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18) 고희성은 1943년 양정고 백두산 등반이 해방전 마지막인줄 어떻게 알았을까?
월간 산 2019년 "일제 때 백두산 최후 등정한 양정산악회 고 고희성씨" 기사에는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오르기 전 마지막 산행이 1943년 7월 양정고보 백두산 '등행'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장은 팩트체크를 하면 두군데 다 틀릴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르기 전 2005년 고은, 백낙청, 황석영 등 남측의 문인학자들이 그곳을 올랐다.
두번째, 마지막 산행이라는 것 역시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양정고는 어떻게 해서 1943년 양정고보 산악부의 백두산 등반이 해방 전 마지막인줄 확신할까?
당시 백두산 산행에는 특별한 방식이 있어서 아무나, 아무때나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경석의 "등산백과"에 의하면
1944년에도 체육진흥회 '등행단'이 백두산을 올랐고, 그때 김정태 등이 여전히 스탭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4년 등행단이 등행을 했다면 1944년 김정태, 주형렬 이재수 등이 마지막 등정자가 되겠다.
그 시절에도 백두산 산행은 산행 자체로만 놓고 보자면 별 대수로운 건 아니다.
그런데 기사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사진 한장이 있다. 문득 보고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말이다.
이게 오늘 글의 주제이다.
정확한 제목은 '1943년 양정고보는 어떻게 해서 백두산 등반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성격은 과연 무엇인가?이다.
한장의 사진을 통해, 1943년 양정고보의 백두산 산행의 '성격'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동안 갖고 있던 신념에 약간 균열이 갈 수도 있겠다.
그해 백두산 산행을 담은 여러 단체사진 중 세장이다.
이 중에 '구도상' 문제가 있는 사진 한장이 있다. 무엇일까?
그 답은 물론 3번이다. 1번과 2번은 당연하게도 인물들이 사진 중앙에 배치해 있다.
그런데 3번을 보라. 우측에는 여백이 있는데 비해 좌측은 인물이 잘려 있다.
30센티 자로 재보니 가로세로 비율도 3번은 다르다.
좀더 큰 사이즈로 사진을 보자.
구도가 맞지 않는다. 맨 왼쪽에 모자를 든 손만 보이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이렇게 찍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 사진은 짐작컨대, 이후 좌측을 그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잘랐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이 15명이라는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인솔교사 2명에 대원은 16명인데, 사진을 찍은 이를 포함하면 16명이 된다. 빙고.
왜 그랬을까?
"양정고보 산악부 70년사"를 보면 이 사진 말고도 한쪽이 잘려 있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의 좌측엔 행여라도 이들의 등반에 우리가 알면 불편한, '문제의 소지'가 있어서일까.
월간 산에 이 사진 설명은 "1943년 7월 29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 만세를 부르는 양정산악회 탐험대원들"이라 하고 있다.
'상상은 과감하게, 증명은 엄밀하게'라는 말을 따라, 상상을 과감히 불경스럽게도 해 보자.
이 포즈는 산상에 올라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이들은 지금 무슨 만세를 부르고 있을까?
'대한독립만세'일까,
아니 당시 대한독립만세는 할 수 없었으니, 그냥 우리처럼, 산정에 올라 즐거움을 표하는 장면일까?
아니면 음... '텐노헤이카 반자이'일까?
또다른 '백두산 천지에서 양정산악부 단체사진이다'
보시라 이 사진도 양정중학(내선일체의 일환으로 당시는 고등보통학교라 하지 않고 일인 중학교와 똑같이 중학교라 불렀다.)의 깃발이 좌측 모퉁이에 겨우 있다.
(참고로 빨간 화살표가 김정태로 보인다. 여기서 김정태가 왜나와? 할 사람이 있겠지만, 이정도로 놀라시면 안된다.)
이 산행은 분명히 우리의 기대와 달리 문제가 있는 산행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슬프게도 말이다.
놀랍게도, 양정고는 양정고 산악부가 주체적으로 이 산행을 결정한 게 아니다.
그 전해에도 1943년과 똑같은 단체가 똑같은 목적을 갖고 백두산 산행을 했다. 양정고도 이에 합류했을 뿐이다.
