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 보론) 왜 등행단은 1942년 만들어졌을까?
국민체육진흥회 국방훈련부 소속의 '등행단'의 스탭으로
조선산악회내 김정태와 여러 조선인 산악인들(백령회원들)이 활동합니다.
여러 산을 올랐고, 백두산만 놓고 보면 1944년까지 3회에 걸쳐 스탭으로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합니다.
백두산을 찾은 등행단원들은 산악인들도 아니고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기에 그들의 역할은 그만큼 더 중요하죠.
그들의 활동은 등행단에서 칭찬을 들을 수 밖에 없고, 김정태는 스스로 평하기를 조선인 유일의 간사로서
'등행' 보고서에 단장이 공식적으로 거명하면서 감사를 표하기도 합니다.
등행단이 꾸려진 건 1942년입니다.
그 시기가 딱 그러해야 할 때입니다.
등행단의 성격이 오롯이 드러나는 거죠.
등행단은 전국규모의 단체를 지향했습니다.
목적이 '등행 연성' 즉. 등행을 통해 심신을 인고단련하고 육성하여 다가오는 총력전에 대비한다는 거니까요.
드디어 일본 내각에서 1942년 5월 조선인 징병제도를 의결합니다.
심지어 조선군 사령관과 조선총독도 시기상조이다 반대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제 일본어도 잘 못하고, 내선 일체도 잘 되지 못한, 즉 '준비가 전혀 안된' 조선인들을
'야마토 민족의 청년'을 한명이라도 아끼기 위해 전쟁에 투입되는 건 시간 순서입니다.
부산부에서도 등행단 연성회가 꾸려졌다는 부산일보 소식입니다.
당시 부산일보는 지금 부산일보하고 격이 다르죠.
부산에 상주하는 일본인의 숫자나, 부산의 위상이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을테니까요.
경성의 일간지하고 판매부수가 비슷했다고 읽은 기억이 납니다.
'부산체육진흥회에서 제1회 등행단 연성회가 10월 4일 시행되니 다수의 참가를 희망한다는 공지글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실린 당일 지면을 보면....
이렇습니다. 전체가 '전쟁'관련 기사입니다.
1942년 9월이면, 도하 각급 신문에서는 연전연승이라고 도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참패의 연속이었죠.
하단에 빨간 색 박스가 등행연성회 소식입니다.
등행단이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당시 사람들에게 처음 접하는 등행이라는 말은 등산+행군의 준말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연성'이 '연마 육성'의 준말이듯이 말이죠.
이렇게 하여 등행단은 전국에서 발족되고, 1942년 뉴스를 장식하게 됩니다.
이윽고 1944년부터 조선인들은 1924년 갑자생들부터 징병에 들어가게 되죠.
'묻지마라 갑자생'들이죠.
덧붙여)
일제 황민화 정책 중 창씨개명과 내선일체 조선어 교육 폐지도 심각한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젊은 조선인들이 사지로 나가는 '징병'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비할 바 없는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924년 갑자생과 1925년 을축년에 태어난 이들은 지지리도 불쌍한 사람들이죠.
1944년에 갑자생부터 줄지어 황군에 징병되고, 1945년에 을축생들이 끌려갑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그들은 5년뒤에 6.25 전쟁이 터지자 또 국방군으로 인민군으로 차출 자원됩니다.
이후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또 극심한 전후 혼란과 보릿고개를 넘어면서 청춘이 싹트지도 못하고 끝납니다.
산악계에 김영도 선생님이 24년 갑자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