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20) 일본인 산악인들은 경쟁자였을 뿐일까요? - 이시이를 보면서

카테고리 없음|2021. 1. 12. 15:20

이 글은 김정태가 일본인 산악인들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특히 아래에 적겠지만 이시이와의 아름다웠을(!) 인연을 놓고 보면 더 그렇습니다.

일제시대 취미 모임에 민족과 나이와 신분을 떠나 이렇게 격의없는 우정을 나눈 예가 얼마나 있을까요?

 

적어도 김정태에게 이시이는 10년 가까이 선배 노릇, 형 노릇을 제대로 한 것 같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꿈꾸는 '밥사주는 이쁜 누나', '술 사주고 용돈까지 주는 멋있는 형님'이 그려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등산 50년"에서 김정태는 그를 몇자로 짧게, 그것도 부정적인 코멘트를 하고 맙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어떻게 쓸지는 사실 저자인 김정태의 선택입니다.

이 글은 그래서 그를 논하거나 시시비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오늘날 우리가 그의 글만을 갖고 일제시대 한일 산악인 사이의 관계를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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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계의 아름다운 이상은 국경을 넘어 우정을 공유한다 일겁니다. 해방 후 5,60년대부터 한국산악회, 서울대 문리대 산악회, 동국대 산악부 등이 일본의 산악회와 교류하는 게 아마 외국 산악인들과의 첫 교류일텐데요.

그런데 그 어떤 산행기에도 '일제시절에 대한 앙심' 또는 '한일간의 경쟁' 운운하는 것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산악운동은 '축구'하고 달라도 한참 다르니까요.

 

그런데 유독 한사람만, '한일간의 경쟁' 프레임으로 산악운동을 보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그것도 30년대 중후반 시절, 장소적으로는 국내 북한산, 금강산 그리고 백두산에서 말이죠.

이 프레임은 그런데 우리들에게 대체로 잘 먹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테면 오쿠노와의 사이에 국경을 넘는 우정을 말하는 걸 보면,

그 시절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산악운동의 본질이 '동지, 우정, 동지적 우정'이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김정태와 이시이와의 인연은 이렇습니다.

김정태는 1935,6년 경 북한산 또는 금강산 가는 길에 처음 만납니다.

그때부터 적어도 1943년까지 근 10년 가까이 지속적인 교류를 합니다.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민족을 떠나 '형-동생' 간의 유대관계가 좋으려면 '가진 자'가 잘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일본인이고, 학벌 좋아 식민지 조선에서 지배계급이고, 또 사업체도 번듯하여 돈 씀씀이도 좋습니다.

성격도, 김정태가 기록한 첫 만남의 상황을 보자면 호남형으로 보입니다.

식민지 조선인 산악인들을 서스럼없이 만나고, 후원까지 한다는 걸 염두에 두면 그의 성격은 충분히 짐작가능합니다.

일본대학 산악부(?) 출신의 이시이는 적당한 수준의 클라이밍 실력을 갖고 있는 듯 하고요.

그런데 김정태는 이시이는 자기보다 서너살 많다고 하고 말 뿐, 호구조사를 밝히지 않습니다.

 

이시이는 첫만남때부터, 술사주고 재워주며 차비를 제공하며 김정태의 뒷배를 봐줍니다.

특히 자금 지원을 사심없이 합니다.

김정태가 산악계에 나아가는 것 이를테면 조선산악회 가입도 이시이의 추천으로 가능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김정태는 1930년대 중후반 이시이와 함께 바윗길 등반에 몰두하여 많은 초등을 합니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다시 태어납니다.

조선인 산악인의 대표에서 한걸음 나아 조선 산악인의 대표주자로 말이죠.

 

그 첫발은 1942년 1월 1941년 조선산악회가 꾸린 마천령 산맥 대종주의 성공입니다.

당시 등반대장은 나이도 더 많고 경륜도 많아 조선산악회 중심인 이이야마가 아니라 이시이였습니다.

그 까닭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이시이가 김정태, 주형렬, 양두철 등 원정대의 주력인 조선인 산악인들과 더 친하니 조율을 잘할거라 믿었을테고,

무엇보다도 원정에 소요되는 자금 동원력에 있어서도 이시이가 이이야마보다 훨씬 나았을테니까요.

 

이 동계 등반의 성공으로 김정태는 전 조선 산악계와 체육계에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1942년 10월 김정태는 당당하게 메이지 신궁 국민연성대회에 참가하는 등 일본에 자주 왕래합니다.

 

1942년 조선체육회 백두산 등행단에도 조선산악회가 진행을 맡는데, 이이야마와 함께 이시이가 전면에 나섭니다.

김정태는 유일한 한국인 간사로 맹활약을 하는데, 그때 김정태의 소속이 이시이 공업소 근무로 나옵니다.

김정태가 실제 근무를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지만,

설령 안했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까지 해서 김정태의 등반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을 거라는 방증입니다.

김정태는 이시이와 함께 1943년에도 등행단과 백두산 등행팀에서 맹활약합니다.

