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옥 구술사 다시 읽기 2-1 해방전 그의 행적, 나는 이렇게 읽었어요.
2016년 국립산악박물관은 야심차게 원로산악인 구술조사보고서를 기획한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안광옥으로 책에는 총 50여페이지인데, 1923년생인 그의 일제하 행적은 단 2페이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2페이지도 여러모로 허허롭다. 이 글은 그 2페이지가 차마 담지 못한 것에 대해 내 나름대로 읽은 흔적내기이다.
오늘의 주제어는 '오자와 상회, 또는 오사와 상회'이다. 해방전후 한국산악계에 등장하는 용어인데 오늘 처음 등장한다.그리고 일제하 평범한 일본인들에 대해 다른 각도로 보고 싶지 않다면, 아래 글을 읽지 마시라.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을 유심히 읽은 이는 극히 드물다고 본다. 김영도 선생님이 항상 탄식하듯이 산악인은 산서를 읽지 않는다는 데에 항상 한표를 던진다. 내 각주가 혹시라도 못마땅하더라도 이해하시라. 책은 세상에 선보인 다음에는 저자의 것이 아니라 읽은 이의 것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2016년 산악인 구술조사보고서를 시작으로 2021년까지 총 5회에 이어지고 있다. 겸연쩍지만 나는 제 5회에 구술 면담자로 참가하여 두분의 원로(?) 산악인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렸다. 면담은 상당히 즐거웠고, 글쓰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어떤 자(者 놈 자)의 얍삽한 후까시로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그 이유는 언젠가 언급할 기회가 없기를 바란다. 아무튼 그 두분에 대해서는 나름 그들도 잊어버린 이야기를, 앞으로 누구나 인용해도 좋을 정확한 팩트를 상당히 꺼집어 냈다고 자임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나의 '집요'한 접근의 성취(!)을 이해하리라 본다.
2016년 구술조사의 첫번째 대상으로 선정된 4인은 김영도, 박철암, 정명식 그리고 안광옥이다. 이 중에 오늘 주인공은 안광옥 선생님이다. 그분은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다. 산악계에서 제일 복많은 분이다.
1946년 24살 나이에 암벽등반에 입문하여 2010년 미수(88살)가 되던 해 평생 그가 떠나지 않은 인수봉을 오른다.
그것도 평생 산악계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60여명의 후배들이 함께 했다. 이런 분 다시 있는가.
이 사진은 많은 상념을 낳는다. 안광옥은 뭐 대단한 학벌이나 집안이나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세출의 등반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예우를 받은 이가 또 있을까? 앞으로 또 있을까?
어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곳에서 죽을 자리를 가질까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맥아더의 말을 차용한다면, 기라성 같은 다른 원로 산악인들은 이렇다. "노 산악인은 죽지 않는다. 다만 '잊혀질' 뿐이다." 그들은 '죽기 전에' 대부분 잊혀졌다. 안광옥은 잊혀지지 않고 우리에게서 등을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도 등을 보이지 않았다. 부러워라. 그 이전에도 이런 이 없고, 그 이후에도 이런 분 다시 없을 것이다.
이제 이런 존경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분에 대한 나의 존경을 오해마시라. 이 글 역시 폄하가 아니라 가이없는 존경으로 읽어 주시라. 읽지도 않은^^ 이들에게 드리는 간곡한 부탁-
안광옥은 1923년 서울 산악계의 샤모니인 우이동 출신이다. 2016년 구술을 했다면 84살이 되겠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일제하 그의 삶이다. 초년의 삶은 의미가 없지 않은데, 의외로 2페이지에 불과하다. 그것도 하도 오래전이서일까. 기억이 엉크러져 있을 수도 있어서인지, 내가 읽기엔 다소 갸웃거린 부분이 적지 않다.
그 부분에 대해 각주를 달아본다. 읽은 것도 나의 몫. 각주도 나의 몫.
1923년생 안광옥은 세살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다. 1926년 즈음일 것이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안광옥의 교욱을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하고 구술한다.
부인은 열일곱 열여덟살부터 인수봉을 갔다고 하고 있는데, 이부분은 오류이다. 인수봉이 아니라 인왕산이다.
당시는 '체력'을 중요시하던 시절이라, 뒷동산을 오르고 역기를 들고 냉수마찰을 하던 시절이다. 1940년 전후까지 안광옥은 주목할만한 등산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의 초년의 가정환경을 보면 인수봉은 커녕 북한산을 갔다고 보기 어렵다.
