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북한산 도봉산 등 서울 근교 등산 방식은 이렇습니다.
60년대는 하이킹을 주로하는 일반 산악회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출발은 주말이 안정적으로 보장되고 화이트 칼라 회사들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블루칼라 회사원들은 대체로 주말을 시내에서 '술마시고' 노는 게 쉽고 어쩌면 당연했다.
한전산악회는 1965년 창립되었고, 1990년 그들의 산행이력을 담은 "산행역정'을 발행했다.
이 책에서 1965년경 도봉산 풍경과 당시 등산방식 등을 보면서 말추렴을 해볼까 한다.
1990년 이후 산행기록을 담은 "속 산행역정"은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런데 창립시부터 1990년까지 담은 "산행역정"을 구하고자 노력했어나 쉽지 않았고 이제서야 겨우 구했다.
이 책을 갖고자 한 까닭은 화려한 산행기가 있거나 주목할만한 등산가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꼼꼼히 그들의 산행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은 '흥사단 산악회', '법원산악회'등 몇몇 산악회서만 가능하다. 개인도 이런 기록을 남긴 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그 기록을 입수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산행기록의 처음에는 이렇게 날짜와 대상지만 적고 있다.
그래도 비오는 날이나 심심할 때 이런 기록을 읽는 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다.
그들이 어떤 길로 올랐을지, 어떤 산을 올랐을지 상상하면서 추체험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1967년 기록이다.
1월 3일 백운대 정상에서 시산제를 했다. 지금은 저곳에서 불가능할 것이다.
1월 29일 도봉산에서 동계 직장친선 등산대회를 열었다. 주최는 대한일보사와 김용성회장이 이끈 한국직장산악인 협회다. 자그마치 한국은행 외 30개 단체, 약 300명이 참가했다고 적고 있다.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이 단체들은 공공기관이나 당시 대기업 등이 대부분이다.
산악회가 직원들의 사기앙양이나 애사심 고취 등 장점이 많았기에 회사에서도 지원을 했다.
당시에도 '포대'라고 명칭이 일반적이었나 보다. 포대능선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무엇일까는 여러모로 고찰해서 쓴 적이 있다.
"우이암에서 암벽타는 남녀를 바라보니 천상에서 하강하는 선녀와 같다"
3월 12일 산행에 참가한 인물 들 중에 남궁기가 있다. 우리에겐 1969년 설악산 십동지 사건으로 비운에 사라진 산악인이다. 그는 한전산악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했고, 이끌었다. 그가 등장하는 산행기는 이어서 올릴까 한다.
"진관사에서 노여승의 정숙하라는 꾸지람을 듣다."
여기서 노여승은 당연히 진관스님을 말할 것 같다. 6.25후 진관스님의 원력으로 진관사는 중창되었고, 그런만큼 그는 진관사를 번듯하게 하기 위해 예의없던 등산객들과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사찰 안에서 버너 켜고 밥해먹고, 담배피고 하던 시절이다.
정릉 골짜기는 일제때부터 먹자판 놀자판이었고, 이들은 '속인들의 집합소'라고 민망해하고 식상해한다.
그러나 그게 또 그게 아닌게,
그당시 산에 갈 수 있었던 이들은 보시다시피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시각으로 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고달픈 삶에 힘겹게 버티는 서민들은 하루 낮 정릉 골짜기에서 술먹고 장구치고 노래부르면서 고통과 시름과 설움을 이겨내야 했다. 나는 지금도 도봉산 계곡을 열어서 사람들이 발 담그고, 술마시고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산과 계곡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인격이 훌륭한' 분들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시민들이다.
"인수봉에 붙어 있는 클라이머들을 왜 '흰 개미떼'라고 했는데, 왜 '희'다고 했을까?
바위가 눈부시게 흰데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업화가 안되어서 스모그도 약했다. 화강암 바위를 거무튀튀하게 보이게 하는 건 이끼류인데,
이끼는 공해지표식물이다. 스모그와 산성비가 내리다보니 지금 인수봉은 '눈부시게 하얀 바위가 되어버렸다.
일제시대때 어느 기록에는 '검은 바위'들이 위압적이라고 하고 있다.
당시 사진들을 보아도 이렇다. 헐벗은 산의 모래색은 하얀데, 바위는 상대적으로 거무튀튀하다.
5월 14일 또다시 대한일보사 주최 직장산악대회를 했다.
참가자는 이런 뺏지를 선물로 받았다.
1969년 2월 26일. 입춘 전에 비가 왔고, 기상이변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2월 2일에는 '49년만의 대설'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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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OB산악회의 발자취인데, 정말 재미있다.
"5.16이후 회사내에서 2인 이상의 모임도 못하게 하는 계엄령하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신시절이나 전두환시절에 학교내에서도 2,3명 못모이게 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5.16 쿠데타 시절에도 그랬구나.
이것도 혹시 일제시대때 배운 것일까?
그런데 말이다. 만의 하나 혹시라도 일제시대 태평양전쟁에 몰리던 시절에 이런 예가 없었다면 말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당시 도봉입구에는 작은 개천을 끼고 몇집의 허술한 음식점이 있었다."
"얼마 안가서 숨이 찼지만 참고 쉬면서 천축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들 나이가 40세가 넘은 중년들이어서 못 오를 것으로 걱정했으나...^^'
지금이야 하도 많은 사람들이 도봉산을 오르니 '산입구'에 지하철역이 생겨 도봉산역이 있지만, 그때는 산입구에 역을 만들 수 없던 시절, 그때는 창동역에서 내려 지금의 도봉역 즈음에서 계곡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도봉입구'는 이곳을 말한다.
이 사진의 출처는 "구름위에 띄운 엽서"(사람과 산)이고 소장자는 손경석 선생님이시다. '도봉산 입구'라는 한자가 적혀있는데 연대가 1946년이라고 소장자가 말하는 사진이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도봉역 즈음이 아닐까 싶다.
1965년경에는 피난민이 몰려들어 이때보다는 조금 더 집들이 난립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들 나이가 40세가 넘은 중년들이어서 못 오를 것으로 걱정했으나...^^'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
"종로5가에서 산행을 시작했고, 다방이 각 산악회의 모임장소였던 시절"
왜 종로5가 정류장에서 서성거리지 않고 다방에 들어갔을까? 커피값은 누가 냈을까?"
"산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목욕탕을 찾아 하루의 땀과 피로를 풀고 가까이 있던 진고개 식당에서 가벼운 저녁까지 하였다....."
지금도 하기 어려운 고품격 레져 스포츠^^를 즐겼군.
이상 책한권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하여, "그때는 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