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의 실종을 알린 시노다 지사쿠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백두산 정계비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본인은 시노다 지사쿠입니다. 백두산 정계비에 관해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시노다 지사쿠의 얼굴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로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됩니다.^^
시노다 지사쿠는 얼굴을 몰라도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동경제대를 나와 이왕직 장관에 이어 경성제대 총장을 역임할 정도로 식민지 조선에서 누릴 것은 다 누렸죠.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자료실을 검색해도 흐릿하지만 그의 얼굴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또렷한 사진으로 그의 풍채를 볼 차례입니다.
일제 관료 조직의 정점은 천왕이 직접 임명하는 친임관입니다. 식민지 조선에는 총독과 정무총감 딱 두명일 뿐입니다.
(군대로는 조선 주둔군 사령관과 육해공군 대장이 친임관) 이왕직 장관은 명목상이긴 하지만, 일본 천왕이 직접 임명하는 친임관이었다고 합니다. 경성제대 총장은 친임관 아래인 최고위급 칙임관입니다. 그렇지만, 총독이 대학을 내방해도 출영하지 않을 정도로 권위가 높았습니다.
우리가 시노다 지사쿠를 알아야 할 포인트는 이런게 아니라 백두산 정계비의 실종과 관련해서입니다. 백두산 정계비에 관한 책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출발은 바로 이 "간도는 조선땅이다"라는 제목의 지사쿠가 쓴 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두산 정계비 실종사건의 출발점인 시노다 지사쿠의 사진조차 첨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인즉슨 백두산 정계비 실종사건에 관한 이제까지의 많은 글들은 단견, 오류, 대중과의 영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때 주간경향에서 치열하게 파헤친 적도 있는데, 그 논조는 이렇죠.
백두산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역사적 숙제 2개가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백두산 정계비가 과연 어디로 사라졌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정계비를 세웠던 주춧돌만 남아 있다. 정계비는 1931년 7월28일에 없어졌다. 만주사변(1931년 9월)이 발발하기 직전의 일이다. 시노다 지사쿠가 쓴 <백두산 정계비>의 서문에 이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시노다의 지인이 이때 백두산에 올랐다가 이튿날 아침 그곳에 정계비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시노다에게 알린 것이다. 이 지인에 따르면 7월28일 그곳에는 일본 국경수비대 100여 명과 일반 등산인 56명이 있었다. 시노다의 글투로 볼 때 일본 국경수비대가 정계비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다.
유수의 글들이 모두 오류를 보인 까닭은 시노다 지사쿠가 실종 관련해서 쓴 서문의 글을 팩트체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냥 그의 말을 받아쓰기 하다보니 그 이후 스텝이 모두 꼬이고 엉망이 되는거죠.
그러나 이 판단은 대부분 오류라고 보여집니다. 저는 작년도 한국산서회 회보 '산서'에 관련 글을 투고하였습니다. 언제 인터넷에 전문을 올리도록 할까 합니다.
오늘은 시노다의 풍채를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 이 사진은 영친왕 부처가 유럽순방할 때의 사진입니다. 이때 스위스에서 나혜석을 만나기도 했죠.
그때 단체사진인데, 앞줄 오른쪽 첫번쨰가 저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시 순방을 수행한 시노다 장관의 모습입니다. 풍채좋은 사람이군요. 학자로 보아도 풍채가 좋고, 관료로 보아도 장관감입니다....
백두산 정계비 관련해서 소소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합니다. 시노다가 누구인지부터 출발해야 제대로 된 연구일테니까요. 안타깝게도 백두산 정게비 실종사건에 관한 그의 서문과 이후 강단의 유수의 학자들의 받아쓰기는 오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산을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다행히 한국에는 등산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사진은 "영친왕과 골프"기사에서 가져왔는데요. 시노다 지사쿠라고 명시한 책은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아 안나네요. "영친왕의 정혼녀"라는 책이었던가. 찾으면 추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