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백령회는 조선산악회에 가입했을까?
백령회는 왜 '굳이' 조선산악회에 가입했을까?
조선산악회에서 가입하고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이 글에서는 그들이 명문(?)의 조선산악회에 가입할 자격을 어떻게 해서 갖게 되었고,
누가 어떤 논리로 가입을 했으며, 그 과정과 이후 행보는 어떠했는지에 관한 시론((試論)이다.
결론은 이렇다.
나는 그 시기를 1941년 봄이라고 보는데, 김정태가 조선산악회 가입논리를 제공하고 주선한 걸로 보인다.
그 결과는? 한국산악계가 취하는 기존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의 선택은 잘한 것이고,
그들 개개인의 청춘의 등반 이력을 놓고 보아도 잘한 것이라고 본다.
* 이 글 역시 선행연구가 없고, 자료의 부족과 과문까지 하여 단순한 추측과 강한 추정이 뒤섟이고, 오류와 억측이 스프 역할을 할 것이다. 시론(試論)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향후 관심 있는 이들이 길을 걷는 마중물 역할을 하면 좋겠다.
김정태가 합류하기 전 백령회가 성취한 최고의 등반은 1940년 10월 주봉 후면 K크랙 초등반이다.
이 등반은 해방전 서울 근교, 북한산에서의 최고 난도의 등반이기도 했지만,
이후 일제하 조선인 등반사에 있어서 그 의미는 적지 않다고 본다.
첫번째, 조선을 대표하는 클라이머로 자부했을 김정태가 백령회를 알게 되고 합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둘째 1941년 봄 엄흥섭, 주형렬, 양두철 등이 조선산악회에 가입하게 된 결정적인 '자격'으로서도 기능했을 것이다.
김정태는 당대의 난제였던 주봉 후면 크랙을 초등한 조선인 산악인들 소식을 듣고 아마 깜짝 놀랬을 것이다.
김정태가 이 쾌거를 들은 것은 아마 등반 파트너였던 제화공(製靴工 -구두만드는 직공)인 와타나베 엄에 의해서였다. 와타나베라는 구두방에서 등산화 장인으로서 활약했기에 당시 일인과 조선인 그리고 서양인을 막론하고 등산화를 갖고 싶은 이들의 중심에 있는 그를 통해서 소식이 날라 다녔을 것이다.
이후 김정태는 와타나베 엄의 소개로 만장봉에서 백령회 리더 엄흥섭 일행을 만나, 즉석에서 의기투합을 한다.
(*지금 당장 연도를 정확히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겠다.)
이후 그들은 1940년 11월 3일 백령회는 이른바 인수봉 민족 대집단 등반을 꾀한다. 이날 김정태의 일기 번역본(조장빈 촬영, 안치운교수의 제자 번역)에 자세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들이 11월 3일로 날을 잡은 까닭은 다음카페 한국산서회에 안치운 교수가 쓴 "책읽기 12-1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 - 한국 등산운동의 60년사를 밝힌다- 기억의 내러티브"를 참고하면 좋겠다.
당일 성공적인 등반 후 하산하여 다방에서 김정태는 엄흥섭 등 백령회원들과 몇몇 처음 보는(!) 반도산악회 리더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김정태의 당일 일기를 보면 다른 사람들 특히 엄흥섭은 새로운 '독립된' 조직을 원하는 듯 한데, 김정태는 현시기에는 조선산악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접근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내부자'입장의 김정태의 논리는 이렇다고 본다.
첫째, 내가 보니, 조선산악회 알고보면 흑싸리 껍데기이다. 우리가 들어가 쪽수로 헤게모니를 장악하자.
둘째, 내가 보니, 인수봉이나 선인봉은 개척시대는 끝났다. 그건 재미로 할 것이지, 진정한 산악운동이 아니다.
세째, 내가 보니, 백두산과 금강산과 같은 설산 거벽이 시대적 추세이다. 다들 그쪽으로 몰려가더라.
그런데 특히 조선인이 그곳에 가려면, 허가가 필요하고 그럴려면 조선산악회에 가입해야 한다.
김정태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산악인들의 조선산악회 가입은 나쁘지 않은 수순이다. 왜냐하면, 중일전쟁 이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일본인 젊은 클라이머들은 징병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이야마 다츠오는 이미 노쇠했고, 경성제국대학생 이즈미 세이이치는 38,9년 징병된다. 다른 젊은 일본인들도 마찬가지 신세였을 것이다. 이때 징병에서 자유로운 조선인들이 다수 가입하여 록클라이밍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그의 판단은 꽤 현실적이다.
이후 그들의 등반행보를 놓고 보면 김정태의 판단과 엄흥섭의 결정 이른바 조선산악회내 '진지전'을 펼친 것은 제대로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독자행보를 하기로 했다면, 기껏 인수봉 선인봉에서 루트 개척 몇개 더하는 걸로 해방을 맞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듬해 1941년 여름이 되기 전 조선산악회에 가입을 한다.
