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피와 산초에 대하여2 - 초피 한알에 담겨 있는 천년의 문화사

카테고리 없음|2021. 3. 15. 16:56

몇번 한 말인데, 인연은 인연으로 이어지는 게 맞는 것 같다.

얼마전 '산초'와 '재피'에 대해, 왜 서울 사람들은 재피를 산초라고 부르는가를 풀어본 적이 있다.

그게 실마리가 되어 재피 관련하여 우연하게도 두권의 책과 황교익 선생의 기고문을 알게 되었다.

인연은 인연으로, 그러하니 항상 긍정의 카르마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다시하게 된다.

 

여기서는 재피 한알을 통해서 본 한중일 교류사, 조선의 지배계급의 변화가 음식에 끼친 영향 등을 풀어볼까 한다.

 

2020년까지 세상에 없던 두권의 책을 통해 조선시대 한양사람들은 과연 '산초(재피)'를 식용으로 했을까

서울사람들은 언제부터 '재피'를 산초라고 불렀을까.

나아가 재피를 먹는 문화가 한반도 자생문화일까 아니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걸까. 특히 이 질문은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을 걸로 짐작된다. 라는 의문을 갖고 함께 출발해 보자.

 

동네 도서관을 찾았더니,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 "사마르칸드의 황금복숭아"와 "정조지"가 함께 꽂혀 있다.

'사마르칸드의 황금복숭아'는 신문에 소개된 걸 보았기에 읽어보아야겠다 했는데, 하필이면 이때 눈에 띠다니.

 

현재 한국에서는 재피와 산초를 모양새와 쓰임새 그리고 언어의 정확성 여부를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인식의 지평을 공간과 시간을 국제적으로 그리고 천년의 세월로 확장시킬  계기가 되었다.

 

우선 산초와 재피는 이렇게 명명하고자 한다.

둘다 똑같이 추어탕에 넣어 먹는 향신료를 말하는데, 재피는 이 향신료의 본향인 지리산권역에서 일컫는 명칭으로,

산초는 재피문화가 없는 서울 권역에서 재피를 착오를 일으켜 부르는 이름으로 말이다.

 

(거의 먹어본 사람이 없겠지만, 기름을 짜는 동명이목(木)인 산초는 지리산이나 서울이나 모두 산초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논외로 친다. 한국인들에게 전혀 중요한 음식재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1) 중국사람들은 재피(초피, 화자오, 花椒)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마르칸드의 황금복숭아"의 조미료 란의 처음을 장식하는, 중국조미료의 상징으로 '재피'를 들고 있다.

그러나 재피의 서울쪽 사투리인 산초라고 번역하고 있다. 재피 맛을 모르는 지역민들의 용어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구절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후추가 전해지기 전, 한인들은 초(산초)를 이용해 매웃 맛을 냈다"라고 하고 있다. 초는 중국 인도 일본 등의 핵심 향신료라고 하고 있다. 국제적인 입맛의 표준인 셈이다. 재피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었고, 일찍부터 조미료와 약 그리고 술재료로 사용되었고, 귀족으로부터 서민까지 즐겼다고 한다. 

 

최근 유행하는 마라탕뿐 아니라 전통의 '오향장육'의 오향에도 재피(화초, 화자오)가 들어간다. 재피의 다양한 종류 중 마라탕에 들어가는 것은 재피 4촌인 화초(花椒- 중국인은 화자오로 발음한다)이다.

 

재피는 이렇게 생기셨다.

여기서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2) 재피를 향신료로 먹었던 게  고대 한국에서 자생적이었을까 아니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걸까?

나는 후자인 듯 하다. 한국인들은 자극적인 향신료를 그리 좋아한 것 같지 않다. 단군신화에 마늘과 쑥이 등장해서 그러할 듯 한데, 마늘과 쑥이 통과의례라고 하는 건  당시 인간이 좋아해서라고 볼 수 도 있겠지만, 인간들도 그것을 만만히 생각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겠다. 된장 등 다른 재료가 없다면 지금 사람들도 쉽게 먹지 못할 것이다.  더 알아볼 문제.

