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19) 양정 산악부는 왜 '굳이' 1943년 백두산에 가려했을까?

카테고리 없음|2021. 1. 10. 08:59

1940년 들어 양정고보 산악부는  괄목할만한 등반을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특히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 전체가 얼어붙는다.

그런데도 1942년 여름 함경북도 차일봉에서 백령회를 조우하면서 양정고보는 이후 승승장구한다.

그 정점이 1943년 7월 백두산 등반으로 보아도 좋겠다.

 

2020년 책 한권의 등장으로 양정고보 백두산 산행의 실체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아아 슬프다. 그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고 질서를 유지했을텐데....

뭐 어때.

이런 작업은 사회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도 아니고, 돈드는 것도 아니니 그냥 재미로 쓰고 읽지 뭐.

 

1940년대 양정고보 산악운동의 중심은 1939년 입학한 고희성(1927년생)이 있다.

"양정산악 70년"에는

고희성은 1942년 차일봉부터 1945년 1월 설악산 동계 화채릉 초등까지 산행기를 남기고 있다.

 

그중 1943년 백두산 산행기는 다른 평범한 산행기와 달라도 한참 다르다.

한줄한줄 각주를 달아야 제대로 읽힌다.

그동안 우리는 읽은 게 읽은 게 아니었어. 듣는 게 듣는 게 아니었고.

다른 산행기는 모르지만 '백두산 하계등반'은 - 확신하건대 - 당시 어느 지면에 기고한 글이다.

그 당시,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써지 않았다면 결코 구사할 수 없는 '시사' 용어들과 현장감이 가득하다.

이 글을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고희성 또는 누군가가 재편집해서 실었지만, 당시 산행의 성격을 감추는데 실패한다.

 

제목이 '양정산악부 백두사 탐구 등행 연성회'인데, 그냥 읽으면 아무 것도 아닌데,

제목부터 힌트를 담고 있다. '등행, 연성'이 그것이다. 평범한 용어가 아니다.

고이소 구니아키 당시 총독이 등행단을 위해 하사한(!) 제자(字)이다.

'연성(鍊成 렌세)'은 제국주의 용어로 연마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인고단련으로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연마육성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이런 뜻으로 쓰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등행 연성'은 등행을 통해 연성을 하겠다는 뜻으로, 그 이전에 이루어졌던 그 어떤 등산하고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즉 이번 백두산 등행은 산행이 아니라 군사훈련이라는 뜻으로 훈련 내용은 가지가지한다.

선착순도 하고, 피로 테스트도 하고, 개인짐은 자기가 지고,야간행군도 하고, 아침마다 궁성요배도 하고 등등.

요는 백두산 등산이 아니라 백두산 산악지대에서 행해진 산악행군이요 전시훈련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등행은 등산+행군의 약자가 아닐까도 싶다.

고희성의 산행기를 비추어 볼 텍스트는 이름도 거창한 '조선체육진흥회국방훈련부 등행단'이 펴낸 "등행"이다.

이 책은 1942년 백두산 등행을 담고 있는데, 1943년 양정고보도 제2회 등행단 소속팀으로 운행했기에 본질은 동일하다.

이 글에서 등행단은 이 팀을 말한다.

이 책 구절로 고희성의 산행기를 각주를 달면 전혀 다른 글이 된다. 마치 마법이 풀린 공주처럼.

 

길게 하면 한구절 한구절 끝이없고 고희성이 쓴 몇몇 구절을 이 책을 통해 '다시읽기'를 해본다.

고희성의 글은 '등행'과 함께 읽으면 말그대로 '부합(附合)', '상조(相照)한다.

계획의 동기, 고희성에게 백두산을 제안한 사람은 바로 백령회 리더라고 하는 '엄흥섭'이 등장한다.

일제하 엄흥섭의 행동과 의식을 증언하는 이는 김정태와 고희성이 유일(?)하다. 

 

이 산행기를 '등행'과 겹쳐 읽으면서 통해, 평소 갖고 있던 고희성의 증언력을 상당부분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아무튼 '엄흥섭'에 관한 이 부분이 진실이라면, 엄흥섭은 참 이상한 사람이 되버린다.

그런데 정황상 이 부분인 진실일 것이다.

이 글은 곧이어 다시 쓰겠다.

