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선 백담산장지기와 일제시대 녹산회에 대하여.

카테고리 없음|2021. 3. 19. 22:20

나는 한번도 그곳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설악 하고 나즉이 읇조릴때, 백담사보다 백담산장이라는 말이 더 살가운 것은 윤두선 선생 덕분이다.

1968년 설악의 돌과 나무로만 만든 백담산장의 모양새는 다른 산장들과 달리 산에서 솟아난 듯 하다. 어떻게 그렇게 짓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 글은 윤두선 선생과의 일화를 적고자 하는 게 아니다.

1925년생인 그가 일제시대때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산악활동을 했는지 스케치를 시도한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때 '녹산회'라는 산악회가 처음 등장하게 된다.

어쩌면 조금은 불편해 할 부분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별사람도 다 있군'하고 말길 바란다.

 

사람과 창간호 표지사진이다. 전국의 유명 산장지기, 털보산장지기들을 담았다. 좌측 앉은이부터 시계방향으로 김근원, 유창서, 유용서, 함태식 그리고 윤두선이다. 그때 그시절은 이런 사진이 가능했을 것이다. 산악인들사이에는 산 뿐만 아니라 산장지기들도 교집합이었으니 말이다.

 

윤두선은 이 중에서 앞자리에 선다. 손경석이 해방후 산악계를 논하면서 2세대, 3세대라고 구분하기도 하는데, 윤두선은 그 중 앞자리에서 활동하였다.

 

사진 한장 보고 가자.

곧바로 어디인지 아는 이들 많을텐데, 윤두선이 1982년 무허가 산장이라며 백담산장이 강제철거되고,

1985년 인제 내린천 살둔계곡에 지은 살둔산장이다. 구름이 무심히 흘러가고 상념이 각각 다를텐데, 

어떤이는 이 모양새에서 백담산장 추억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윤두선이 지은 백담산장은 이렇게 생겼다.

거의 최초로 지은 유인산장인데, 윤두선은 어떻게 이 모양을 떠올렸을까?

나는 이 모습을 떠올렸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에 있다는 일본 적산가옥이다. 

윤두선이 지은 살둔산장은 전형적인 일본식 2층가옥으로 보인다.

윤두선은 1925년생이니 어릴 적 영향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심대하다는 걸 알게 해준다.

 

얼마전 "산의 기억"이라는 신간을 펴낸 김근원 선생의 글이다. "사진에서 보듯 윤두선은 카메라 앞에서 늘 정중한 자세로 촬영에 응했다. 이런 점은 요즘 사람들도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닌가 싶다(57년 4월 지리산 천은사에서)

 

사실 산악인 중이 이렇게 인상적인 자세로 사진을 찍는 이는 다시 없다. 윤두선은 어떻게해서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있었을까? 이런 걸 곰곰히 생각하고 찾아가 보고자 하는 게 이 글이다.

사람들은 흔히 윤두선을 백담산장지기로 기억하기 쉬울텐데, 그는 해방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다. 손경석의 "등산일기"에는 윤두선에 관한 특별한 기록이 있다. 1949년 6월 한국산악회 '선갑도·덕적군도 학술조사대'에서인데 이렇다.

 

"선갑도는 무인고도였다. 희망자만 상륙하고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고운 백사장에 일렬로 친 캠프촌은 마치 먼 남태평양의 어느 낭만 깃든 장면에 온 것 같았다. 이날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윤두선과는 "등산론(登山論)"으로 입씨름을 벌였다.

당시 엘리티시즘과 로맨티즘이 강한 손경석이 '등산이 무엇인가'를 논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윤두선이다. 윤두선과의 이 일화는 이후 1962년 불후의 명작 "등산백과" 서론에 장문으로 펼쳐진다. 이름하여 고산등반을 지향하는 '스포츠적 등산론'이냐, 아니면 '정관론(精觀論)'이냐라는 것이다.  정관론의 대표주자가 바로 윤두선이다 정관론이라 함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를테면 '산을 관조의 대상, 나와의 대화의 상대'로 볼 것인가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와운루계회 2집'을 보면 좋겠다.

