게 된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예전에 고희성을 백령회의 마지막 회원이라고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국립산악박물관의 "산악인 구술조사 보고서2, 고희성편"에는 '백령회의 마지막 목격자라고 하고 있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느껴진다.
고희성은 이 글에서 엄흥섭과 현동완에 관해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힌다. 첫째 엄흥섭(1905~1945)가 선린상고 재학시절 현동완에게 지도를 받으며 농구선수로 활약을 했다고 적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현동완과 농구 이야기가 있어 여기에는 생략한다.
그리고 해주에서 복막염으로 엄흥섭이 급서하고 소식을 들은 백령회원들은 그의 임종을 지키려 해주에서 모였는데, 고희성은 도립병원에 모인 그날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책에는 적고 있다. 특히 현동완에 대해서는, "병원에는 현동완씨가 왔더라고요. 해주까지. 현동완씨가 엄흥섭씨의 매장을 위해서 해주공동묘지에 답사를 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백령회 회원 말고는 해주까지 달려온 이는 고희성의 기억에 의하면 현동완과 박순만(엄흥섭의 지원으로 김정태 등과 함꼐 1943년경 일본에 스키 유학을 다녀 온 이)밖에 없었다. 그정도로 현동완과 엄흥섭의 관계는 각별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묘지 답사를 하는 건 '스승'된 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1916년인 김정태 등이 할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런 일에 경험이 없어서 현동완이 대신 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게 또 아닌게, 참고로 손경석과 김정태는 어려서 한동네에 산 적이 있다. 김정태가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하고도 의연하게 상을 치러냈다고 손경석의 어머니가 김정태를 칭찬한 일화도 있다.
사실 내 의문은 엄흥섭이 상당한 재력가인데도 왜 선산에 묻지 않고, 선 해주 공동묘지에 매장을 했을까이다. 일제하 매장문화에 더 공부해야겠지만 모를 일이다. 고희성은 일본사람들이 병원에서 받아주지를 않았는데, 그 이유를 잘나가는 조선인이 기분 나빠서일거라고 그는 추측하고 있다. 결국 해주시장이 부탁을 해서 엄흥섭은 입원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나 역시 그냥 추측을 해본다면, 그가 해주시장 - 아무래도 해주시의 위상을 보면 해주시장은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다 - 에게 청탁을 하고 그게 통할 정도로 해주의 재계에서 그의 위상이 없지 않았다. 문상객으로 재계 관계의 일본인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 악독한 일제 시기 군수산업을 운영하는 그로서는 사업을 위해 원컨 원치않건 그곳에서 일본식 장례를 치룰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아마 엄흥섭은 화장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깊은 관련을 맺었던 일본인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인들과 관계있는 공동묘지에 묻혔을 것이다. 서울에서 화장의 처음은 일본인에 의해, 벽제 화장터에서였다. 재조선 일본인들의 장례문화는 화장을 하고 공동묘지에 묻었던 걸로 알고 있다. 해방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는 한국인들에 의해 공공연히 훼손된 기록을 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일본인 공동묘지를 보기 어려운 까닭은 여기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1944년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모두 71만명에 달한다. 해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나고 죽었는데, 그들의 묘지는 다 어디에 갔을까 궁금해본 이들 있을 것이다.
김정태는 '등산50년'에 '해주 객토에 그를 묻고 서울 도봉산 보문사에 그의 영혼을 모셔 추도식을 지냈다'고 적고 있다.
김정태는 산 바깥에 대해서는 고유명사를 극히 삼가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문사라고 한 걸 보면 맞을 거라 본다. 적지만 의미가 없지 않을 의문이 든다. 도봉산이라면 왜 만장봉과 선인봉 등반의 기지였던 천축사나 망월사가 아니라 우이암 아래 보문사에 영혼을 모셨을까?
각설하고 미루어 짐작하건대, 엄흥섭과 현동완의 인연은 종교(기독교)가 아니라 선린상고에서의 농구부 활동이라고 보아야겠다. 선린상고, 농구를 두고서 '스승'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도 그러하지만 1940년대 환경에서도 말이다.
일제하 YMCA를 이끈 현동완은 ymCA가 세운 영창학교(英彰․Y학관) 교장이기도 했다. 이 학교에 엄흥섭의 장남 엄익환과 이희성, 안종남 등이 다녔다. - 이들은 모두 해방후 특히 50년대 산악계를 이끈 인물들이기도 하다. - 엄흥섭은 선린상고에 다녔을 정도로 지력도 있고, 재력이 있으면서도 그리고 종교가 기독교가 아닌 듯 하면서도 장남 엄익환을 영창학교라는 b급(?)학교에 보냈을까? 경성고보도 있고, 양정고 배재고 등 사립 명문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분명히 현동완과 엄흥섭 사이에는 우리가 알지못할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김정태는 책에서 엄흥섭을 백령회의 정신적 지주로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과장이고 백령회의 결사체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김정태는 '등산 50년'에서 '1937년 한인들의 몇몇 산동지가 일경의 눈을 피해 백령회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중략)그리고 YMCA의 현동완씨가 막후의 인물로서 많은 지도와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현동완에 관한 아주경제 신문 기사 '35년 '영성의 스승' 류영모와, 그를 모신 현동완'를 보면 '1937,8년경 경제적 침체와 일제가 YMCA를 탄압하자 1937년 그는 YMCA를 떠나 함북지방에 은둔한다'라고 하고 있다.
