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야마에 대한 두가지 관점 - 정보원이냐 의인이냐

카테고리 없음|2021. 4. 6. 10:39

이이야마 다츠오는 과연 사진가 김근원의 회고에서처럼 일제 총독부의 개(정보원)이었을까?

아니면 보기 드문 의인일까?

우리는 알지 못할 이야기인데, 일본의 일각에서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존경을 한다.

 

* 이 글은 예고없이 글의 방향이나 주제가 바뀔 수도 있고, 고치려고 할 것이다.

이번에 "사진가 김근원의 산과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김근원 선생님의 또다른 역작 "산의 기억"이 나왔다.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묵직한 울림이 될, 올해 최고의 산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책은 사람과 산에 기고했던 연재물을 모은 걸로 짐작되는데, 오늘 할 이야기는 그 중 한챕터인

"산악선배에 관한 소회(素懷) : 김근원의 사진증언" 중 이이야마 다츠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수봉 초등 논쟁과 그가 했다고 하는 수많은 개척등반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이야마 다츠오의 유작 - "북조선의 산" 그는 패전후 위험을 감수하고,이 책에 들어갈 산사진들을 일본으로 갖고 돌아갔다.

이이야마는 일본산악계에서는 해방전 조선산악계를 대표하는 산악인으로 알려져 있고,

말년에 거가 거주한 지역의 사람들은 보기드문 의인으로 기리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이야마에 관한 사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한참 그와 호흡을 맞춘 김정태이건만 이이야마가 어떤 성격인지 등등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쓰지 않았다. 

김정태가 일본인 산악인들에 대해 '악담'이나 '비난'을 하는 경우는 그를 키워준 이시이를 빼고서는 거의 없다.

이이야마하고는 제일 인연이 깊어서 할 말이 많았을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이이야마 다츠오는 1904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1910년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다.

학력은 제대로 밝혀진바 없으며, 어려서부터 사진찍는 것을 좋아했다.

1926년 클라이밍에 입문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 총독부철도국에 취직해서 운수과 선전계로 산과 스키부문을 담당했다.

이후 클라이머로서, 조선산악회원으로서, 철도국 공무원으로서 그 누구도 비할 바 없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김근원은 1972년 한국에서 이이야마를 두번째 만날때, 이렇게 실토했다고-양심선언?- 밝히고 있다.

 

자신은 일제 때 조선에 있으면서 일본 총독부의 정보원으로 일했음을 밝혔다. 나는 놀랬다. “아니 철도국에 근무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했더니 그것은 신분을 감추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정보원으로 일하면서 여기저기 활동하기 위한 편리함 때문에 철도국 직원인 것처럼 행세했다는 것이다. 

 

김근원은 1922년생이니 일본어에도 능통해서 잘못 들었을리 없다. (관련 기록을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는 고보를 나오거나 정식으로 일본어 교육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은 김근원의 기억이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여러각도로 한번 그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자료는 거의 없어 시론의 성격을 띤다.(앞으로 글을 보태고 고치고 할 예정입니다)

 

1) 일본 제국주의 시절 천황의 신민(臣民)들과 2020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人民)을 비교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모욕일 것이다. 일제때 신민들이 따라야 할 의무는 가혹했을 거라 전제한다.

 

현재 중국의 여러 보안법 관련해서 인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법규가 있다.  인민들은 누구라도 자기가 취득한 정보 등을 정부가 요구할 경우 성실히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될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중국을 일제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제는 이것보다 훨씬 강제적인 법률을 갖고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해방 후 북한에 있었다고 하는 5호담당제의 기원은 일제라고 추정된다. 일제는 5가구씩 묶어 불충한 사람들을 상호간에 감시와 신고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누구나 감시하고 고발의 의무가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정보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다.

 

2) 당시 경찰의 숫자는 엄청났다. 1920년대 초에 이미 2만명을 넘어섰고, 경찰보조원과 조선인 보조원들도 아주 많았다.

경찰의 정보력-우리가 알고 있는 형사, 헌병-은 7,80년대 한국의 안기부보다 더 좋았을거라 상상된다.

 

굳이 철도국 직원이라는 명함을 파고 돌아다니면서 정보원역할을 할 정도로 총독부의 장악력이 떨어졌을까?

조선은 위험한 식민지였을까? 그렇지 않다.

 

3) 조선 총독부 철도국을 알려면 만철을 알아야 하고, 그 유명한 만철 조사부를 알아야 한다.