 

중요한 포인트는 이 책의 시대배경은 당나라로 수도인 장안은 중국 서쪽 지금의 서안에 해당한다. 서안시는 역사상 주나라·진나라·한나라·수나라·당나라 등 13 개의 왕조가 수도를 세운 도시이다. 이후 중국의 나라들은 수도를 점차로 동쪽으로 옮기면서 서안의 문화는 약해지는데, 당나라는 말그대로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꽃'처럼 화려했다. 이 책 '사마르칸드의 황금복숭아'는 그 부분에 방점을 찍고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같은 당나라 장안을 재현해 낸 책이다.

 

국내에 등장한 수많은 마라탕. 그 핵심은 화자오, 그러니까 재피가 되시겠다.

이때 우리는 (통일)신라시대인데, 당나라와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재피 등 향신료는 중국 서쪽 지방의 음식문화의 하나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우리가 알다시피 중국의 3대 음식 중 서쪽지방은 광조우쪽과 달리 맵고 향신료가 발달해 있다. 이부분은 중국문화사와 중국-한국문명교류사를 조금 더 보면 정확해지겠지만, 아마 나의 추론은 진실에서 그리 멀지 않을 듯 하다. 

 

이 가설은 오늘날 재피가 한국에서 남쪽지방에서만 향신료로 사용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재피는 '문화'교류가 본격적인 당-신라 시대에 경주지방으로 전래되어 와서 귀족문화로 꽃피었다고 본다. 이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당나라가 멸망하며 등장한 송나라의 수도는 중국 동쪽의 허남성의 개봉과 항조우인데다 유교문화있기에 이전보다는 향신료문화는 줄어들었을 거라 추정한다.

 

고려를 세운 왕건과 새로운 지배세력은 지방 촌뜨기들로 화려하고 부패한 경주문화, 국제문화에 대해 거리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많다. 수도가 개성과 서울로 옮겨가면서 개성의 토착민들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입맛답게 재피를 싫어했을 가능성도 높고.

 

어랏! 제법 스토리가 짜여지는데...^^

 

2) 이제 정조지를 보자.

서유구(1764 ~ 1845)는 1806년부터 그러니까 19세기 초에 중국과 한국의 책 900권을 참조하여 임원경제지를 쓴다. 그 중 음식요리백과사전이라 할 정조지가 있다는 것도, 번역되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이전에 나왔던 조선시대 다른 음식관련 책들은 '산'과 그리 관련이 없다보니 그냥 들추어 본 것에 불과하다. 이번에 한번 눈여겨 보았다.

 

이 두권의 책을 함께 본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사마르칸드의 황금복숭아'를 함께 읽지 않았다면, '정조지'에 기록된 수백수천의 음식들이 조선의 것으로 착각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이 책의 음식들은 당시 조선인들이 먹었던 걸로 보기 어렵다. 우선 재료부터 '조선'스럽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설탕이 왜나오고 카스테라가 왜 나오고 양이 왜나오는가. 서유구는 허준의 동의보감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책을 절대 다수로 참조하여 한국에서 가능한 음식들이라는 주제로 '정리'한 걸로 일단 추정된다.

놀랍게도 이 책에는 산초(그러니까 재피)가 들어간 음식이 너무 많다. 이름만 갖고서는 모를 음식들이 많기에 여기에 일일이 옮길 필요도 없다. 미국사람들이 왠만한 음식에 후추를 뿌리듯. 이 책의 각종 요리에는 재피가 들어간다. 고추는 드문 걸 보면 그시절까지만 해도 고추가 대중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기름을 짜는 또다른 종류의 나무인 산초는 찾지 못했다.)

 

배추나 무우 절임은 말할 것도 없이 각종 요리에 산초가 들어간다. 지금 재피의 본향이라고 할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조차 솔깃하기보다는 거부감을 느낄 듯 할 정도이다. 지금 유자를 말려 만드는 유포(유자포)에도 산초가루가 들어간다. 

심지어 찹살가루에다 천초(재피)가루를 뿌려 만든 재피전(천초지짐)까지 적고 있다. 이게 과연 조선의 음식일까?

왜 재피가 들어간 음식이 현재 서울에서는 단 하나도 없을까?

재피는 조선 고래의 향신료도 아니고 재피가 들어간 음식은 조선의 음식이 아닐  것이라 단정한다.

 

이 단정은 위에서 내가 제기한 가설, 재피의 당나라 장안- 신라 경주 유입설로 간단히 풀 수 있다. 서울 음식들은 '슴슴'하다. 재피, 방아, 갓 깻잎 등 자극적인 향신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현재도 재피와 방아를 잘 못먹는다. 깻잎은? 거듭이야기하지만 1970년대 하동을 찾은 서울의 기자가 하동사람들이 물고기를 깻잎에 싸서 먹는다는 '놀라운' 관찰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때까지 서울사람들은 깻잎을 생 것으로 먹지 않았다.

