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고의 김교신과 황욱은 과연 친했을까?

카테고리 없음|2021. 1. 29. 11:09

'1930년대 양정고 산악부를 이끈 김교신선생과 황욱 선생은 서로 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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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양정고 산악부는 학생산악부의 중심이라고 하겠다.

물론 보성전문학교나 연희, 세브란스 전문학교에도 산악부는 있었지만 그들의 기록은 만나기 어렵다.

설령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양정만큼 전문적이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활동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양정고 산악부의 핵심은 김교신 선생과 황욱 선생이다.

양정고산악부원들은 두 선생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함께 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자료를 통해 보면 김교신과 황욱은 서로 잘 알거나 교류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새로 접한 자료는 김교신 선생의 "김교신 일보"이다.

그런데 교회측과 양정고산악부측은 서로 자료를 참고하지 않는 듯 하다.

오늘 그래서 그 예를 보면서, 당시 내밀한 디테일 하나를 들여다보자.

 

김교신은 일기를 두종류를 썼다.

좌측의 김교신 전집 중 일기(총 3권)은 성서조선에 실려 있던 일기를 모은 것으로 일제의 검열을 필한 것이다.

오른쪽 김교신 일보는 김교신이 대외적으로 보일 의도 없이 내밀하게 쓴 일기를 모은 것이다.

아쉽게도 무레사네 활동을 막 시작한 후 1934년 8월에 끝을 맺어 아쉽다.

 

아무튼 둘 사이엔 차이가 그래서 있다. 김교신 일보는 보다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을 것이다. 

 

1934년 11월 11일 김교신 전집의 일기에는 양정고생도 140여명과 북한산을 찾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산행이 어떤 성격인지, 모임을 주도한 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일기만 통해보면 김교신이 양정고보 학생들을 이끈 걸로 짐작하게 된다.

 

참고로 김교신은 일기마다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적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황욱 선생의 이름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김교신 일보"를 보자.

 1934년 11월 북한산 백운대에서"라는 사진 한장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양정 등산부. 1934년 11월 11일 북한산 백운대에서.

성조통신을 참고하면 이 모임은 일요일마다 김교신이 인솔하였던 물에산에 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여학생 약 140명"

 

 

양정산악부가 아니라 양정등산부라고 하고 있고, "물에산에 회"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참여학생이 너무 많다. 

김교신이 이끈 무레사네회는 1,20명을 넘지 않는다.

 

이제 사진을 보자.

 

 

늦가을 교복을 입은 140여명의 인파가 북한산 백운대를 찾았다. 엄청나다.

 

이 사진은 북한산 백운대 관련해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우선 이쪽에서 찍은 사진으로는 처음 본다.

 

1번 쇠사슬은 1927년 가을에 만든 것으로 전모를 보여주는 걸로는 처음이다.

2번. 수없이 많은 페인트칠로 자기 이름을 써 놓았다. 그 중에는 중촌(中村)이라는 글자로 여겨지는 것도 있다.

산에 낙서하는 건 지금 한국인들의 나쁜 습벽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석수가 돌을 파서 이름을 새겼다)

일제시대때에는 일본인들도 짜증날 정도로 페인트칠을 했다.

 

3번의 하얗게 된 부분은 언제 백운대에 갈 기회가 있으면 살펴보고 싶은데,

1927년 쇠사슬과 돌계단을 만들면서 그 사업의 취지와 시주자들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여기가 아닐까 싶다.

 

이제 양정산악부측의 기록을 보자.

"양정산악 70년"에도 다행히 그날의 기록이 있다.

 

11월 11일 "정신작흥주간"행사의 하나로 희망자를 모아 교사지도하에 등산모임을 가졌다.

 

정신작흥주간이라는 게 좀 거시기해서 일제의 황민화 정책, 총동원령과 관련이 깊다.

바로 그 전해인 1933년 시작되었다.

조금 더 필요한 부분은 검색을 통해서 가져올까 한다.

 

아무튼 이날 

 

2학년 박희숙이 산행기를 '일본어'로 양정고 회지에 실었다.

 

"정신작흥주간을 맞아 의지를 단련할 목적으로 우리 학교에서는 뜻있는 자를 모아"라고 적고 있다.

 

'정신작흥주간'. '의지 단련'의 목적으로라고 적고 있다.

일제 총독부의 정책에 찬동한다는 뜻이다.

"뜻있는 자를 모아"이 말은 이날 등산은 전적으로 자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뜻일게다.

 

양정고생들은 갈 수도 있었고 안갈 수도 있었다.

김교신 선생과 황욱선생은 다른 선생들처럼 갈 수도 있었고 안갈 수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은 민족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갔다.

 

"그 전날 황선생님으로부터 등산요령을 배우고"

-이날 산행을 주도한 사람은 김교신이 아니라 황욱이다.

다음 글에서도 "황욱"을 떠받든다. 그가 이날 산행의 리더임을 알 수 있다.

말미에 김교신은 '김선생님이 아 깨끗하다고 절찬하고 계시다"라고만 적고 만다.

 

자 이제 위에서 두개의 문장을 보자.

김교신은 이 모임을 주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건 차치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황욱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모임은 정신작흥주간의 산행이라 일제 총독부가 "성서조선"을 검열한다 하더라도 '꿀릴게(?) 없는 터이다.

 

교회측 기록인 "김교신 일보"에서는 양정산악회지를 참고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김교신 일보는 상세한 각주가 좋다. 그런데 양정산악회지를 참고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지 모르겠다.

 

이날 산행의 결론" 

1. "정신작흥주간"의 하나였고,

2. 희망자의 산행이었고

3. 김교신이 인솔하지도 않았고,

4. 물에산에회도 아니다.

 

이 글의 결론

 

1, 김교신과 황욱은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이는 김교신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일기에 그의 이름이 거의 없는 걸로 기억된다.

양정고산악회에서 상상하는 일제하 양정고보 산악운동의 '최적의 조건- 김황콤비'은 없다.

 

2. 김교신은 민족애와 조국애를 가르쳤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민족애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우리가 갖는 '감정' 그러니까 남녀차별, 지역차별, 인종차별, 학력차별에서처럼 누구나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수준일까?

아니면 독립운동, 노동운동, 소수자인권운동, 환경운동 등 자기를 어느정도 희생해야 하는 '운동'을 지향하는 것일까?

 

그는 산과 들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다.

 

3. 물에산에회는 양정고가 주도한 모임이 아니라.

흥사단의 이정섭 선생이 이끄는 등산모임이었고, 김교신은 양정고 학생들과 함께 동참했다.

김교신은 양정고 내에서 등산운동을 이끌지 않았다.

그는 산을 좋아한 지리 박물선생으로 학생들을 근교의 산과 들로 이끌려 했을 뿐이다라고 나는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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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김교신 선생은 사진이 많으나. 황욱은 사진 한장밖에 없다.

 

가운데 잘 생긴 미남자가 황욱선생이다.

 

 

단체사진에서 어디에 있을까 찾아보았다.

스마트폰의 고화질의 승리. 예전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좌측이 김교신 선생으로 보인다.

오른쪽이 황욱 선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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