 

사실 이런 의식은 전통적인 한국적인 사고방식과 맥을 같이한다고 중동무이할 수 있겠는데 그게 아니다. '정관론'이라는 이름부터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 일본초기 산악계의 한 축이 바로 정관론자들이었고, '산과 계곡'이라는 잡지 명의 창안자인 다베이 쥬지 등 기라성같은 산악인들이 정관론자이다. '조선적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김영도 선생의 글 뒤편에 '조선적인'것이 느껴진다면 그건 일본의 옛 산악서적의 영향이라고 본다.

 

윤두선은 중동고보(지금의 중동고)를 졸업한 수재이다. 당연히 일본어에도 능통하고, 일본산악문학에도 심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두선이 모자를 배쪽에 대고 산에 대해 예를 표하는 듯한 자세로 사진을 찍는 것 역시 그의 성정과 함께 '정관론'의 흔적이 어른거린다.

(추가: 아래와 같이 윤두선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사미승으로 있었다 한다. 그때의 흔적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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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일제 때 그의 행보를 보자.

 

1) 윤두선은 과연 백령회 회원이었는가

2) 그가 활동한 녹산회는 과연 무엇인가인데, 이게 오늘의 화두이다.

 

1) 윤두선은 과연 백령회 회원이었는가.

 

월간 산이 한때 재미있게 진행한 "고교 동문산악회 탐방" 중 2008년 7월호의 대상은 중동고 ob산악회였다.

그 중에 일제대 중동고보의 활동에 관하여 이런 구절이 있다.

중동산악회는 이와 같이 뚜렷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성도 어느 산악회 못지않을 정도로 만만찮다.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재학생 산악회 창립 시기를 1938년으로 보고 있다. 공식적으로 검증된 기록은 아니다.

다만 1937년 창립된 백령회 소속이던 고인이 된 대선배 윤두선(34회)의 생존시 증언과 활동에 의해 유추된 것이다. 윤 옹의 중동 입학 시기가 38년이다. 백령회 창립 멤버였으니 당연히 학생 산악활동도 활발히 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설득력 있는 논리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다시 학교가 소실되는 불행을 겪은 터라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이후 활동에 관한 자료도 없다.

 

윤두선을 스스로 백령회 창립멤버라고 주장한 기록은 중동고 바깥에는 없고 여기밖에 없는 듯 하다. 그동안  1937년 창립 주장 등에 대해  많은 글을 써왔으니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 아무래도 1925년생 윤두선은 1937년당시 13살에 불과했다. 어쩌면 일제 때 맹활약한 양정고보 산악부가 부러워(?) 또는 라이벌 의식을 느껴서 중동고보도 일제 때 활동을 했을거라고 주장하면서 이 논리를 내세웠을 수가 있다. 이 기록말고는 다시 없다.

스스로도 백령회원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는 방증은 또 있다. 1971년 조선산악회 핵심회원인 이이야마 다츠오가 내한하여 설악산 백담산장을 찾았다. 그때 김근원 선생이 찍은 사진인데, "산악선배에 대한 소회- 김근원의 사진증은(사람과 산)'에서

 

그 이이야마씨를 나는 71년에 설악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백담산장에 있는데 일본인이 불쑥 들어왔다. 그 옆에는 평소 잘 알고 지냈던 김정래 선생이 동행하며 들어왔다. 김정래 선생은 사진기자를 지냈으며 당시에도 원로언론인으로 잘 알려진 분이었다. 그러면서 이이야마 다쯔오라고 소개를 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해방 후 생사를 알 수 없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지 나는 눈을 의심했다. 당시 백담산장을 관리하던 윤두선도 함께 놀라며 그를 반겼다.

 

글의 뉘앙스에는 윤두선은 이이야마 다츠오를 몰랐던 걸로 보인다. 알았더라면 김근원은 일제때 둘 사이의 인연을 한줄이라도 적었을 테니 말이다. 백령회원이면서 이이야마 다츠오와 추억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40년대 백령회와 조선산악회는 콤비로 맹활약했으니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마운틴 저널 발행인 이영준은 아래와 같이 사실을 전해준다.)