 

지금 서울내기들이 그러하듯이 천년전 개성사람들은 신라귀족과 달리 국제적인 감각도 없고 입맛도 없던 촌뜨기들(^^)이라 재피로 대표되는 향신료에 질겁을 했을 것이다. 미꾸라지도 안먹었다.

 

깻잎- 상상하기 쉽지 않겠지만, 불과 얼마전까지 생깻잎은 서울사람들 안먹었다. 중국이나 일본도 현재 안먹는다. 질겁을 한다고 한다.

 

'재피 왕조실록'으로 검색해보면, 조선시대 때 재피가 왕조실록때 두번(밖에!- 강조는 인용자의 것) 나온다고 한다. 지리산권 사람들이 가물었을 때 '재피'를 갈아서 물에 뿌려 물고기를 실신시켜 잡아먹었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왕조실록도 시간나면 한번 검색해 보면 더 정확해지겠지만, 재피는 서울권이나 왕족이나 양반들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 왕조실록에는 산초(山椒)라 하지 않고 초피(椒皮)라고 하고 있다는 것. 초피는 재피와 같은 어원이다.

서울사람들이 왜 초피라고 했을까? 그것은 중국문헌의 예일 수도 있겠고, 초피를 먹지 않지만 신라시대의 명칭이 계속 이어져서일 수도 있겠다. 땅이름이 그러하듯이 이름은 오래 지속된다.

 

이제 우리는 서울사람들이 산초라고 부르는 것이 조선이래의 유습이 아니라는 나의 추정에 공감할 것이다.

일제시대의 왜색문화이다. 이 부분은 지난 글에서 썼으니 패스.

서유구는 중국과 고려의 음식문화를 이렇게 짧게 언급한다. 

고려는 궁궐에서조차 검약함을 숭상했고, 반면 당시 송나라 사람들은 향신료를 많이 썼으나....'

 

단언컨대 고려사람과 조선의 한양 양반들은 향신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식에는 낙수효과가 있는데, 양반네들이 자시지 않았으니 한양성 평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말해 중국사람들은 재피에 환장을 했지만, 조선사람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고려시대 이후 지금까지 1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의 서울사람들은 재피를 먹지 않는다. 향신료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걸로 보인다.

덧붙여 말하면 정조지에는 향당갈수라는 요리에 곽향(藿香)이 등장한다. 한자어 곽향(藿香)은 방아라고 각주를 달고 있다. 검색해 보니 곽향은 '배초향과'의 풀인데 배초향과에는 엄청난 종류의 풀들이 있다. 그런데 대체로 한의학계에서도 방아라고 보는 듯 하다.

 

방아는 무엇인가? 지금도 방아는 서부경남의 진주권에서만 즐겨하는 향신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서유구는 누구인가? 그들의 집안은 평범한 양반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중앙 핵심 관직에 진출한 대표적인 경화거족(京華巨族) 가문이라고 한다. 그가 저 궁벽한 지리산권의 한미한 이들이 먹는 방아를 발굴해 냈을리는 없다. 곽향(藿香을 검색하면 조선시대 지리산권 전라도권에서 나는 방아로 되어 있다.

 

향당갈수라는 이름조차 중국스러운 이 요리의 재료는 설탕, 방아, 감송(甘松)이라는 듣보잡 채소(검색해 보시라 듕국의 것임), 생강에다 심지어 녹두 정도 크기의 사향 한덩어리가 들어간다. 이거 이거 양반들도 못자실 요리이다. 이제 이 책의 성취와 한계를 알 것이다.

 

방아의 당당한 모습. 천년전 귀족의 입맛을 사로잡았을 자태가 여여하다.

 

방아는 조선의 한양사람들은 먹지 않았지만, 향신료를 좋아하는 중국에서는 곽향이라는 이름으로 먹었다.

모르긴 몰라도 방아를 향신료 중 하나라 기록한 것이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기록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지리산권 사람들이 방아를 향신료라 먹었다는 기록을 관심갖고 찾아볼까 한다.

 

이부분을 정리하자. 

자극이 센 재피, 방아, 갓 등은 경상도 산것과 전라도 물것들의 입맛은 촌뜨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아 한다.