어느 단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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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이 패전으로 향하면서 발악을 하던 때이다. 이해 총독보는 조선체육진흥회를 만든다.
국민체위(*지금은 사라진 용어로 체력의 뜻)를 향상하려는 의도로, 회에는 국방훈련부를 두고 그 안에 이른바 '등행단'을 만든다. 조선산악회는 그 안에서 주력단체가 된다. 백령회 출신들은 아마도 징병으로 공백이 된 일본인 산악인들을 대신해서 등행단의 진행을 담당한다. 등행단-조선산악회-이른바 백령회 커넥션은 다른 글로 할까 한다.
등행단은 그해 7월 기념으로 백두산 등행을 준비하여 '특별히 충성스러운 황국신민'들만 뽑는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홍종인(3대 한국산악회 회장)도 '보도'파트로 선임된다.
그리고 1943년 그 결과를 "등행(登行)-백두산 특집"으로 펴낸다.
일장기가 눈부시게 휘날리는 백두산을 표지로 했다.
기존에 한국산악회 내부에서 백령회가 친일을 했냐 안했냐를 논할 때 기본 텍스트였을 것이다.
이 책 말고는 백령회의 정체를 탐색해볼 1차자료가 없었으니 말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을 수 있는 걸 보면 곧 디지털화를 할 거라 본다.
이 책은 재미있는 구석이 정말 많다.
재미있다는 뜻은 둔감한 우리에게 '지적인 충격'과 '저미어오는 슬픔'을 줄 게 많다는 뜻이다.
그들은 1942년 이렇게 손을 높이 들어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일장기를 들고서...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이다.
"백두산 절정에서 성전완수를 기원하는 행사에서 대원 일동은 황궁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고....
천황폐하 만세의 소리가 조선만주 국경의 공간에 널리 퍼져갔다. (백두산 등행에서)
양정산악 70년의 표지이다. 태고적 침묵을 지키고 있는 천지 연안에 하얀 텐트에 양정이라고 적혀 있다.
백두산 등반이라는 것은 지난 백년간 남조선 사람들에겐 하나의 상징이니만치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우리나라 유수의 산악회 중에 백두산을 가본 산악회는 아마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기도 하겠고 말이다.
다시 찬찬히 이 사진을 보자.
그러니까 1943년 양정고보 산악부도 '덴노헤이카 반자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잘려져 나간 왼쪽에는 일장기가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당시 함께 한 전 대원의 단체사진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양정산악부의 백두산행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더 감추어져 있을까?
몇편으로 나누어서 쓸 수 있는데, 가볍게 두어편 더 쓰고 끝낼까 한다.
"양정고보 산악부 70년사"에는 당시 리더인 고희성의 백두산 산행기가 있다.
고희성은 이외에도 1940년대 양정산악부를 대표하는 산행의 산행기를 남기고 있다.
다른 산행기는 몰라도 백두산 산행기는 그당시 써서 어느 지면에 발표했다는 게 거의 확실하다.
그의 일기를 통해 이 산행기를 조금만 더 터치하고, 자세한 것은 단행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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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진을 보다보면 제일 눈길을 끄는 인물은 한가운데에 작달만한 키의 남자이다.
지금 이 순간은 '반자이'하면서 분명히 연출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 분은 '불령선인'인가. 손을 내리고 있다. 주머니에 넣고 있어보이기도...
누구일까?
어쩌면 '이준'이 아닐까 싶다.
눈길이 카메라를 보지 않고, 폼도 잡지 않고 약간 냉소를 띠고 있다. 불령선인같다.
덧붙여)
참고로 문재인 대통령 이전에 2005년 남북작가회의에 참석한 시인 고은, 평론가 백낙청, 소설가 황석영 등이
백두산 등반을 했다. 고은 시인은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다 엉엉 소리 내 울었다고까지 한다.
아무리 감정이 풍부하다고 하지만, 고은은 좀 오버라고 본다.
현재의 백두산은 그럴 산이 아니다. 오히려 탄식을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빼고 보면 백두산은 이렇습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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