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20) 1949년 왜 특이한 명칭의 '등행대회'를 만들었을까요?
1949년 한국에는 특이한 명칭의 대회가 생겨난다.
이름하여 "등행대회"
창의문에서 백운대까지 12km를 달리는 대회인데, 당시 백운산장 개축의 자재 운반도 꾀하였고,
무엇보다도 이 대회에서 입상만 하면 곧바로 한국산악회 정회원이 되는 특전이 있었다.
문제는 등행(登行)이라는 한자어다
8급이라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으나, 놀랍게도 아무도 구사하지 않던 단어였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 희한한 용어를 알았고 붙였을까?
이 문제에 한번 호기심을 가져본다.
출발점은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1950년 4월 29일 국도신문 기사.
한자어 "산악"이라는 뭉툭하게 쓰인 코너에 "백운대 등행경기회" 소식이 있다.
창의문에서 백운대까지 12km의 등행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등행"이라.
백령회 관련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등행"이라는 말에 적지 않게 흔들리고 있다.
"등행(登行)"은 8급 한자어이다.
읽어서 쉽게 뜻을 안다고 해서 이런 용어가 있었다고 전제하면 안된다.
한번 과거를 살펴보자.
제일 먼저 뉴스 라이브러리를 들아가 보자.
등행으로 검색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등행(登行)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일본인 이름이나 '초등교사의 갈등 행태에 관한 연구' 등 띄어씌기를 오해한 검색어가 대부분이다.
조금 낌새가 이상해서, 조선왕조실록을 들어가보자.
조선왕조 실록에 등산은 총 356건이 뜬다. 물론 이 거개가 우리가 말하는 그 등산이 아니다.
지금 1 '등산'도 연평해전때 북한군 경비정이 출동한 황해도 등산곶을 말할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양반네들의 산에 가는 방식이라는 '유산(遊山)'은 총 53건이다.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 '등행"은 단 헌건의 검색결과도 없다.
음 조금 심각한데,
그렇다면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보자.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서 등행을 검색하면, 1942년 조선체육진흥회 등행단에서 진행한 바로 그 등행이 뜬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의 띄어쓰기가 잘못되어 검색된다.
검색된 총 1415건 중에 등산과 관련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일본에서 넘어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건 논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일본국회도서관에 들어가 보았다.
놀라워라.
'제목으로 '등행'을 검색했더니, 책, 기사, 논문 할 것 없이 겨우 24건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도 많은 책들이 발행년도가 달라서 발생한 일로 사실 몇건 밖에 안 뜬다.
그 처음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그 책 '등행'이 제일 먼저 뜨고,
운동 또는 스키에서 '걷는 방식'을 뜻하는 듯한 '계단 등행'식의 용어가 제법 있고,
그리고 가스통 레뷔파의 그 유명한 별빛과 폭풍설(1955년 첫 번역)이 세번째 뜬다.
놀랍지 않은가
이로써 가볍게 검색을 통해서, 등행이라는 용어가 조선에도 없고, 일본에도 희귀한 용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약간은 충격에 빠지고, 어떤 고민을 해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송석하 초대 한국산악회 회장이 별세한다.
한국산악회는 차기회장을 뽑지 않고, 홍종인 도봉섭 부회장이 회장대행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들은 차년도 사업계획으로 북한산등행경기대회를 열고 이를 연례적으로 열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의 핵심에 홍종인 부회장과 김정태 (제1)간사가 자리하고 있다.
홍종인은 누구인가.
1942년 조선체육진흥회 국방훈련부 등행단에서 추진한 백두산 산행, 이른바 "등행"단에 보도반으로 뽑혀서 간다.
백두산 등행단은 1941년까지 해마다 이루어졌던 등산과는 180도 달라진다.
등행단장 말 그대로 기존의 '근대 등산'이니 '탐험등산'이니 하는 한가로운 놀음은 중단하고,
패전위기가 목구멍까지 넘어오자 대동아 성전 완수의 핑계아래 군사훈련의 의미로 재편된다.
그들은 산행이 아니라 행군 중에 군가도 부르고, 야간행군도 하고, 구보도 하고 등등 생쑈를 한다.
기자로서 자유로울(?) 영혼인 홍종인에게 이 경험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김정태는 누구인가?
1942년 등행단에서 총괄 스탭으로 맹활약하며 등행단에 이름을 깊이 각인시켜, 43년과 44년에도 활약한다.
그들은 여기서 아마 처음 만나, 일제하 산악운동의 현실을 깊이 체득 했을 것이다.
1949년 5월 8일, 제 1회 등행경기대회는 성행을 이룬다.
같은해 5월 12일 총회에서 현동완은 제 2회 한국산악회 회장이 되고, 홍종인은 실세 부회장이 된다.
현동완은 누구인가?
그는 6월 6일, 백령회 리더 엄흥섭의 4주기 추모제를 연다.
추모제는 김정태 주형렬 채숙 등 전 백령회 회원들이 기획하였고, 현동완은 '엄흥섭의 스승되시는'이라고 소개된다.
그 추모제는 156명이나 참가하여 사진전과 행적을 기린다.
현동완과 엄흥섭의 인연은 그정도이다.
등행경기대회의 '등행'이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의미와 그 출발점이 무엇인지 사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현동완은 실세 간사인 김정태의 기획력과 조직렬 그리고 실행력을 깊이 신뢰했을 것이다.
입상하면 영광의 한국산악회 정회원이 되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그의 것이 아니었을까?
'등행'이라는 용어는 홍종인이 등행단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산악계 후배들이 일본어를 쓰면 과격하게 화를 낸 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등행'의 의미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행'이라는 용어는 김정태가 등행단의 핵심 스탭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용어를 조어해 낼순 없고 기존의 "등산"이라는 용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결국, '등행'이라는 용어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다면,
홍종인과 김정태가 서로 1942년 만나지 않았다면 또
1945년 한국산악회에서 재회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이런 허망한 만남에서 무엇인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등행대회는 1960년대 내내 아마 홍종인 체재하에서는 계속 진행된다.
짐작으로는 1967년 이은상 체재 때일거라 보는데, 언제부터인가 명칭이 '등산대회'로 바뀌었다.
(*다음에 한번 짬내서 이것도 찾아보지 뭐^^)
이상 '등행'이라는 이제는 사멸한 한 용어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어떤 인연에 의해 해방된 조선에서 부활했다가 다시 소리없이 사멸되었는지 그 행적을 추론해보았다.
추론의 근거는 이정도에 불과하지만, 진실에서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