만철은 1927년까지 조선의 철도국을 위탁경영했고, 만철 조사부는 말그대로 안기부 역할을 한 걸로 보인다. 만철 조사부가 핵심적으로 했던 활동 중의 하나가 비적, 마적에 관한 것이었다.

 

4) 만철은 만주로 돌아간 다음에도 함경도의 철로는 관리한 걸로 보인다. 이이야마 다츠오가 자주 갔던. 산악인이 좋아했던 그곳- 함경도 -  곧 이이야마 다츠오의 나와바리였다.

따라서 그도 그곳에서 활동. 암약할 비적 등을 조사 보고해야 할 정보원 역할이 당연히 주어졌을 것이다.

 

나는 이이야마 다츠오가 평범한, 황민화 교육을 받은 평범한 신민이었을 것이다. 인권이나 계급 의식이 각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평범한 만큼. 그 역할을 당연히 따랐을 것이다. 우리나라 공무원이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나. 아니면 육체가 없다나 -

 

그러나 이미 그쪽엔 헌병. 국경수비대 경찰력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것.

3,40년대 함경도는 상당히 '평온'한 곳이엇을거라 짐작한다.

이리저리 산으로 쏘다니는 말단 철도공무원에게 뭐 그리 대단한 정보원 역할이 있을까. 딱 그가 보고 들은만큼의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정보원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건 일본의 충용한 신민들이 누구나 해야 할 몫이었다고 본다.

그는 비록 황국서사와 궁성요배를 하고 싶지 않아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고 기록하기도 하는데, 그건 글쎄다 믿을 수 없는 '자기 보존을 위한' 회고라고 본다.

 

5) 해방 전후의 행적을 보자.

 

이 부분은 이이야마 다쯔오로 검색해서 네이버 블로그 체코여행 김장욱 선배의 글을 볼 것. 좋은 자료. 김장욱의 글은 이이야마 다츠오가 쓴 '배가본드 12만키로'를 번역한 것이라고 하는데, 

 

1942년 해군성의 촉탁으로 뉴기니-일본으로서는 중요한 곳 - 에서 자원조사를 하다가 간난신고로 탈출하여 1년 8개월에 걸쳐 그의 고향 서울에 돌아오니 1945년 8월, 곧 패전을 맞이한다. 그는 포로(?)가 되어 4달 정도 미군 방첩대(?)의 조사를 받는다. 장소가 서대문 구치소도 아니고 조선 최고의 '반도호텔'이다.

 

반도호텔은 여느 호텔이 아니다. 1층-5층은 사무실, 6층-8층은 호텔로서 지상 8층의 반도호텔은 당시 최고 높이의 건물이었다. 중요한 것은 해방 후 당시 하지중장의 숙소와 업무공간 그리고  제24군단 사령부가 설치됐어 있던 최고의 권부였다. 그런 공간에 재우고 조사를 했다니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주로 그가 사진을 찍고 다녔던 만주 몽고 등의 실태에 대해서라고 하는데. 미군은 아무래도 그곳에 대한 정보, 소련군에 대한 정보 등에 대해서 자료가 궁금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그는 전범대우를 받지는 않았다고 본다. 참고로 해방후 조선에 있던 일본인 전범들은 어디에 구금되었을지 궁금해지네.

 

아무튼 이 지점에서 - 해군촉탁, 뉴기니, 반도호텔 - 그가 평범한 철도청 공무원, 사진작가가 아니라 고급 '정보원'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적어도 미군당국에는 말이다.

 

그는 12월 호텔을 탈출하여 같은 조선산악회원인 방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귀환한다. 감옥이 아니라 호텔이니 탈출이 가능했을 것인데, 그는 이듬해인 1946년 1월에 일본으로 귀환한다. 1월은 일본 귀환자 중 제일 늦은 축에 속한다.

 

그는 어떻게 해서 미군방첩대에 잡혔을까? 1945년 12월 반도호텔에 탈출하여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어떻게 귀환 또는 밀항을 했을까? 이 부분이 그가 정보원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자료제공자일지 가릴 부분이라고 본다. 숨어살았거나 밀항을 했다면, 정보원일 가능성이 높고, 그냥 무난히 서울에서 놀다가 정상적으로 귀환을 했다면 반대의 경우일테고. 김장욱의 글에는 이 부분이 소개되어 있지 않아 원문이 어떠한지 궁금하다.