뭐든 일찍 했다고 꼭 좋은 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안광옥의 집은 빈한했을거라 본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와 식모를 했다. 당시 조선의 경제상황을 보면, 10살로부터 과부까지 만만한 직업은 식모였다.
일제시기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은 완벽하게 '격리'해서 살았다. 일본인들은 패전하던 날, 조선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들이 사는 줄도 몰랐다고 할 정도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조선어는 '엄마'였는데 그건 그들이 거의다 조선인 식모를 고용했고, 그들을 부르는 말이 그래서이다. 식모는 195,6,70년대 한국에서도 일상적이었다.
안광옥 관련해서 놀라운 것은 것은 '주인집 삼형제와 놀면서 일본어만큼은 일본인 이상으로 제대로 익힌 것이다.' 이게 자연스럽게 읽히는가? 나는 충격받고 탄식하고 책을 덮었다.
6,70년대 조선의 주인집 아이들은 식모의 아이들과 섞이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최근에도 임대아파트하고 맞닿아 있는 일반아파트 주민들이 철조망을 치는 사회가 배달의 민족 우리나라 아니던가. 기생충이라는 영화도 그러하지 않던가. 그런데 우리가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는 일제 식민지 안광옥의 주인집은 안광옥하고 놀게 했다네.
안광옥이 2페이지에 밝힌 일제하 이야기에는 겨우(?) 이런 이야기밖에 없다. 아마 2016년 당시 한국의 분위기때문에 자기검열을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뭔가 읽힌다. 일본인들은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라고 나는 해석을 한다)
일본인 재택 가정부 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뒷바라지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안광옥은 주인집 삼형제와 놀면서 산에 다니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인에 대한(의한) 차별의식을 심하게 느끼지 않았고, 일본어만큼은 일본인 이상으로 제대로 익히게 되었다.
우리 곰곰히 이 문단을 다시 읽자. 이건 안광옥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주인집이 잘했다는 뜻이 되시겠다.
단군의 새끼들끼리도 아파트에 철조망 쳤다는 기사를 염두에 두면서, 이부분 어떤 의미일지 찬찬히 읽으면 상심이 크다.
사실 내가 그의 구술을 꼼꼼히 읽게 된 계기는 '경성고등소학교'라는 문구를 보면서이다. 나는 예전에 어느 책에서 경성고등학교 교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건물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었다. 경성'고등소학교'는 우리가 아는 양정'고등보통학교'할때의 고등보통학교하고 다르다. 검색하면 되니 글의 길이상 생략.
사실 이 문단을 찬찬히 읽어보시라. 앞뒤가 다르고 말이 안된다. 안광옥이 몇년 초등학교를 나왔단 말이지? 안광옥이 하고자 한 말을 짧게 요약하자면,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라는 것이다.
사실, 정말로 내 짐작을 말하라고 하신다면. '공립개성보통학교'가 검색이 안된다. 안광옥이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것도 사실 약간은 의심이 든다. 그게 잘못이거나 비난할 거리라는 건 절대로 아니고, 이 부분은 그의 인생에 아무런 하자가 아니다. 해방후 그가 산악계에 드리운 그늘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 글은 그냥 나의 각주이다. 일제하 이야기를 하자니 '친일' 검열을 위해 거듭해서 이런 후렴을 다는 게 피곤하네...
이부분은 앞뒤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기억의 오류이다.
식모의 아이였던 안광옥이 초등학교를 13살때 졸업하고 17세까지 백수였단 말이 될텐데, 아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 노동자 노릇을 해야 했다.
안광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주인의 소개로 사진관에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가 정확한 기억이 되리라 본다.
안광옥이 해방 후 산악계 행적을 보면, 그를 대표할 말이 '헌신', '성실' 일 것이다. 그런 성향은 일찍부터 배태된 것이라 본다. 일본인 주인도 어린 친구를 기특하게 보았다. 그는 - 훌륭하게도! 의아하게도 - 그의 인생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
195,6,70년 조선인 주인집의 잘난 남자 여자들은 식모의 아들들에게 어떻게 했을까? 식모출신의 아해들 적지 않은데, 그들의 회고를 보고 싶다. 똑똑한 식모의 아이들에게 기회를 열어준 글들, 아직 나는 견문이 좁아 보지 못했다. - 이런 걸 조선인 비하글이 아니다. 우리 각성하자는 글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게 하다니, 역시 식민지 조선 이야기는 어렵네.