 

그런데 '양정고 교련교사가 여기서 왜나오지?'

참가인원은 객원 암월익환을 빼고 15명이라고  하고 있으나 당시 기사를 담은 매일신보를 보면 17명이다.

참가교사는 김상겸이 있고, 일본인인 듯한 또다른 선생과 다른 한명은 여기에  적지 않고 있다.

 

그 전후 양정고보의 원정은 보통 4,5명에 불과했다. 이번에 16명이나 참가한 이유는 무얼까?

백두산이 그리도 오매불망이라서일까? 

참고로 16명에는 산악부 외의 일반 학생들도 다수 있는 걸로 보인다.

 

객원 암월익환은 엄흥섭의 장남이다. 그가 왜 이 백두산행에 참가했을까? 이 부분도 엄흥섭과 관련해서 쓰야 할 것이다.

 

백두산 등행 연성대장 '성산정이'를 만나 격려를 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등행"을 읽어야 오롯해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상은 자유롭게)

일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나 용산중학교 산악부는 참가하지 않은데, 조선인 학교에서 참가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등행은 평범한 등산이 아니라. '총후', 내선일체, 전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조선인들을 잠재적인 군인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등행 내용도 정확히 그러하고.

이 정도이면 대강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희안하게 고희성은 이 글에서 '백령회'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1943년 등반은 백령회와 무관한 것일까?

 

그럴리가.

고희성 팀은 단독팀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등행'단의 일부, 학도대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다.

놀라지 마시라.

당시 이 등행단의 스탭은 '조선산악회'에서 상당부분 맡아서 했는데, 일본인 젊은 회원들이 주축이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연일 패전하는 일본 군대에 징징 울면서 징병되어, 조선산악회에는 공백이 생긴걸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백령회원. 일본인들이 보기엔 조선산악회내 조선인 산악인들이 그 공백을 메꾸었다.

당시 매일신보를 보면 얼마나 많은 백령회원들이 참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기사를 통해 이 글을 보강하거나, 다른 글로 올릴까 한다.

 

 

당시 양정고보 등행단의 목적에 대해 .... ㅁㅁㅁ로 내세워야 했다. 표방해야 헀다

라고 강요당한 듯한 표현은 김정태나 손경석식 글쓰기투이다.

고희성이 당시 기고한 글에는 물론 이 문구는 없었을 터이고, 이후  재가공하면서 덧붙인 수사에 불과하다.

 

둘째줄, "대자연을 도장으로"라는 말은 상당히 산을 좋아하는 우리에겐 그럴싸한데. 

놀라지 마시라. 당시 조선총독부의 2인자이자 실세인 정무총감이 등행단에 내린 휘호이다.

 

조선총복부 정무총감 다나카 선생이 내린 말인데, 글씨체가 좀 그렇다.

 

전력증강 성전완수 등은 애초 이 등행단이 내세운 목적이다.

고희성은 당시 등행단의 팜플렛에 기초하여. 이 산행기를 썼다는 것이 드러난다.

다른 산행기와 달리 그런 까닭에 상당히 '시국용어', 또는 '시사용어'가 많이 들어간 까닭이 여기이다.

 

* 매일신보 1942년 6월 4일자 제2회 등행연성회 소식이다.

여기서도 '대자연을 도장으로'라는 말이 나온다. 등행단의 단훈쯤 될 것 같다.

 

참고로 박정희대통령이 전국에 산장을 세우면서 내린 "산은 인생의 도장"도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바둑은 인생의 도장이니, 야구는 인생의 도장이니 하는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에서 건너와서 우리를 사로잡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예전에 썼으니 패스.

 

그 지역은 공비가 출몰한다는 등 별별 이야기가 많아 당시 국경경비대가 함께 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건 맞긴 맞지만 그게 또 애매하다.

일제때는 그 언제라도 백두산 산행은 연간 1회, 7월 말, 당국이 공식 허락하는 순간만 가능했고,

그때는 '자국민 보호'의 명분으로 '당연히(?) 국경경비대 대원들이 함께 했다.

맨 밑 설명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반만큼의 진실이고, 그래서 반만큼 거짓이다.

등행단이 1942년 백두산 등행을 하기 전 관악산에서 행했던 전국 등행단 지도자들의 예비훈련의 모습이다.