 

5) '의인'의 평가에 관해서는 이부분이 중요한데, 해방되던 이듬해 1월 그는 '겨우' 일본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주지역의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는 일본인, 여자, 어린아이들이 비참한 상황 -아사직전-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어떻게 했을까? 목숨을 걸고 단신으로 가슴에 카메라를 메고 나룻배를 타고 잠입하여 들어간다. 그곳에서 -걸리면 죽을 각오를 하고 - 그 참담한 실상을 사진으로 찍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 사진을 현상하여 GHQ 맥아더 사령부에 보내어 대책을 요구한다.

 

이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정보원 중에 그런 일을 한 사람이 또한명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건 일본 정부가 정보원에게 내린 밀명이었을거라 본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한 이가 없다면, 이이야마 다츠오 개인의 성품, 의협심이라고 본다.

 

그냥 짐작으로는 패전후 당시 정보원 중에 비밀의 상급조직으로부터 설령 그런 은밀한 명령이 떨어진다고 해도 따를 사람이 있었을까? 이이야마 다츠오는 의협심으로 자기에게 익숙하지도 않은 만주의 수용소로 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가정을 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말년에 살던 시에서 그 사진들을 전시하면서 그는 '의인'으로 존경을 받는다.

 

이 부분은 관련 일본의 기사를 추가해서 올리겠다.

 

 

6) 이이야마 다츠오는 어떻게 생겼을까?

김정태는 말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도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인 듯 하다.

 

 

7) 다시 이이야마 다츠오, 그는 어떤 인물이길래

 

1971년 삼성의 이병철이 자기가 소장한 '보물'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해서 한국에 왔을까?

1972년에는 박병래 선생 (구글에서 박병래 기증으로 검색해 볼 것)이 타계하기 2년 전 왜 그를 불러 '국보'급 사진을 찍게 했을까?

 

이이야마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 단순히 사진실력은 아닐테고.

그에겐 정재계 문화계에 연관되어 있는 깊은 흑막이 있을까?

 

나는 이렇게 추정할 수 있겠다.

이이야마 다츠오가 일제하 사진작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많은 사진전에 출품하여 상을 받고 했다.

따라서 그는 일제하 조선의 도자기나 보물들을 소장한 일본인 소장자들의 소장품 사진도 찍으면서 그들과 교류를 했을 것이다. 해방전 조선의 골동품 매매는 상당히 활발했다.

따라서 일본에는 조선의 골동품 소장자들이 적지 않았고, 

문화재 컬렉터인 이병철에게 그들은 은밀하게 자기가 소장한 조선의 보물들을 매매 요청을 했을 것이다. 이이야마는 그 나까마로 한국에 왔을 것이다.

 

7)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이이야마에겐 조선이 1910년 6살부터 1945년 그러니까 41살까지 산 그에겐 '고향'과 같다.

자기가 식민지 시절 일제의 '정보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해방된 한국에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지 잘 알 것이다.

전범으로 낙인 찍힌다면 다시는 자기 고향인 경성을 방문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1972년 68살의 이이야마가 무슨 회심을 했길래, 잘 알지도 못하는 김근원에게  '정보원'이라고 밝혔을까? 

 

나는 합리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8) 그는 평범한 철도국 직원, 평범한 사진작가라 보기엔 너무 깊숙히 역사에 들어가 있다.

1945년 구치도도 아니고 반도호텔에서 감금되어 5개월이나 조사를 받았다는 건 계속 찜찜하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선을 안정적으로 통치를 한 일제하 조선 총독부가 '정보원'을 그런 식으로 곳곳에 숨겨놓고 육성했는지 관련 자료가 궁금하다.

 

그런 자료가 없다면, 나의 소박한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평범한 천황의 신민이었고, 일제하 총독부 철도청 공무원이자 저명한 사진작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했다. 다만  그의 해외 행보와 관련해서 미군이 필요한 인물이라서 곁에 두고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도호텔에 둔 건 아닐까 싶다. 그만큼 만주와 몽고 등에 사진을 찍으려 여기저기 돌아다닌 일본인이 해방 후 경성에 있었을까 싶다.

 

 

일단은 여기까지.

일단은 배가본드 12만키로가 궁금하다.

(추후 언제든지 글의 오류를 넘어서서 논조까지 하시라도 바꿀 예정입니다.)

 

* 중간 줄을 친 것은 변기태 하루재클럽 대표의 의견에 기초하여 재고해 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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