1941년 7월 조선산악회 월례 모임에서 동계 백두산 종주를 회의 목표로 결정하고,
조선산악회는 그 대원으로 조선인 김정태, 양두철, 주형렬 등을 선정한다.
1941년 12월~ 1942년 1월 마천령 대종주에 성공하며 자신감을 확보한다. 이후 많은 등반을 한다.
1942년 봄 발족한 등행단의 핵심 스텝으로 발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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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백령회의 활동이라고 보고 있는 이후 행보들 - 백두산의 마천령 산맥 대종주-, 그 험악한 시기에 금강산 백두산 등지에서 계속해서 등반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백령회'라는 듣도보도 못한 산악회로서는 절대 불가능했고, 조선산악회의 후광아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김정태는 처음에는 백령회끼리 백두산 동계 등반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낭설이다. 국경 등반 특히 비적이 바글바글하다는 백두산 등반은 '자국민 보호' 원칙상 당연히 총독부의 허가사항이고, 백령회라는 듣보잡 타이틀로는 애시당초 꿈도 못꾸었다. 김정태는 이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조선산악회와 제휴하여야 했다고 하는' 부분은 코메디에 가깝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2000년대 개명된 사회에도 인수봉 등반을 하거나 설악산 울산바위등 각종 암릉을 오르려면 허가를 받아야 할 때도 있었던가. 자국민 보호, 안전 때문이라고 하던가.
이들은 이후 조선산악회의 '강력군'으로서 1942년 1월 마천령대산맥 종주를 이끌고, 금강산을 넘나들며 많은 개척을 한다.
1942년 창설된 조선체육진흥회의 국방훈련부 등행단의 핵심스텝으로 활동한다.
등행단은 조선총독부 고위급인 후생국장(지금의 체육부,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추정)이 단장을 맡아 진행한 대동아전쟁의 총후(總後)의 성격이었다.
산악운동을 전쟁훈련으로, 산을 전쟁훈련장으로 보는 단체이다.
특히 1942,3년 7월 백두산 등행단에는 상당수의 백령회 출신들이 스탭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등행단에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보성전문(현 고려대산악부)와 양정중학교 산악부들도 함께 한다.
등행단에서는 거듭 조선산악회와 특히 이시이, 이이야마 다츠오 그리고 김정태에게 감사의 글을 남기기까지 한다.
백령회 출신의 조선인 산악인들이 조선산악회의 학술연구, 군관계 그리고 등반팀 중 등반팀의 주력군이 된 것이다.
1940년대 백령회 말고는 다른 조선인 산악인들은 주말에 겨우 인수봉이나 오르내리거나 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백령회가 그나마 서울 바깥의 백두산, 묘항산, 개마고원, 금강산, 설악산에서 활동할 수 있는 물적토대 또는 이면은 이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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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백령회원들은 조선산악회가 의외로 허깨비인 것도 발견한다.
회장이야 경성제대 교수이지만, 그들과 교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같은 레벨의 암벽등반팀이 대상인데, 등행단에 동참할 젊은 일본인 회원들이 없다.
연보는 나오지 못하고, 회보도 격월간 또는 계간 성격으로 나왔을 뿐이다.
그 속에서 회의 운영 시스템을 많이 보고 배운다.
그것을 토대로 동시에 '은밀히' 그들은 조선인들끼리 백령회 활동을 이어나간다.
금요연구회를 만들어 '조선산악회' 급의 활동을 펼치려 한다. 기상학도 토론하고, 촬영술, 동식물학, 스키연구 등등 지금 그 어떤 명문 산악회도 감히 하지 못하는 광범위하고 학술적인 활동까지 망라한다.
금강산 등에서 뛰어난 등반을 한다. 물론 당시 공식적인 타이틀은 조선산악회원이었겠지만, 젊은 일본 산악인들이 없는 판에 조선인산악인들 밖에 없어서 해방후 그들은 백령회라는 타이틀로 굳이 바꾸어도 무방했다.
일본에 엄흥섭이 자비를 들여 4명의 회원을 스키연수까지 보낸다. '장래'를 도모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엄흥섭은 리더의 스타일로 보인다. 김정태는 기획력, 추진력, 친화력에 있어서 뛰어나고 그들은 잘 맞았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일본인들보다 더 뛰어난 조직, 기획, 운영과 등반을 해낸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이 조선산악회내에서 보고 배운 것이고, 그들을 대체할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의 표출일 것이다.
이 '자부심'이 해방후 김정태의 각도로 보면 '민족애'이고, '민족경쟁'이고 '독립'을 꿈꾸는 것으로 분식되게 된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다행히 엄흥섭 덕분에 징용을 피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만 갑자기 해방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등반을 계속할 것인가.
어떤 등반을 할 것인가?
어떤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