아뿔싸. 치안이 완벽히 유지되어 있는 관악산에서도 군인이 행렬을 이끌고 있다.

백두산 등행의 성격을 우리는 이제 확실히 알아야 한다. 

 

고희성은 또 실제는 학생대로 독립해 등행을 계획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 부분도 더이상 각주를 달 필요가 없겠지만, 학생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행단의 지휘통제를 받아야 했다.

 

고희성은 " 경비원은 무전기로 통신을 하면서 보고한다. 왜놈 군인들이 사기를 앙양시키고 우리 양정대를 보호한다면서 휴식 때마다 보고를 한다"라고 적고 있다.

고희성은 '양정고 단독 등산의 뉘앙스를 주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각주를 달 필요가 있을까 마는,

"등행'에 의하면, 당시 통신장비는 한세트에 불과했다. 양정고 전용이 아니었다.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당시 단원은 133명, 보조원은 47명 대부대원이었다.

 

양정고보가 한 일제하 그 어떤 등산도 이렇게 공적인 목적을 표방한 적이 없다.

아니 그 어떤 산악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1943년 백두산 산행에서만 이렇게 거창할까?

 

그 까닭은 이 목적이 '등행단'이 내세운 목표 중 '온건해 보이는' 몇개이기 때문이다.

양정고보가 '굳이' 1943년 백두산을 가려면 이럴 수 밖에 없었다.

안갈 수도 있었다면, 갈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국립산악박물관에서 펴낸 "사람 산을 오르다- 산악인 구술조사보고서2" 중 고희성편이다.

 

백두산 강역에서 '비적단'에 대해서 우리가 품고 있는 의문을 면담자는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느냐'라고 질문을 한다.

 

고희성은 "학생들이 가니까 우리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라고 운을 띄면서.

'이 산림지대를 러닝셔츠하고 저 조끼만 입고 10km인가 뛰었다구요. 뛸 적에 느낀 것이 있어요"라고 하고 있다.

이 때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해준다.

이 구절은 '비적단(=독립운동가)의 위협으로 인해 우리는 10km를 뛰어야 했고, 그때 민족의식이 각성되었다'라고 해석되지 않는가.

 

그러나 뉴스 사실은.

당시 등행단은 백두산에서 전시훈련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산악구보가 예정되어 있었다. 끝

 

"자기 짐은 자기가 지고가는 원칙에 교사도 하는 수 없다."

고희성은 마치 손경석이나 김정태의 글을 보는 듯 하는 느낌이 든다.

반만큼의 진실을 쓰긴 쓰나. 그래서 결국 반만큼의 허위로 끝나는...

 

이 원칙은 마치 양정고보 산악부에서 만든 느낌이 든다.

그래도 설마 산악부 지도교사(?) 또는 교사를 이렇게 대할려구?

 

정답은 애시당초 '등행단'의 원칙이 그러해서이다.

1942년 이전 백두산 등산은 돈내고 편안히 다닌 '유람'이고 '인맥쌓기'였지만 1942년부터 바뀌었다.

이들은 '훈련'의 장으로서, 성전 승리의 기원의 장으로서 백두산에 간 것일 뿐이다.

 

고희성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는 1942년에 도난을 당하고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고,

후일 일본에서 반산달웅(이이야마 다츠오)를 만났을때 1943년이라고 말했다고 하고 있다.

 

이이야마 다츠오는 1942년 등행단침의 핵심 집행부원이었다.

그리고 1942년 운운한 것은 아마 이이야마 다츠오 사이에 잘못 나눈 대화다.

정계비는 1932년 사라졌고, 이에 대해서도 진작에 글을 썼다.

 

양정고보 고희성 산행기에는 '힘들다', '피곤하다' 말이 많다.

왜이럴까?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백두산 산행이 상당히 힘들다는 뉘앙스를 우리엑 주려고 해서.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때 TV중계를 보았으면 알겠지만, 그 누구도 백두산 산행에 헉헉대지 않는다.

백두산은 높이가 2744이지만, 별로 힘들지 않다. 

그런 까닭에 1942,3년 이전 수많은 백두산 산행팀의 산행기에는 '힘들다'라는 형용사가 없다.

 

진짜 이유는 이것이다.

등행단의 리더 - 고희성이 언급한 - 는 이 백두산행을 '극기훈련'으로 보고 있다.

