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진실은 고통스러운 것.
고등학교 시절 유치환의 '깃발'과 함께 '그리움'이란 시도 덩달아 배워야 한다.
그리움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물론 이 시는 교과서적으로 38세의 유부남 청마 유치환이 29세의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를 향한 애절한 마음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라는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아니하였다.
나는 "임은 물같이 쉴새 없는데'로 읽혔다.
그 까닭은 중학교때 주목하며 읽은 책들 때문이다.
그 책들은 이름하여 "선데이 서울"
이 책은 나이좀 있는 형들이 있는 친구집이라면 어렵지 않게 있었는데,
그 중에 사춘기 소년을 설레이게 한 것은 화보라기보다는 '독자 체험 수기"였다.
한여름의 바닷가가 무언지도 모르지만, 백사장을 넣은 사진과 함께 독자들의 체험수기가 실려 있었다.
뭐 선데이 서울이니만큼, 그 결말은 '후회하지 않아요'식이었던가.
그 중에 인상적인 제목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였다. 제목이 그럴듯하지 않나.
여름방학의 바다는 그러한가 보다고 여겼다.
헌데 소설은 소설일 뿐, 그로부터 그냥 속절없이 세월만 흘러 가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제목의 책을 만났다.
월간 주니어 1986년 8월호 별책부록. 부제도 그럴 듯하게 '바캉스 탈선 사례집"이다.
이종환이 누군지 모르던 시절.
7월호 또는 8월호 잡지의 별책부록은 바캉스를 권하는 책들이었다.
이 책도 소재 장소 글의 전개는 선데이서울하고 대동소이하다.
그래도 하이틴 문고의 부록이니 '상처받은 여학생'이라며 계몽의 몇줄을 넣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하이틴들에게 그 몇줄이 얼마나 먹힐까.
이런 로맨틱한 정경과 함께 글의 제목은 이러하다.
뭐 이런 식이다.
여성투의 글 말이다. 오빠와의 해변산책은 아픔으로 끝났다.....
그런데 마지막 체험수기에 들어있는 사진 (흔히 본 기사와 상관없음으로 적혀있는)이 이상했다.
이거 한국 아니잖아.
당시 플레이보이 피에르가르뎅이 길가에 번듯하게 있었으리라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이상타 싶어 글을 유심히 읽어보게 되는데....
물론 시간관계상 제목 주변의 큰글자만...
'돌연한 연락은' '나의 마음을' '그와의 그룹여행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복되어진 나의 상처는'
이런 문장은 한국스럽지 않다.
일본어를 배운 입장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일본어투 단어이거나 문장이다.
맥주세병을 마시고도 음 하나 틀리지 않고 기타를 처대던 사람.
- 이 문장은 소주 세병을 마시고도라고 해야 하지 않나.
일본인들은 맥주를 좋아하니 맥주 세병은 말이 되겠다만.
다른 체험수기의 제목들도 일본어투이다.
뭔가 미심쩍다.
옥수수가 서걱이는 이 장면도 한국스럽지 않다.
이 깃발도 한국스럽지 않다.
사진이야 수없이 많을텐데 어떻게 한국스럽지 않은 것을 골랐을까?
이것도 한국스럽지 않은 걸로 보인다.
특히 맨 오른쪽 평상이 말이다.
한여름은 커녕 해수욕장에 몇 번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갸웃거리지만, 이 장면도 뭔가 한국스럽지 않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선데이 서울에서 '이제 취재하러 갑시다'라고 하면, 다들 자기 자리에 가서 작문을 한다는 유머를.
그게 유머가 아니라 일본의 잡지를 번역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이제 표지를 다시보자.
역시나. 이런 해수욕장은 한국에 없다고 본다.
아닌가.
자 이제 진실은 이렇다고 본다.
독자 체험수기는 기자(?)들의 작문이 아니라 일본잡지의 번역이었을거라고.
선데이 서울을 본 나의 청춘은, 청춘의 바다는, 성의식은 오염되었다.
그것도 혐오스러운 일본의 것에 의해.
아니다. 일본은 수입되지 못하던 때, 자생 친일파 한국인에 의해서이다.
일제시대가 한국을 왜곡시켰다고 하지만, 나의 실존은 이런 것, 그들에 의해서이다.
십대 소년들의 정신을 왜색으로 물들인 선데이 서울은 왜색척결 친일청산을 감히 운위하지마시라
회개먼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