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만리동 김씨, 김인의씨 이름도 기억해 두자.

카테고리 없음|2021. 1. 28. 11:15

인수봉, 우이암 그리고 만장봉에 언제 처음 하강용 피톤을 박았을까?

해방후 전문 등반에 심취한 안광옥 선생의 구술조사보고서에 단서가 있으려나 싶은데, 책이 안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일제시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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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내 김수길 사장과 변완철을 합쳐놓은 듯한 인물. 만리동 김씨, 김인의씨도 기억해 두자.

그는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놀라지 마시라,

6.25전쟁 전 이미 우이암과 인수봉 그리고 만장봉에 하강용 피톤을 박았다.

 

모래내 김수길 사장. 그는 우리나라 1세대 산악장비 1세대 제작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1967년 일본 북알프스 원정을 다녀온 동국대 산악부 오영복이 건네준 피켈과 자료 등을 보고

전문등반장비 제작에 몰두한다.

오늘날 그의 피켈은 전설로 남아 백만원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화려한 전설의 이면이 대개 그러하듯, 그의 말련은 극히 외로웠고 힘겨웠다.

 

뺑코 변완철, 만년구조대장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

해방후 인수봉과 우이봉 등에서 안전을 위해 수많은 하강볼트를 박았다.

"악돌이"의 박영래 기자는 1984년 4월호 "평생 산악구조대장 잠들다"라는 추모기사에서

"그는 조난과 구조에만 앞장 선 것이 아니라 산악사고 방지를 위한 일에도 앞장서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운대 오름길의 쇠줄인데, 이것은 그가 1947년 당국에 애걸하다시피해서 쇠줄을 받아 손수 매놓은 것이다. 그 후 6.25가 나기 전 인수 후면과 우이암엔 하강용 피톤을 직접 박아놓기도 하였다"

 

 

이 둘을 합친듯한 인물 김인의씨가 있다.

해방 후 50년 6.25 전쟁 전의 이야기이다.

만리동에서 대장간을 하면서 직접 만든 하강볼트를 역시 곳곳에 박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1932년 태어나 해방 후 명문 경기중 산악부에 입회한 김영윤에 의해서만 기록된다.

김영윤은 2001년 산행에세이집 "산으로 가는 마음"을 세상에 내보이는데,

동년배의 손경석과 달리 당시 산악계 풍경을 알 디테일이 그리 많지 않아 약간 아쉽다.

 

그 중에 그가 아니었으면 기록되지 않을 인물이 있으니 바로 김인의 사장이다.

 

만리동 김씨의 본 이름은 김인의씨이다. 

김인의씨하면 클라이머들은 그 사람이 박아 놓은 피톤에 자일을 걸고 내려오면서

그 피톤에 적힌 김인의라는 글자를 본 사람이 많을 줄 생각한다.

 

십여년 전 그러니까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중고등학교 산악부에 들어 처음으로 산에 미치다시피하여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찾아다니던 시절에 우리는 김인의씨의 적은 체구며 그 허스름한 세미 룩색에 시멘트와 물을 넣어 가지고 인수병 후면, 만장봉 또는 우이암으로 다니던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하강할 때에 자일을 걸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바위를 파내거나 또는 나무에 감고 내려오곤 하였으나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던 일이 생각난다.

김인의씨는 대장간의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튼튼한 피톤을 손수 두들기고 불에 달구어서 강도를 테스트한 다음 그것을 짊어지고 산으로 왔던 것이다.

김인의씨는 뚜렷한 학벌도 또는 사회적 지위도 없어 보이는 하나의 대장장이였다.

그러나 자기가 사랑하는 산에 대하여 어떤 빚을 갚는 심정으로 그는 말없이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안전한 피톤을 바위에 박아 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피톤은 그 많은 비바람을 겪고 수많은 후배들이 안전하게 하산하는 것을 보면서 김인의씨와 더불어 만족할 것이다.

 

 

 

 

잠정 결론:

젊은 박영래 기자는 " 변완철은 6.25가 나기 전 인수 후면과 우이암엔 하강용 피톤을 직접 박아놓기도 하였다" 고 하고 있다.

 

같은 시기 김인의씨도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시기 하강용 피톤을 박았다고 김영윤은 기억하고 있다.

 

당시 여러군데는 아니고 아무래도 각각의 암봉에 두개 세개도 아니고 하나씩이었을 텐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누구의 말이 맞을까?

내 짐작에는 김영윤의 진술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피톤에 박혀 있는 이름이 김인의씨이고, 그 현장을 직접 보았다고 하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인수봉, 만장봉 그리고 우이암 등에 처음 하강용 피톤을 박은 건 해방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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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만장봉 우이봉을 오를 때 하강 포인트에서 한번 눈여겨 보아야 겠다.

아직도 남아 있으려나.

혹시 어느 눈밝은 이에 의해 그의 이림이 적혀 있는 피톤이 사진에 담겨 있으려나.....

 

 

 

 

 

 

September 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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