혀의 자극은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혀의 자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그들이 촌뜨기라서가 아니라 1천년 전 세계 표준의 입맛 - 당나라 -을 알던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야~ 써놓고 나니 이거 근사한데. 울림이 진중한데. 조금은 소름이 돋는다....

재피를 통해서 본, 재피의 입맛의 이면에 어려 있는 1천년의 역사, 지배와 배제의 역사라니..(잘 논다^^)

 

그렇다면 왜 같은 신라권인 경북사람들은 경남사람들과 달리 재피를 좋아하지 않는가?

이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안가보아서 잘 모르지만, 그 동네에는 일단 재피나무가 별로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두번째 안동, 봉화, 의성, 영주 등 경북 양반들은 알다시피 조선시대 내내 삼한의 갑족으로 유세했으니 한양의 표준 입맛을 따라 갔을 것이다. 반면에 경남과 전남의 양반들은 뭐 있었나?^^  

 

그렇다면 왜 서울사람들은 향신료의 또다른 대명사인 고추를 좋아하는가?

조선후기부터 서울사람들의 입맛을 잡기 시작한 것도 같은 논리이다. 고추는 촌뜨기로 전락한 경상도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당시 낯선 이국적인 문화이기 때문이다. 천년전 재피와 방아 등이 경주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문화는 그런거다.

 

 

그렇다면 만약에 말이다. 결정적인 의문인데 현재 경주사람들이 현재 재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

이 대답도 그리 어렵지 않다. 

향신료는 아무곳이나 뿌려대는 게 아니다. 음식에는 조합과 궁합이 있다. 단군신화는 북한에서 싹텄지만, 북한사람보다 우리가 몇배 더 마늘을 먹을 것이다. 그건 삼겹살로 통칭되는 고기문화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고기 없으면 남한 사람들도 마늘을 야채로서의 생마늘이 아니라 김치류에 넣는 향신료로 치부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재피가 아니라 향신료 일반에 관한 질문이어야 정확하다. 경주시 사람들이 현재 향신료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향신료가 들어갈 음식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정권이 고려로 넘어간 다음, 무슨 돈이 있어서 고품격 당나라 수입재료를 즐길 수 있었을까? 그 세월이 천년이다.

 

'사마르칸드의 황금복숭아'에서 그러하듯 당나라 시절 이미 어느 지역의 재피가 최고급인지 레벨이 정해져 있었다. 현재 경주권역에 재피나무가 없다고 치자. 그게 나의 논리의 치명적인 오류가 될 수가 없다. 아마 신라시대 경주사람들은 수입산  중국의 화자오를 최고로 쳤을 것이고, 토종 재피로는 지리산권역이 재피의 재배지로 최적이었다고 보지 않았을까? 지리산권역의 사람들은 해마다 경주로 재피를 공출을 하면서 재피에 입맛이 들었다고 보아야 매끈하다. 그 재피는 집근처에 흔히 나고 자라기에 천년의 세월동안 재피의 향신료 자격이 지속될 수 있었다.

 

사실 이 질문은 추후 확인할 가상의 질문인데, 현재 경주 사람들이 재피를 좋아하는지, 재피나무가 경주근교에 흔한지 궁금하다.

 

참고로 신라 음식문화를 검색해보면, "신라 삼국통일 후 음식도 삼국통일"이라는 기사에서 어떤 교수는 백제고구려음식이 유입되었을 거라 짐작하고, 당나라 이야기는 하지 않는데 글쎄다 그 반대가 아닐까. 그 반대가 더 압도적이지 않았을까?

일본의 한 라면 화자오, 그러니까 재피가 들어가 있다.

3) 서울사람들은 언제부터 재피를 산초라고 불렀을까?

 

검색하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조선일보에 "[Why] [황교익 먹거리 파일] 조피? 젠피? 제피? 산초?… 추어탕에 뿌리는 흑갈색 가루의 정체는 '초피'"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한 걸로 나오고 있다.