김정태의 기록에 의하면, 1944년에도 김정태와 백령회원들(조선산악회 내 조선인 산악인들)은 백두산에 갑니다.

그때 이시이도 함께 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35년경 만난 이후 근 10년동안 변함없는 우정을 보입니다.

 

이시이가 김정태로부터 사라지는 건 강제징용이 거세어지던 1944년 전후가 아닐까 싶어요.

엄흥섭이 관계하는 미쿠니나 삼화연료회라는 전쟁수행기업에 입사하면서이거나,

아니면 이시이가 혹시라도 징병이나 징용을 당했다면 징병 이후일 수도 있겠고요.

그때까지 김정태와 김정태를 위시한 백령회원들은 이시이와 동지적 우정을 나눈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지금 이 자료는 김정태의 일기 중 관련부분(자료제공, 와운루계회의 홍하일 선배)인데요.

이때 지도자 대표로 참가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을까요?

김정태는 그 다음 페이지에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10월 22일 여비 수취로 70엔입니다. 아마 총독부 당국에서이겠죠.

23일 왕복 차비(28.50엔과 44엔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24일 출발하는데, 엄흥섭씨로부터 40엔을 거마비로 받습니다.

과연 통이 큰 엄흥섭 리더입니다.

 

그리고 이시이 상으로부터 10엔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10엔의 의미는 어느정도일까요?

 

일제시대 돈독 올랐던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럭키경성"(전봉관 지음)에는 이해하기 쉽게 일제 시대 1원을 2007년 당시 10만원으로 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100만원 정도 되겠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940년대 도시 노동자 일당이 1엔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열흘치 일당인데요.

지금으로 치자면 -  일당이 10만원~ 20만원으로 한다면 -  100만원에서 200만원입니다.

 

통계청 자료

1933년까지는 안정적인 물가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인플레를 일으키는 듯 합니다.

쌀 1되가 27전, 소고기 375g이 60전, 계란 10개가 64전(100전이 1원)이군요.

 

조선 방직산업 여공은 12시간 2교대(같은 시기 일본은 8시간 3교대)를 해야했습니다.

1941년 일당이 50전이 안되었군요. 지금 돈으로 5만원?

 

이시이의 10원은, 제게는 감동입니다.

이시이는 이때만 거마비를 준 건 아닐겁니다.

요즘 세상에도 보기 드문 아름다운 이야기 아닐까요.

 

 

죽어버린 자는 더이상 나를 해치지 못하는 법이라고 합니다.

정적이라도 죽고 나면 예우을 하는 게 문화이고 그사람의 품격입니다.

그런데 김정태는 "등산 50년"과 잡지에 기고한 여러 글에서 떠나버린 이시이를 어떻게 평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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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엄흥섭은 1943년 통크게, 큰 돈을 희사해서 김정태 박순만 등 4명을 일본에 스키 유학을 보냅니다.

그 장소가 북알프스 자락의 '유자와'인데요.

김정태 등은 어떻게 그곳을 알았을까요?

 

물론 검색해보면 나오지만,

유자와는 일본북알프스의 전진기지인 나가타현의 남단으로 동경에서 제일 가깝고,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의 무대가 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굳이 그곳으로 간 까닭에는 아래와 같은 사연도 단서가 되지 않을까요.

70년대 중반 손경석은 한국의 산을 일본에 기고하면서 마지막 교정작업을 위해 일본에 갑니다.

그때 만나서 작업을 한 곳이 군마현 쿠사츠에 있는 이이야마 다츠오의 서재인데,

이이야마 다츠오의 고향이 니기타현 이이야마시입니다.

 

온건하게 추론하자면, 엄흥섭과 김정태 등은 이이야마 다츠오에게 스키유학을 어디로 갈지 물었겠죠.

이이야마는 그때 유자와를 추천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대체로 조선산악회 내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냉정하지 않았을거라 봅니다.

다른 취미모임에서 염두에 두어도 말이죠.(물론 어디든 나쁜 가이삭히는 있는 법이고요)

 

그런데 맨 밑 요코야마씨 ㅁ당금 24엔... ㅁ 이 무슨 글자일까요? 혹시 아시는 분께 부탁드립니다.

용돈이라는 뜻일지...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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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근대 알피니즘의 방식과 내용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을 통해 이식된 것입니다.

일본 산악계는 초창기부터 영국에서 유래한 스포츠맨쉽, 알피니스트쉽 정신이 강했을거라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일본 산악계의 형성에 영국의 월터 웨스턴의 아우라가 강했고요.

아이거 동산릉을 세계 초등한 그 유명한 마키 유코가 있는데, 그에 앞서

유럽에 유학을 가서 유럽 알프스에서 그들과 교류하고 등반을 한 선구자적 활동을 한 일본의 산악인들이 많았습니다.

유럽의 산악인들과의 교류와 산악정신을 소개하고 또 유럽의 산악문학의 번역작품을 통해 그렇게 읽고 배웠을 겁니다.

'우정'에 관한 한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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