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14) 백령회의 민족의식은 어느 정도였을까?
백령회가 이른바 독립단체라는 가설은 오늘날 백령회 안밖에서 폐기되었다. 그래도 김정태의 주장대로 민족의식은 있지 않을까라는 게 한국산악인들의 정조 아니 간절한 바램일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그들이 남긴 흔적 구석구석에 눈길을 둘수록 불경스럽게도 이조차 의심이 든다.
창씨개명을 예로 들자. 백령회 기록물 '백령'을 보면 1942,3년경 14명 중에 이기만, 조동창, 엄흥섭 세명을 빼고서는 모두 창씨개명을 한 걸로 보인다. 창씨개명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공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 진학, 일본행, 관공서 출입 등 전방위에서 -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었다고 하니 말이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일본씩 씨명(氏名)이 아니라 조선은 전통 대대로 본관과 성명(姓名)이 있고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을 때 가능한 말이다. 백령회 회원들은 분명히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배운 이거든 못배운 이거든 모든 조선인들은 당연히 창씨명을 버리고 본래의 성명으로 돌아왔다. 백령회원들도 곧바로 그렇게 했다.
해방되던 1945년 11월 25일자 회무부서 분장표이다. 지금으로 치면 상설위원회쯤 될텐데, 보시다시피 조병학. 금철 현동완 등 창씨개명되기 전의 조선식 성명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다음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또다른 안내장을 보자.
입회 신청서이다.
"한국산악회 70년"에는 단순히 초창기 입회신청서라고만 하고 있는데, 대강의 발행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글씨체도 가리방으로 긁은 게 아니라 활판인쇄이다. 1945년~1946년 서류들이 조악한데 비해 이 서류는 격식도 제대로 갖추었다. 게다가 영어까지 병기하고 있다. 아무래도 미군정시기 그것도 1947,8년경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를 말한다.
원적, 현주소 전화 등등 란에 조선산악회는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영어를 병기했다. 시속에 대단히 빨리 적응하는 모습이 분명하다. 당시 국토구명사업 등을 하려면 정부와 협조와 지원을 받아야 할 터이고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데 찬찬히 곰곰히 보면 일순간 눈쌀이 찌뿌려지는 공간이 있다.
바로 씨명(name)이라는 표현 말이다.
민족의식은 감수성이다. 무심코 이 말을 썼다는 것은 그만큼 '씨명'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해 반감이 없거나 그 짧은 몇년 시절에 감각(!)-민족에 대한, 일제의 간악함에 대한 - 이 무디어졌다는 것일테다.
당시 한국산악회의 행정과 업무는 백령회 출신들의 간사들이 주도했다. 따라서 이 서류도 그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명이 아니라 씨명이라니! 창씨개명 또는 씨명이라는 용어에 대해 그들은 왜 민감하게 반응을 하지 않았을까.
백령회 출신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당시 한국 산악회 이사진의 면면은 예사롭지 않다. 그 유명한 진단학회 출신의 송석하. 그 험한 시절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홍종인 조선일보 주필. 기독교의 선을 넘지 않은 현동완 부회장 등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에게도 이 용어가 불쾌하지는 않았을까?
이건 나만의 과잉 반응일까? 아닐 것이다. 작년쯤인가 우리에게 불어닥친 반일 정서를 생각해보시라. 심지어 유치원이라는 용어조차 왜색용어라며 이제와서 바꾸자고 하는 판이니 말이다. 혹시라도 해방 당시까지만 해도 '성명'이라는 용어가 없었고 이 말은 해방 후에 생겨나서 어쩔 수 없어서는 아닐까? 해서 더 찾아보았다.
한일합방되던 1910년 10월 8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한일합방 수작자 명단이다. 여기에 '씨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마 가장 이른 시기의 기사중 하나일 것이다. 이외에도 입학원서 등의 검색어로 검색하니 많은 자료에서 '씨명'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1940년 학교도 아닌 이천의 배영서당이라는 곳은 입학원서가 이렇게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그런데도 아동과 보호자의 이름은 성명이 아니라 씨명이다.
그렇다면 결국 일제 시대때에는 성명이라는 단어가 없었단 말일까라고 안심할 즈음에 자료 하나를 발견했다.
경성중등공민학교의 입학원서이다. 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인데, 참고로 숭문중학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중학교 산악부가 있다고 한다.
경성중등공민학교는 실업학교 또는 야학교 성격의 학교이다. 그런데 여기서 씨명이 아니라 성명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다행이다. 그렇다면 배재나 양정 등 민족의식이 강했다고 하는 사립고등학교에서도 서류에 '성명'이라고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기대한다.
그렇다면 일제하 백령회는 어떤 입장이었을까를 보자.
이 자료는 백령회의 자료집 '백령' 중 회원명부이다. 1940년대 비밀조직(?) 백령회 입회는 엄청나게 까다로웠다고 김정태는 적고 있다. 그들의 명부를 이제 보자. 과연 씨명일까 성명일까?
아쉽게도 그들은 성명이 아니라 씨명으로 적고 있다. 이는 창씨개명 이후라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회원을 적는 순서가 이로하(イロハ) 순서이다. 이로하는 한국어의 가나다라에 해당한다. 굳이 이로하라는 말까지 괄호로 해서 넣을 건 또 뭐람.
그렇다면 일제하 조선을 대표했던 일본인들 주축의 조선산악회를 보자. 놀랍게도 그들은 일본식의 이로하(イロハ)가 아니라 영어 A, B, C식으로 창립시 회원들의 리스트를 적고 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식민지 조선인인데다 그렇게 특별한 산악인이 아니었던 박래현이 제일 앞자리에 서게 된다. 이거 재조선 일본인 산악인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을 보면 좀 이상한 거 아님? 일본인들 왜 그래? 왜 굳이 A,B,C로 해? 이런경우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김정태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 산악인들 저런 사람 아닌데... 무엇이 문제일까? 점점 혼돈에 빠지게 된다.
이제 다시 1946년 이후 아무래도 47,8년경에 만들어졌을 이 입회신청서 '씨명'이라는 용어를 보자.
그리고 당시 조선산악회 이사진이었던 백령회. 송석하. 홍종인. 현동완, 도봉섭, 석주명, 유홍렬 등 각계를 주름잡던 명망가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자.
창씨개명은 조선어 폐지, 신사참배, 강제 징병 등과 함께 민족말살정책의 대표라고 고등학교에서 배웠다.
1946년 10월 미군정 법령 제122호 '조선성명복구령'이 공포·시행되어 일상생활 뿐 아니라 호적(법)에서조차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들은 씨명. 씨명. 씨명. 씨명. 씨명. 그들은 왜 씨명을 그냥 두고 보았을까?
별거 아닌 걸까
그냥 옥의 티일까?
글을 써놓고 보니 아무래도 그냥 옥의 티일 것이다.
세상일이 그러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