 

초피와 산초를 혼동하게 된 건 일본의 영향이다. 한국의 초피를 일본에서는 '산쇼(山椒·산초)'라 한다. '산쇼'는 일본 음식에 약방 감초처럼 쓰이는 향신료이다. 우동집 식탁에 놓여 있는 시치미(七味)에도 이게 들어 있다. 생선회 곁에, 국물 음식 위에 '산쇼(초피)'의 어린잎을 올리기도 한다. 일본에서 '산쇼'를 접한 사람들이 한국의 초피를 '산초'라 부르는 일이 잦아졌고, 심지어 초피 대신 '산초'를 쓰는 일까지 생긴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 역시 초피와 산초를 혼동하게 된 건 일본의 영향이라고 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말의 뉘앙스상, 최근 일본에 여행이나 유학을 간 사람들에 의해 산쇼-산초라고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이전 글에는 그냥 일제식민지 시절이라고 하고 말았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버러리에 들어가면 1935년 11월 1일 조선일보에

"요새 잡는 들새고기는 비린맛..... 산초를 조금 넣어보라"라고 하고 있다.

 

다시 이야기 하지만 여기서 산초는 재피를 말한다. 일본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산초를 좋아한다. 일본 음식점에 있는 시치미인가 하는 7가지 향신료 중에도 산초가 들어간다.

1937년 동아일보의 산업구락부에는 한 독자가 "산초 재배에 관해 질문을 한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또는 일본에 있는 일본인들을 겨냥하여 소득작물로 재배할려는 의도로 보인다.

 

서울사람들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식습관에 따라 재피를 산초- 그들은 산쇼-라고 불렀다.

50년대 60년대 신문에도 오피니언 리더들은 여전히 산초라고 부르고 있다. 패전한 그들은 떠나가벼렸지만, 산초라는 그들의 말은 조선땅에 남아서, 향신료의 ABC중 하나인 재피 관련 우리의 음식용어를 흔들고 있다. 이렇게 은연 중 산초라고 부르는 문화가 잔존하고 있었다. 단어는 힘이 쎄다. 오래간다. 

 

따라서 예전에는 재피라고 했는데, 일본에서 접한 사람들이 현지 일본인들이 재피를 산쇼(산초)라고 불러서 용어가 혼탁해졌다는 황교익의 논리는 틀렸다고 본다. 조선시대에는 초피재피라고 불렀다가 일제 이후 서울에서는 내내 추어탕에 들어간 재피를 산초라고 불렀다. 

 

일본에 다녀온 분들에게 궁금한 부분인데, 일본인들은 재피(산초)를 독립된 향신료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시치미의 7가지 향신료 중 하나에 불과한 건지 궁금하다.

 

재피의 의연한 모습. 천년의 탄압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사로잡았던 국제적 입맛을 되살려 낸다.

이제 "재피 한알로 본 천년의 역사"를 정리하자. 작은 것에 큰 뜻이 숨어 있는 법.

 

재피에는 대당교류사. 경주에서 개성으로의 천도, 누구의 입맛이 국제적인가.

일본의 향신료문화가 한국에 남긴 영향 등을 살펴보았다.

 

 

박인희가 불렀듯이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남자는 떠나도 일본어는 남는 법.

재피 천년의 역사는 이러하다.

음식문화의 혼란과 왜색을 척결하자고 하는 이라면 당연히 이제부터 재피라 부르시압.

천년전 신라의 번성한 문화를 오늘날 '궁금'해 하는 이라면 이국적인 뉘앙스의 재피, 초피라고 많이 드시압.

'재피를 잊은 문화는 미래가 없다'

 

 

이상, 재피와 산초에 대한 잡설을 더 풀어 보았습니다.

과외의 소득이라고 한다면, 대중화 되지 않은 마지막 향신료라고 할 방아에 대한 기록도 발견했다는 것도 있겠네요.

시간내어 글을 정리하고 자료를 보강하면 나름 재미있는 잡문이 될 것 같습니다.

과문하지만 이런 괴상한 논리(?^^), 거대한 상상의 재피판을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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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혀의 자극은 지적인 자극이라 미각이 발달하면 두뇌도 발달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내내 양반들의 지적 성취가 미미했던 것은 자극이 없어서이다. 이에 비해 해방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울사람들이 세계 최고가 된 것은 그나마 고추를 먹어서이다^^. 제발 더 맵게 더 맵게 고추만 들입다 넣지 마시고, 앞으로 자식들의 지적수준이 더 높아지길 원한다면 천년의 역사가 증명한 재피 방아 갓 등 향신료를 받아들여 더 먹이시라. 그러면서 그 유구한 문화를 핍박받아오면서도 천년동안 지켜온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사람들에게 고개숙여 감사를 표하시라. (재미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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