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14) 백령회 회장 엄흥섭, 그는 과연 민족주의자였을까?

카테고리 없음|2020. 12. 29. 23:18

 

백령회 리더 엄흥섭이 그의 직업상, 과연 독립의식을 갖고 민족운동의 행보를 걷는다는 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그가 어떤 직장에 다녔는지 몰라도 한참 모른다.

이 글은 그가 다닌 기업에 대해 짧게 터치해본다.

 

 

 

그에 대한 관심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의 어떤 책의 구절을 읽으며 문득 그에 관한 글을 새롭게 읽게 되었고 위와 같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런만큼 이 글은 한국산악계가 엄흥섭에 대한 기존 입장과는 다른 점이 많아 불편해 여길 수도 있겠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삼국(미쿠니)상회를 입사했다. 당시 잣대로 보자면 상당히 잘 풀린 것이리라.  흔히 그를  '미쿠니(三國) 엄'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건 지금 말하자면 '삼성맨' 또는 '현대자동차맨'쯤 되지 않을까. 얕잡아 보는 게 아니라 부러움을 가득 담은 말이리라.

 

왜냐하면 미쿠니(三國)상회는 길거리에 흔히 있는 점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핵심 원료인 석탄을 생산한 조선을 대표한 전쟁사업, 군수산업의 하나이다. 미쿠니 그룹은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호락한 그룹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도 싸한(?) 느낌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영화 '군함도'를 떠올려 보자. 군함도, 강제 징용, 전범기업, 강제착취, 지옥의 섬 말이다. 군함도에서 캐내는 것이 바로 석탄이다. 일본 앞바다 탄광이 그리도 피눈물과 분노를 자아내는 현장인데, 식민지 조선의 탄광은 유유자적, 인간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로 1980년 4월 서슬푸른 전두환 정권이 막 등장했는데도 겂없이(!) 떨쳐 일어난 그 유명한 사북탄광 노동항쟁이 있었다.) 

 

일본이 미군에 의해 석유보급선을 잃어버린 후에도, 일본 본토의 석탄산업이 미군폭격에 의해 붕괴한 다음에도 전쟁에 광분한 제국주의 일본에게 조선에서의 석탄 생산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엄흥섭은 1945년 6월 6일 해주에서 운명을 달리했는데, 사인(死因)이 과로와 식중독이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이유 중에는 전쟁에 광분한 총독부가 할당한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1949년 엄흥섭 4주기 추도문에서 김정태로 추정되는 작성자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서 살고 일에서 죽는다는 비장한 분투아래 애석하게도...'로 적고 있다. 1945년 6월은 일본 본토인 오키나와도 궤멸된 때였다. 일본 본토의 무연탄 사업은 미군의 공습으로 생산이 불가능하던 시절, 이를 대체할 조선의 군수산업에서의 '일'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민중들이 공출에 시달리는 것보다 몇십배 할당량에 시달려도 한참을 시달렸을 것이다.

 

당시 엄흥섭은 식중독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려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병원을 찾았던 고희성은 잘사는 조선인이라 배알이 꼴려서라고 하지만 글쎄다.  짐작으로는 당시 전쟁 말기라 병원이라고 해보았댔자, 의약품이 보잘 것 없었고, 의료진도 전쟁터로 징용당하던 시기라 식중독에 걸린 이를 치료할 여력이 없어서가 아닐까. 

 

놀랍게도 해주시장에게 청탁을 해서 입원을 할 수 있었다. 해주시는 당시 작은 시가 아니라 시장이 아무래도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그게 가능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엄흥섭이 소장(=사장)이라고 하는 삼환은 고희성의 회고에 의하면, 조개탄을 생산하는 기업이었고, 조개탄은 전쟁수행의 중요한 재료였으니 추리가 억지는 아닐 것이다.

 

www.jeongseon.go.kr/page/portal/download/partinfo/mine4.pdf

 

"조선을 떠나며"(이연식 역사비평사)는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당혹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상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미국의 B29 폭격기로 전세를 비관적으로 보긴 했지만, 패전을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패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8월이 될 줄 상상도 못했다. 조선 총독과 조선 주차군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식민지 시기 일본광업주식회사 평안남도 진남포에 사는 일본인 약 15,000명 중 7~8%가량이 재직했던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다.

 

진남포라. 진남포라.

김정태의 "등산 50년"에 있는 지명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엄흥섭의 공장들이 산재해 있는 해주, 진남포가 말이다.

 

 

이제 김정태의 기록을 중심으로 해서 엄흥섭과 진남포 그리고 해주 석탄공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갖자.엄흥섭은 삼국상회를 다니다가 전쟁 말기에 삼국상회의 무연탄관련 하청업체로 보이는 회사를 차렸다. 검색해보면, 전시물자 중의 핵심인 석탄산업은 일본인에게만. 또는 신뢰할만한 조선인에게만 허락한 산업분야이었다. 엄흥섭은 그들에게 '신뢰'할만한 조선인이었다.

 

내심? 반일의식이나 독립의식이라는 내심은 알 수 없는 노릇. 이런 의식을 갖고서 전시물자를 생산한다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런 내적갈등이 요절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손경석은 분명히 미쿠니상회가 어떤 회사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도한 바가 있어' 이 회사의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다. 미쿠니가 어떤 회사인지 알려면, 태평양전쟁말기 조선에서의 석탄생산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면 21세기 디지털세상이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여러 사이트에서 디지털한 자료를 검색하면 된다.

 

이제 결론을 맺자.

 

내가 보기엔 엄흥섭은  평범한 황국소년, 군국소년의 행보를 걸은 걸로 보인다.

지금 2020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평범한 길, 범속한 길을 걷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듯 엄흥섭은 독립운동가일까라는 의문은 갖고 있다.

전범기업인 미쿠니상회의 중견간부 또는 최고기술책임자-김정태에 의하면-와 독립의식, 민족의식의 보유자, 해방운동가라고 연결지으려면 좀 더 많은 증거, 얼개가 있어야 한다. 엄흥섭을 통해 백령회를 운동단체로 자리매김하려면 '담대'하거나 '무모'하거나 겁이 없어야 한다. 한국산악회의 뿌리가 '반일, 민족'이라고 주장하려면 역시 담대해야 한다. 그러나  미싱링크(missing Link)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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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그는 매력적인 인물로 보인다. 얼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리더쉽 있고, 배포있고, 돈도 잘 쓰고...

43년 그는 3000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하고 일본에 스키유학을 보낼 정도였다. 3000원은 어떤 의미인지 나중에 쓰겠다.

 

김정태는 1942년에도 이시이공업소에 근무하였다. 그 이후 강제징용이 본격화 될 때 엄흥섭은 힘을 써서 백령회 회원들과 회원들 가족들을 여기저기 자기가 관련한 회사로 '빼돌려' 징용을 막아준다. 이 부분도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5년 6월 6일 해주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순간에 백령회 회원들에게 앞으로 2달 후에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거라 말했다고 한다. 2달이라고 전하는 이는 좀 허풍을 섞은 것이지만, 패전이 멀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군수산업 깊숙히 있다보면 느낌이나 정보같은 게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전쟁은 '입'이 아니라 '물자'로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군수산업의 한 하청업체 사장의 입장이 과연 이렇게 홀가분했을까?

 

죽는 순간에 그는 회원들에게 두달 뒤에 '분명히(! - 이 부사어는 김정태가 '등산 50년'에 남기고 있다.) 조선이 독립할 거라고 예언을 했다. 만약에 그의 말대로 조선이 독립한다고 하자. 아니 일본이 패망한다고 하자. 살아 있었다면 그는 어떤 스탠스를 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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