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18) 와타나베 엄, 엄흥섭을 기억하며.
백령회 리더 엄흥섭과 동명이인으로 엄흥섭이 있다.
김정태의 "등산50년"에는 1934년경 무림에서 혼자 떠돌던 김정태가 처음 만난 파트너였다.
둘은 아마도 한국인 등반역사상 최초의 자일파트너다운 자일파트너였을거라 본다.
이후 둘은 발군의 기량으로 초등을 해나가는데, 오늘은 저번에 쓰다만 엄흥섭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한다.
이후 와타나베 엄으로 호칭한다.
김정태는 자일파트너임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 엄의 나이를 대충 서너살 위로 보인다고 말하는데(!) 그친다.
대신에 그는 평생동안 그만큼 구두를 잘만드는 걸 본 적이 없다고 각주에 달고 있고 일본인 산악가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20대 전후에 탁월한 제화공(구두만드는 직공)이려면 아마 무학이고 집안도 빈한했을 것이다.
이른 나이에 눈물밥 먹어가면서 구두를 배웠을 것이다.
구두방에서 클라이머들 수제화를 만들어 주면서 클라이밍의 세계에 눈을 떴을 거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손경석에 의하면 등반실력에 있어서는 김정태보다 한수 위였다고 하고 있다.
백령의 기록물인 '백령'의 회원명부이다.
총 14명 중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이는 3명인데, 그 중에 와타나베 엄이 있다.
그는 직업상이나 사회적 지위상 굳이 창씨개명을 할 필요가 없어서라고 본다.
그렇지만 그는 뛰어난 정보력과 사교력을 지는 걸로 보인다.
1940년 10월 백령회가 도봉산 주봉 후면 K크랙을 초등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소식은 일본인과 조선인 록클라이머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당시 조선인 최고의 능력과 네임밸류를 가진 산악인으로 보아도 무방한 김정태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
'라테르네'를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와타나베 엄에 의해서였다.
그동안은 조선산악회에서 일본인들 산악인들하고 주로 활동하던,
조선인으로는 부유한 세브란스 의전생 방현과 등반하던 김정태는 깜짝 놀랬을 것이다.
이후 와타나베 엄의 주선으로 김정태는 백령회 리더 엄흥섭과 만나 의기투합을 하고 이후 행보를 같이 해간다.
백령회 리더 엄흥섭은 리더쉽 있고, 배포도 크고 성정도 좋은 인물로 보인다.
그는 며칠 앞두고 1940년 11월 3일 인수봉 정상에서 '조선인(?) 클라이머들'의 회합을 갖자고 기획을 한다.
며칠을 앞두고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놀랍게도 60명 넘게 현장에 나타난다.
지금 산악계가 한다리 건너면 다 안다고 하듯이 이들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까?
아니다.
백령회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멤버들과 회 바깥으로는 몇몇 가깝게 알고 지내던 수준이었다.
김정태가 당일 등반 일기에서 '곁눈질을 해 가면서' 올랐다고 쓴 까닭은 여기에 있다.
정상에서 서로 통성명을 비로소 하고 뿔뿔히 흩어져 간다.
그들 대부분은 다시 백령회와 인연을 이어가지 않는다.
각설하고 어떻게 며칠만에 60명 넘는 인원이 모인다는 게 가능했을까?
그 비밀은 이렇다.
김정태의 기록에 의하면 이 등반의 또다른 기획자로 와타나베 엄을 언급하고 있다.
와타나베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구두방에서 고객기록카드를 갖고 있던 와타나베 엄을 통해 이 소식이 퍼져나갔을 것이다.
와타나베 엄은 이렇게 상당히 능력있고 사교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김정태의 일기에 언뜻 보면 '사랑에 실패(?)'한 걸로 보이고, 이후 해방 전후에 요절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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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와타나베 엄을 기억하고 기록할 유일한 이는 김정태이다.
그러나 1975년 김정태는 "등산50년"에서 고인이 된 와타나베 엄을 그리 애틋한 정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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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를 보내는 마지막 인사는 왜 다 비슷할까요
https://news.v.daum.net/v/20210102163600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