1938년 일제는 본격적인 내선일체를 추진하면서 YMCA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친일파인 윤치호가 회장을 맡고 이윽고,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라는 친일단체로 개편된다.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1937년 이후 현동완의 행보는 더 찾아보아야겠지만, 백령회가 열정적으로 활동할 시기 현동완이 서울에 있었는지는 더 찾아보아야 할 일이다.
지금 당장은 양두철의 회고가 더 맞을 것 같다. 그는 '염흥섭의 정신적인 스폰서는 현동완 총무였습니다.' 엄흥섭의 '정신적인 스폰서'라는 말 말이다. 양두철도 평소에 현동완을 그리 만나 본 것 같지는 않다. 현동완은 백령회가 아니라 엄흥섭과의 인연에 그칠 거라 본다.
이제 왜 김정태는 현동완을 '엄흥섭의 스승되시는'이라고 표현했을까에 대한 나의 추정을 밝혀본다.
김정태가 현동완을 엄흥섭의 스승이라 표현하는 건, 현동완의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적 색체에 백령회를 의탁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백령회를 민족운동의 결사체로, 해방후 조선산악회의 주도권을 지려고 하는 김정태의 입장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현동완과 엄흥섭에 관한 자료가 극히 빈약하여 추정에 그치긴 하지만, 사실에서 그리 멀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 논지 역시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입수하거나 또 나의 생각이 바뀌는 데에 따라 '예고없이' 바뀌고 정제되어 단행본에 실을 예정이다.
산악계가 현동완에 갖는 오해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 서두에 '현동완이 이승만의 귀국과 함께 그의 정치행보를 도우느라 너무 바빠서 현동완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지 못했다고 당시 백령회원 중 한명 - 지금 당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인 것 같다. 지금 이 표는 '한국산악회 70년'에 실려 있는 한국산악회 1945 11월 회무부서 분장표이다.
보시다시피 현동완은 평이사가 아니다. 그것도 총무부도 아니고 기획부도 아니고 학술부도 아니고 스키부도 아니고 아무래도 '몸으로 제일 때워야 할' 사업부 - 사업진행과 사업관리-를 맡고 있다. 물론 실제 진행은 해당 간사 - 백령회 회원- 이 맡겠지만, 그는 이런 일을 맡았다.
해방후 이승만이 두어차례 장관직을 요청했지만 묵묵히 사회운동가의 길을 걸었다고 한 현동완의 행보를 보면, 그가 이승만을 도와 열심히 정치운동을 했으리라고 보긴 어렵다. 하도 자료가 없어 짐작에 그치겠는데, 내 생각은 이렇다. 아무래도 회장 추대권을 실질적으로 가진 백령회 회원들은 송석하의 네임밸류나 사회적 위상이 현동완보다 더 나아서는 아닐까. 현동완이 장관이었다면 모를까. 그리고 송석하가 학자라서 모시고, 사업계획을 백령회식으로 이끄는데 더 쉬울거라는 짐작에서는 아닐까.
''
마지막으로.)
이부분은 다시 한꼭지로 언급하겠지만.
손경석과 김정태는 엄흥섭이 죽지 않았다면 해방 후 한국산악계가 달라졌을거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들이 따로 말하지 않으니 내 나름대로 짐작을 하자면 이렇다. 해방후 조선산악계의 회장단과 이사진은 산과 그리 인연이 없는 대중적 명망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문산악을 한 백령회 멤버들은 간사로서 활동을 했다. 만약에 말이다. 엄흥섭이 생존했고, 그의 재력이 뒷받침되었다면, 백령회원들이 다시 말하면, 전문 산악인들이 전면에 나선 한국산악회를 구성하고 전문등반이 중심이 된 산악회로 이끌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홍종인과 이은상 체재가 상당기간 계속되면서 백령회는 진작에 그리고 김정태는 점점 주류에서 2선으로 물러나게 된다. 홍종인과 김정태, 또는 이은상과 김정태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글을 읽는 나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김정태는 전체적으로 70년대 초 겨울등산학교 이후에는 '현장사령관' '야전사령관'으로서의 위치는 더이상 갖지 못하는 걸로 보인다. 이부분을 아쉬워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건 소설인데, 3회도 아니고 5회도 아니고 4회 추도기를 연 것은 조선산악회내 알력, 파워게임일 수도 있겠다. 김정태를 위시한 백령회와 반백령회세력 사이에 알려같은 거 말이다. 물론 여기서 반백령회세력이 누구인지 나도모르지만 말이다. 이은상은 김정태를 아주 좋아했고, 홍종인과 김정태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던 걸로 읽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