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의 ‘답설야(踏雪野)’... 과연 옳은 길인가?
새벽에 잠을 깨 서산대사의 그 유명한 시 ‘답설야(踏雪野)’가 문득 떠올랐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그런데 새벽의 정조는 '나또한 그렇게 똑바로 살자'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이런 글 읽으면 뭔가 있어보이고 삶의 경책이 되고 그랬는데,
그날 새벽은 이 글이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야 똑바로인지 함부로인지 알 수 있겠지만,
그런 순결하게 눈덮인 들판이 도대체 누구 앞에 펼쳐져 있는가.
수많은 발걸음이 이리저리 포개져 있는 게 인생도처의 상수(常數) 아닌가.
그런데 대선사가 갈파한 똑바로 걸어야 할 이유가 '법등명 자등명'도 아니고,
정언명령이라 하던가, 칸트적 양심도 아니고.
후세 사람들의 이정표, 어쩌면 '눈이 무서워'서라는 건 최상선일까?
요즘 어떤 위인의 삶을 기리고 실제로 따르는 이 얼마나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다가,
이정표가 되려면,
눈길을 이리저리 흔들리며 걸은 흔적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유아론적인 생각이 이어졌다.
매순간 우리가 똑바로 산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마음의 소리'가 들리고 이를 따르면 될까.
양심의 소리와 후대의 이정표라는 공리가 서로 상충된다면 어떻게 걸어야 할까?
조선시대 스님들은 천대받으면서도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자 발심한 이들이다.
그 젊은 승려들에게 임진왜란이 닥치자 서산대사는 칼과 창을 들어 살인의 길을 걸으라고 강권했다.
이 독려는 과연 조선사회에 똑바른 것일까?
호국불교라는데, 부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것일까?
임란이 끝나고 젊은 승려들은 살림살이, 대접이 좀 달라졌을까?
'피난만 다니던' 양반놈들이 적반하장으로 승려들의 반붓다적 행보를 두고서 비웃지는 않았을까?
이 시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백범 김구가 삼팔선을 넘어갈 때도 이 시를 남겼다고 한다.
그가 넘어간 길은 혼돈의 시대에 어떤 길이었을까? 이정표일까, 난수표일까.
그 길이 성공하건 아니건 과연 '자기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만 한다면 똑바른 것이 되는 걸까?
선생의 궤적이 후대인에게 사표가 되는 건지 아닌지 후대에 재정립되는 건 아닐까?
우리가 따를 백범의 이정표는 백범의 '고뇌'일까? 아니면 고뇌의 '결과', 즉 백범의 행보일까?
우리는 고뇌없이 그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면 될까? 그러면 무뇌충이라 불리지 않을까?
'고뇌'를 배운다는 건 곧 매순간 우리의 길을 '흔들리며 걸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아니 무엇이 똑바로 걷는 것이고, 무엇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일까?
이런 유치하고 허황하고 정신사나운 생각에 시달린 새벽이다.
그후 알고 보았더니.....
답설야가 과연 대선사의 작품일까 의문을 도저히 참지 못하여 검색을 해 보았더니...
한양대 정민교수에 의하면,
이 작품은 서산대사의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평범한 유생 이양연의 작품이란다.
그러면 그렇지...
이 시가 상구보리의 길을 걷고자 하는 스님이 쓸 시일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김구 선생도, 김대중 대통령도 이런 시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건 좀 그렇다.
'옳은 길을 걷는 까닭이 기껏 후세인의 이정표가 되기 위함이라니...'
조선시대는 양반을 위한 사회였고, 양반들이 임란전에 전체인구의 삼십퍼센트가 되었다던가.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 인구가 천만명이었다면 300만명이 양반네였을테고, 한 100만명이 성인남자라고 하자.
그 중 조선정권의 운명과 자기의 운명을 겹쳐서 읽거나,
자기나라를 지키기 위해 임지를 떠나지 않거나, 총칼을 들거나, 의병들에게 양식을 제공하거나, 사노비를 무장시켜 내보내거나 한 이들 얼마였을까? 역사는 얼마나 기록하고 있을까? 궁금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