야간훈련도 하고. 행군(!)하면서 군가제창도 계속하고. 여느때와 달리 자기짐은 자기가 지고... 등등

전쟁놀이를 한 것이었다. 피곤할 수 밖에

 

고희성과 양정고 산악부는 전년도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알면서 이 등행에 격려를 받으며,

혼자서 간 게 아니라 여러 수십명과 함께 줄지어 행군하며 군가도 부르고. 정상에서 만세도 부르고.

고희성이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전시체제이기 때문에 군사용어가 많다" -> 각주를 달 필요가 없겠다.

"경비는 국경경비대 4명(무선기사 2명 포함)이 맡아 주었다. -> 역시 마찬가지. 국경경비대는 더 많았다.

 

"소요 경비는 각자 자비부담으로 하고 일인당 교통비 25원,....."-> 이는 따로 글을 적겠다.

"학교 보조 100만원"은 오기이다. -> 100원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민족정신이 투철한 양정고보가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 전시의 첨병'으로 육성하기 위한 백두산 등행의 본질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과연 100만원이나 100원을 냈을까? 다른 원정 산행에서는 전례없던 일이다.

나는 의심을 품는다. 

자료가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고희성이 백두산 산행이 양정고보만의 쾌거, 민족의식의 발로로 분식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여겨진다. 

 

고희성은 귀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목재 벌목 사업소에 도착한다. 16명의 갑작스런 손님에 좀 당황한 모양이나..."

"닭 다섯마리가 올라왔다."

 

이 부분은  각주가 필요하다.

1942년이라고 한다면 목재벌목사업소는 '합동목림주식회사를 뜻한다.

1942년 백두산 등행에는 위로는 총독부부터 아래로는 저 말단 면사무소까지 총력단결하여 등행을 후원하였다.

"당황"이라는 표현은 '미리 예정된 수순'을 가리기 위한 표현이기 쉽다.

일본인이 운영할 목재 벌목 사업소에서 경성제대생도 아니고 평범한 조선인 고보생들에게 닭 다섯마리를 줄까?

이건 그냥 소설일 것이다.

 

진실은. 등행단 전체가 합동목림주식회사를 찾았고, 그곳에서는 숙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걸리 기운에 상하없이 마음을 터놓고 노래까지 나온다"라는 구절을 보자.

막걸리라는 용어와 함께 이 노래는 조선어로 된, 조선의 정서를 담은 노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등행단 전체가 회식을 할 자리에 막걸리일 가능성도 없고,

비애어린 조선어 노래가 아니라 일본의 군가풍 노래였을 것이다.

 

만약에 말이다. 막걸리를 마실 자리였다면, 조선인 벌목공들이 비참하게 사는 궁박한 합숙소였을 것이다.

그 합숙소에서 그들의 행색을 보면서  민족의식을 느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닭 5마리도 아니고, 마음을 터놓고 노래를 부를 것도 아닐 것이다.

 

양정중학교 산악부의 백두산 연성 등행회 귀경을 알리는 신문기사. 또다른 동행교사는 일인 오오야마 선생이고....

생도가 17명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생2명과 함께 총 19명이라는 말인가.

 

이런 기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연성' 또는 백두산으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아 너무 잔혹한 글읽기인가.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의 세계에서 내가 살았을 때를 돌이켜 보자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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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이야기가 막 솟아나서, 다른 글들을 위해 이 글은 여기서 줄이고....(글이 도중에 날라가는 바람에 정리가ㅜㅜ)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이 글 시리즈에서는 함부로 '친일'을 말하지 않는다. 

시속을 따르는 평범한 우리가, 역시 평범한 그들도 시속을 '따랐을' 거라고 추정하고 그치는게 온당하다고 본다. 

 

 

1943년 8월 14일 매일신보 기사 169명의 조직 구성은 어떻게

 

*그들이 백두산 찾는 중인 8월 1일 드디어 징병제 시행의 감격을 맞이하였고, 특히 양정고보생들은 진지(^^)하였다고 기사는 적고 있다

 

*매일신보 43년 11월 18일 기사. 제17차 도봉산 자운봉 등행에서는 단장과 피켈 등의 휴대를 금하고 있다.

그 뜻이 무얼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가로운 등산놀이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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