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22) 그들의 첫만남은 어떻게 1940년이었을까

카테고리 없음|2021. 1. 19. 10:43

오늘의 의문 ㅡ

 

일제시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하기 쉬웠을까?

우리의 상상과 달리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어에 능통하면 고향,  출신국가를 속여도 그런가 싶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일제시대를  세세히 안다고 할수 없다. 오늘은 더  희안한 의문을 품어본다.

 

 

김정태는 1930년대 내내 풀타임 클라이머로서 인수봉 노적봉을 종횡무진한다.

엄흥섭, 양두철, 주형렬 등 백령회도 1937년 창립하여 열심히 활동했다고 하는데,

김정태 팀과 엄흥섭 팀은 1940년 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서로 만장봉에서 만난다고 하고 있다.

이게 가능한 씨추에이션일까?

 

클라이밍이라는게 무당파처럼  남이 알세라토굴 속에서 용맹정진한 것도 아니고,

북한산 국립공원이 그리 넓은 것도 아니고,

당시 바윗길은 모두합해서 열개정도는 되었을려나..

 

196,70년대 산밑자락에서 인수봉에 매달린 클라이머가 빨간양말이면 누구인지 알았다고 하는데,

해괴한 일이로고.

 

 

김정태의 자일 파트너였던 엄흥섭(와타나베 엄)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보자.

 

와타나베 엄흥섭은 무학(無學)의 뛰어는 제화공(구두만드는 직공)이지만, 뛰어난 등반력과 사교력을 지닌 걸로 보인다.

 

등반력에 관해서 손경석은 어떤 글에서 '김정태보다 낫다고 하고까지 한다' 모르긴 몰라도 맞을 것이다.

클라이밍은 손아귀힘(아구힘)이 좋아야 한다.

망치와 실을 다루어야 하는 제화공으로 어려서부터 잔뼈가 굵은 엄흥섭은 분명히 손힘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백령회 3인방 중 주형렬이 암벽등반이 능하고, 김정태는 고산설산에 강하다는 말도 있는데,

이 말도 뒤집어 보면 김정태의 자일 파트너 시절 엄흥섭의 클라이밍 능력을 엿보게 한다.

오늘은 엄흥섭의 사교력을 보자.

이른바 인수봉 민족적 대집단 등반이라고 하는 1940년 11월 3일 등반을 창안한 이는 백령회 리더 엄흥섭이었는데,

김정태는 일기에서 또다른 기획자로 제화공인 아마도 무학자일 와타나베 엄을 언급하고 있다.

이거 무슨 상황이지.

 

놀라운 일은 계속된다.

 

이 사건도 리더 엄흥섭이 기획안을 꺼낸지 단 며칠만에 60명 넘게 인수봉에 모였다.

스마트폰도 없고, 일경이나 일본인 산악인들 모르게 '은밀히' 했다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바로 와타나베 구두점에 근무하던 '마당발' 와타나베 엄이 연락책 역할을 해서일 것이다.

등산세계의 한 허브는 등산화일텐데, 그는 상당히 발이 넓고 사교술도 좋았던 인물로 여겨진다.

그런 까닭에 무학의 그에게 '기획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주고 연락을 부탁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계속된다.

 

그런데도 그날 인수봉에 오른 60여명은 서로 전혀 몰랐던 사이라는 거. 놀랍지 않은가? 

김정태가 당일 일기에서 '곁눈질을 해 가면서' 올랐다고 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짐작하기론  김정태는 조선산악회 회원들하고만 등반을 했고 자기는 최고라는 권위의식이 있어서

여느 조선인 산악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어서 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안면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6,70년대 클라이밍을 한 분이 이 상황을 설명좀 해주면 좋겠다.

박인식의 '사람의 산'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산입구에서 바위에 붙어 있는 친구가 빨간 양말을 신었으면,

'누구인지' 다 알았다고 할 정도로 작은 세계였다고 한다.