 

  •  

잘 읽었습니다. 글중 이이야마와 윤두선의 1971년 만남에 대해서는 이이야마의 글에 나와있듯 해방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윤두선 선생의 아드님이 윤평구 전 한국일보 기자시라, 만나뵈면 정확한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이야마의 글 대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중략)

식후의 담배 한가치를 하고나니 아까의 턱수염을 한 분이 나와서 정중한 어조로, “실례합니다만 혹시 당신은 이이야마씨가 아닌지요...”라고 확실한 일본말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

외국의 산골에서 돌연히 이름과 성을 듣게 되니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고 물어보았더니 ”저는 윤두선(尹斗善)이라고 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는 나와 만났던 것을 이야기하였다. - 김장욱 역

윤두선 선생이 금강산 마하연의 동자승 시절에 만났다고 합니다.

 

2) 그리고 이제 '녹산회'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언제 진실을 말할까? 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방심할 때이다. 그리고 심리학계에서 말하듯이 '실언'을 할 때이다. 

그리고 자기 커뮤니티 밖에서, 자기를 위협하지 않는 곳에서도 그러하다. 산악계 바깥에서 산악계를 전혀 모르는 이와 대화할 때 문득 방심하여 그럴 수 있다.

 

윤두선의 예를 보자.

월간 마당이라고 있었다. 1981년 창간되었으니 전두환 시절의 이야기인데, 1983년 8월에는 야심차게 "마당이 뽑은 한국의 백대절경"을 선정했다. 1980년대 우리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절경은 오관으로 느끼는 것의 총체다"라는 상당히 정관론적인 명제하에 선정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근원, 박동현, 윤두선, 임석제, 조필대, 석동일이다. 이들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보자.

 

임석제야 산악계에서 유명하지만, 조필대와 박동현은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그시절 최고의 여행소개자이겸 작가였다.

김근원과 당시 제일 핫했던 석동일도 선정위원으로 뽑혔는데, 소개글은 이렇다.

그리고 윤두선이다.

 

윤두선은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를 졸업했고,
해방 전에는 한국 최초의 산악회 '녹산회' 조직에 참여, 등산운동을 폈다.
1968년에 설악산에 들어간 디 1982년까지 백담 산장을 관리해 왔다.

백령회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대신에 그는 녹산회를 들고 나왔다.

백령회가 거짓말인 것 처럼 이것 역시 거짓말일 수 있다.

그러나 산악계 바깥에서 한 말이니만큼, 긴장이 풀려서 나온 말이라 나는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한국 최초의 산악회 녹산회라"

일제하 산악운동에 대해 잘 아는 김근원도 선정위원이니만큼, 윤두선이 그렇게 말을 할리는 없겠다.

한국 최초라는 건 아무래도 편집부에서 붙인 말로 짐작된다.

 

아무튼 그가 녹산회에서 활동을 했다는게  진실이라면 이 '녹산회'는 어떤 조직일까?

왜 그는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을까?

짐작으로는 그 녹산회가 해방후 한국인이 알기에 '떳떳한' 조직이 아닐 수 있겠다.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녹기연맹을 떠올렸다.

녹기연맹에 대해서는 검색해보면 될 일이니 더이상이 설명은 생략한다.

 

 

그 녹기연맹의 녹이 바로 푸를 녹'綠'이 아닌가.

어쩌면 녹기연맹의 하부조직으로 있던 부인회 등등과 함께 만들어진 산악회가 아닐까 짐작한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한반도를 더 푸르게 푸르게 만들고 싶어했던 그 '녹기연맹' 말이다.

 

그러하기에 소년시절 활동했던 녹산회에 대해 해방후 윤두선은 평생동안 비밀로 했지 않을까.

일단 이렇게 상상에 그칠 뿐이다.

언젠가 '녹산회'에 대한 자료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관심을 놓지 않으면 언젠가 인연이 닿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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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심으로)

그동안 일제시대에 관한 나의 글쓰기를 읽은 이라면 이 활동에 대해서 단 1퍼센트도 비판을 하고자 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다. 혹시라도 친일반일 프레임으로 변변찮은 이 글을 오독하는 건 정중히 사양한다. 친일반일이라는 관점은 '돈이 오고갔던 곳, 돈이 되는' 곳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놓고 하는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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