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비잉 둘러 함께 식사했을까? 밥상 공동체일까?

카테고리 없음|2021. 2. 2. 07:52

조선인들은 둥근 밥상에 비잉 둘러 앉아 함께 식사했을까?

밥상공동체이고 밥상머리 교육으로 아이들을 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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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높이 기리는 조선의 원형 또는 그리워하는 고향의 이미지 중 하나는 이렇다.

대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반찬과 찌게를 놓고 함께 밥을 먹는 거다.

논밭에서 일하다 일꾼들 모두 비잉 둘러앉아 함께 점심과 새참을 먹던 기억들이지 않는가.

최불암을 앞세운 KBS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밥상공동체라고 표현한다.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말한다.

 

밥상머리로 검색하면 제법 많은 책이 나온다.

둥근 밥상에 앉아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고, 그게 조선스러운 듯한 뉘앙스도 풍긴다.

 

그러나 이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 근대에 만들어진 신화이다.

둘레상이 없었으니(추정) 밥상공동체도 없고, 밥상머리 교육도 없었다.

심지어 둘러앉아 먹지도 않았다.(고 본다.)

 

19세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은 디테일이 정확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엽피남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새참을 먹는 중인데, 물론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을 여러 각도로 해석한다.

 

그런데 나는 이 그림에서 뭔가 이상했다. 불편하고 낯설었다. 무슨 느낌이지

 

맨바닥에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을 놓고 숫가락으로 떠서 먹는것도 그렇긴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 다음에서 밥그릇과 입술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로 검색하면 됩니다.

 

그들이 먹는 자세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라 마주앉아 먹는 대신에 따로 먹고 있다!

 

우리는 이런거 좋아하잖아.

비잉 둘러, 여러 반찬과 찌게를 가운데에 두고 도란도란 먹는, 꿈에도 그리운 고향의 정경.

우리가 눈만 감으면 선한 '한국적' 풍경이라고 믿는 게 바로 이거라서 약간은 충격적이다

 

이상하다싶어 같은 주제의 다른 그림을 찾아보았다.

 

역시 기산 김준근의 그림으로 상단에 한글로 "농부 밥먹고"라는 제화가 있다.

 

놀라워라. 

여기서도 농민들은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을 따로따로 각상을 받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관념하고는 달라 혹시 김준근이 편향되어 있는 사람인가 싶어 더 찾아보았다.

18 세기 조영석의 풍속화 중 야외에서 새참을 먹는 그림이다.

미술평론가 손철주는 여기서도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발견해 내는데, 밥따로 먹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들은 비잉 둘러앉으려 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기고 먹는 모습이다.

 

안되겠다. 김홍도를 불러야겠다.

 

김홍도의 민속화중 찾으려드니 의외로 먹는게 별로 없다.

"새참"이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어랏 여기서도 따로 앉아들 있다.

 

최불암 선생이 말하는 밥상공동체는 어디에 갔지? 밥상머리교육은 어디에 있을까?

집에서 밥먹을 때는 좀 다를려나.

집에서 하는 방식이 바깥에서도 하는 법, 집에서도 둘레상에 앉아 먹었을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둘레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밥상에 올려 놓을 건덕지가 있었으려나.

그냥 좁은 방안에 상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자기밥 자기가 먹는거나 진배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들 양반의 자손들이니 양반들 살림살이좀 보자.

남지기로회도'라는 이름의 그림이다.

양반들 잔치 술상인데 이렇게 지금 왜색이라고 하는 각상을 받고 있다. 

양반들이 회식하는 그림은 거의 모두가 이렇다.

 

밥상은 좀 다르려나.

20세기 초 서양인 신부들에게 술상 아닌 밥상대접이다.

그들을 양반대접해서일텐데, 보시라 그들도 각상받이이다.

그러고보니 변학도 생일날 이몽룡도 거지행색이지만 양반이니 개다리 소반에 각상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양반들은 밥상도 독상 또는 각상이었다. 

둘레상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이렇게 독상을 받았다.

일본에 안가봐서 잘 모르겠는데, 경향신문에 의하면 2015 도쿄의 한 가족 식사이다.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지만 역시 지금도 가족사이에도 독상을 받기도 하는가 보다.

 

나는 평소 이렇게 먹는게 왜놈식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알고보니 조선 양반들도 했다는 것.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우리의 자랑. 한정식. 비잉 둘러 젓가락으로 같은 접시 음식을 집으며 정을 나누는 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어느 글에선가, 둥근 밥상, 둘레상은 조선에는 없던 식민지 시절 도입된 풍경이라고 한다.

무슨 책인지 기억이 안나네...

 

설령 둘레상이 있었더라 하더라도 평민들에게 둘레상에 얹어 놓을 게 뭐가 있었을까 싶다.

아무튼 둘레상이 없었다면  경향각지의 우리의 한정식은 도대체 '언제적'이란 말인가^^

 

서민 가족들은 도대체 어떻게 밥을 먹었을까?

1900년대 외국인의 시선을 통해 서민들의 밥상문화를 살펴보아야만 할텐데, 이는 장기 프로젝트로 남기고.

오늘은 경성제대에 다니던 이즈미 세이이치는 1930년대 제주인들의 식사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육지와는 달라 일가족이 대형 밥상에 장유 구별없이 둘러앉는다.

밥. 국. 김치 등을 각각 하나의 그릇에 담아 가족 전부가 자기 숟가락으로 떠먹고

가끔 손가락을 쓸 때도 있다"

 

제주도 섬주민들은 이렇게 딸랑 그릇 세개를 상위에 놓고 허급지급 걸터 먹었던 것이다.

둘러앉았지만, 밥그릇 국그릇 따로가 아니었다.

100년이 넘기 전 제주도인의 삶, 이것도 삶이었겠지. 슬프다. 눈물이 난다.

 

 

가장 한국적인게 가장 세계적이라고 하고,

신토불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가장 한국적이란 말인지 미궁에 빠졌다.

 

 

 

 

 

 

201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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