 

1940년 당시 60여명이 하루 아침에 모일 정도로 록클라이밍은 대중적이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서로간에는 전혀 몰랐단 말인지요?

당시는 바위가 기껏해서 도봉산 선인봉, 북한산 인수봉과 노적봉이 거의 전부인데 이상한 표현 아닌지요?

그리고 북한산은 민둥산에 가까웠고 당시 사람들은 시력도 좋아 더 잘보였는데 말이지요.

 

 

이 모든 걸 이해한다고 해도 결코 이해되지 않는 사실 하나.

엄흥섭 양두철 주형렬도 그들에 의하면 1937년경부터 야심차게 등반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테르네에서 김정태는 1941년(?) 봄( 1940년 봄의 오기로 보임. 인용자주) 만장봉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고 있다.

그 4년 동안 그들은 과연 각각 어디에서 등반을 한 것일까?

무직이었던 김정태는 풀타임 클라이머였고, 그래서 시즌이면 매주 노적봉과 인수봉 등을 올랐던 걸로 보인다.

 

경성 '산악계'에서 김정태 모르면 간첩이어야 한다.

엄흥섭이 1940년 대집단 등반을 기획하고 김정태에게 도움을 요청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정태 팀하고 엄흥섭 팀하고 그 오랜 시절 '우연히' 마주치지도 않는 상황,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아니면 그들은 평행우주론에서 그러니까 두개의 다른 인수봉에서 등반을 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뻔한' 거짓말을 한 것일까?

텔미 썸씽

 

 

나의 결론: 

 

첫번째로는  양쪽다 옳다고전제한다면 말이다.

김정태가 완벽하게 일본인 행세를 했을 수가 있다. 

(일제때 이런 사람 많았다) 일본어에 능통한데다 조선산악회 회원들과 어울렸으니 말이다. 

 

이건 얼토당토한 궤변이 아니다. 해방후 모여든 조선인 클라이머들 중에는 ' 일인들하고만 어울린 클라이머'도 있었다고 손경석은 적고 있는데 김정태를 염두에 두고 말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이 추측에 흠결이  딱하나 있는데, 김정태의 용모가 잘생긴 북방계형이라는 거.  인수봉에서 조선말을 구사하는 조선인 클라이머들- 엄흥섭,주형렬,양두철등- 은 정상에서 만나더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말았을 것이다

 

두번째로,

엄흥섭 팀이 '씌여진대로'  1937,8 년부터 인수봉을 올랐다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라테르네'(1952년)의 김정태의 진술이 옳다고 본다.

 

1930년대 내내 인수봉에 살았고, 네임밸류가 있던 김정태와,

1939년(또는 1940년) 가을 주봉 후면 K크랙을 초등하며 고고성을 알린 엄흥섭 팀이 1940년 처음 만나는 시나리오라면,

 

엄흥섭 팀 다시 말해 백령회가 1937년부터 활동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1939년 봄 경 중원에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검객, 엄흥섭, 주형렬, 양두철은 도원결의를 했을 것이다.

다행히 발군의 기량을 가진 신예 주형렬이 1939년 늦가을(또는 1940년) 주봉 프로젝트를 성공해 버린거고.

김정태는 그런 소문에 깜짝 놀라 와타나베 엄을 통해 만남을 부탁하고,

 

1940년 가을 만장봉에서 첫 대면을 하고.

1940년 11월 인수봉 대집단 등반 프로젝트를 성공하고

1941년 봄 조선산악회에 대거 가입하고

1941년 12월 문제의 백두산마천령대산맥종주를 조선산악회 이름으로 성공하고....

 

* 손경석의 한국등산사와 손재식의 한국바위열전에는 후면 크랙이 1940년 10월 초등했다고 적고 있다.

39년일지, 40년일지 '김정태의 일기'를 확인해 보아야겠는데, 40년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초등소식을 듣자마자 와타나베 엄을 통해 곧바로 김정태는 엄흥섭과 만난다.

그 결과가 11월 3일 인수봉대집단 등반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진실은 나의 추론에서 그리 멀지 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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