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북한산 우이동 가는 길의 잊혀진 정경 하나.
해방 후 1949년이면 한국산악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에 산악인들 발길이 잦아들던 시기이다.
출발은 보통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시작되는데, 그들은 저멀리 북한산 봉우리를 눈여겨 보기에,
우이동 가는 길 정경이 어떠한지는 추억의 산행기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언론인인 설의식은 1949년 1월 15일 "양주길 삼팔선"을 찾아 글을 남긴다.
동소문 너머 우이동까지 적은 간결체 글에서 우리가 몰랐을 낯선 풍경을 하나 발견한다.
양주길 삼팔선.
양주로 갔던 길에 포천군 초성리의 삼팔선을 밟아 보았다.
그래서 양주길 삼팔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양주라 먼 길 같으나 실상은 서울서 백리 이정의 의정부다.
1월 15일 토요일 청 초한
금년 들어서 오래간만에 추운 날이다.
동소문 턱으로 돈암동 고개를 넘어서니 벌써 시골 맛이다.
깔린 눈 위에 바람은 매웠다.
매운 바람에 행인들은 움추린 표정이다.
서글픈 미아리 공동묘지를 지내니 인가는 차츰 드물어진다.
우이동 못 미쳐서 볕 잘 드는 산비탈 언덕 옆에는 가죽만 남은 황소 10수마리가 납죽하게 나란히 누워 있었다.
소바리(*소바리- 등에 짐을 실은 소, 또는 그 짐) 끌고 지나가기는 다소 거북한 곳이다.
난생처음으로 보아서 그런지, 풀 바닥에나 널반지에 달라붙은 가죽 소는 보기에 흥겨운 풍경이 아니다.
그래도 이 제혁 때문에 양주는 연 1천만 원 정도의 수입을 얻는다 한다.
우이동 지나서부터는 고양에서 양주 땅이다.
출처: 설의식 수필선집(설의식, 이성천,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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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중랑천은 의정부 가죽공장과 방직공장으로 중랑천에는 시커먼 물이 흘렀다고 들었다.
우이동 못 미쳐서 가죽을 얻기 위해 조심스럽게 도살하고, 가죽을 바닥에 붙여서 말렸나 보다.
그것도 열마리 씩이나...
그러나 그 시절 이 풍경을 낯설어 하는 이 얼마나 있을까?
다행히 살풍경스러운 풍경을 설의식 기자는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고 글을 남겨 주었다.
아마 이 풍경은 전쟁 후에도 한참동안 연출되었을텐데,
이상하다. 의정부 대로 너머 수많은 미군부대의 미군들 사진에서 발견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전쟁 끝나면서 의정부나 우이동쪽에 가죽을 얻기위한 소사육은 끝났거나,
또는 길가에 이렇게 소가죽을 건조하는 게 미군들에게 혐오스러워 막았을까?
이게 인연이 되어 언젠가 관련 사진이나 텍스트를 더 만나게 되겠지.
* 1960년대 우이동까지의 풍경은 대체로 변함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의 김영도 선생님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P 294)
"당시 서울의 외곽은 돈암동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며 집이 없고, 바로 공동묘지가 길게 이어졌다.
그 끝이 우이동이었는데, 초입에 수유리라는 넓은 벌판이 있었고...."
선생님이 60년대 우이동에 살던 시절을 그린 에세이는 정말로 미문이다.
이 글을 일부라도 읽으시려면, 책을 보시거나,
다음에서 김영도는 어떻게 해서 독일의 Bergsteiger의 MitArbeiter가 되었는가? 를 검색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