논리학에서 '오류'라는 게 있다. 일제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해도, 개개의 일본인들이 그렇지는 않다. 오늘 우리는 그 예를 보고 있다. 의아롭겠지만, 일제하 일자리가 없던 시절, 조선의 여자들에게 제공된 일자리는 식모였고, 그들은 당연하게도(?) 조선인 집이 아니라 일본인 집을 선호했다.
사진관 이름은 요시하라라고 한다. 언젠가 이 사진관도 알게 되리라 본다.
안광옥은 3년 밤낮으로 카메라를 갖고 놀며 점차 사진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다. 사진 기술은 그러헀다. 그런데 '가게에서 배우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스무살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3년정도 일본에서 체류를 했다'라는 구절은 역시 기억의 오류라고 본다.
배우는 것에 한계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식모집 아들이 일본에 유학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해석이다. - 그렇지 않겠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안광옥이 그의 평생의 성정마냥 성실, 헌신으로 3년쯤 근무하여 17,8살이 되자 요시하라 사장은 안광옥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다. 이런 일화는 '씨명'사회인 일본에서는 드물지 않다. 195,6,70년 해방 조선사회에서는 이런 예를 들어 보았는가? 삼촌이 오촌당숙이 유학을 보내주는 건 '가문'사회인 한국에서 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식모집 천재아이를 유학이나 서울대 보낸 주인집의 일화가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혹시라도 이런 글에 '민족적 비하'라고 흥분하지 마시라. 씨명사회와 가문사회(남성혈연사회)라는 사회구조가 다르다는 것일 뿐이니. 가문사회 밖에는 우리 비정하잖아. 지금은 가족 바깥이 그러하듯.
'동경사진학교'라는 게 어딘질 모르겠다. 만약에 우리가 알만한 명문이었다면 안광옥은 상당시간 면담자에게 설명을 했을 거라 본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 공립개성초등학교도 검색이 되지 않는다 - 그냥 학원일 수도 있겠다.
'혼자 돌아다니며 사진 짝는 것에 비해 크게 배우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후에는 자유롭게 - 이 비용은 누가 댔을까?
나는 주인집 아재 또는 요시하라 사장말고 다른 조선인이 등장할거라 보지 않는다.
'귀국 후에는 오사와라는 조선에서 제일 큰 사진관에서 일하였다'
'3층짜리 건물로 한국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고,'
이 부분은 기억의 오류이다.
오사와, 오자와 상회는 사진을 인화하는 등의 사진관이 아니라 재료를 파는 사진 재료점으로 조선에서 제일 큰 '상회'였다. 사진점과 사진자료점의 차이는 사진점이 하나같이 2층인 것에 비해 사진자료점은 3층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연히 일본인이 주인이었다. 여기에는 다른 답이 없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오자와 상회를 '접수'했다. 이부분은 백령회의 주형렬과 연결되는데 다른 글로 적겠다.
안광옥은 그의 성격상 그리고 애초의 유학계약상 귀국해서 분명히 원래 있던 사진점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지금 이 부분은 해방 후와 혼동을 일으킨 부분이다.
'안광옥은 일본에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틈나는 대로 바우를 타고 사진을 찍었다.'
이 부분도 해방후 행적과 혼동을 일으킨 부분이다. 그는 해방 전에는 클라이밍은 커녕 북한산을 올랐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진 자료 한장도 없다.
1923년생인 안광옥은 1944년 징용으로 끌려갔나 보다. (나고야 폭격에 대해서는 네이버 블로그 B29의 일본 폭격에 대한 잡설 참고할 것)
나고야의 미쓰비시 항공제작사라고 하는데, 노동자는 2천명에 200명의 인사근태관리를 하는 사무직이라고 하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한 평범한 조선인을 생산직이 아니라 사무직이라는 거 말이다. 의외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이 역시 주인집과 사진집 사장의 힘이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그가 일본어에 능통해서일 것이다. 1940년 당시 조선인중 일본어 해독자는 20퍼센트 되었을려나.
그가 탈출하여 온 곳은 '오자와였고 이후 1950년까지 근무하였다.'
이 부분은 여러모로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일본이 미군은 막지 못했지만, 패전때까지 조선은 완벽하게 통치했다. B29 폭격 한번 받지 못한 조선은 완벽하게 경찰의 지배를 받았다. 나고야에서 탈출한 이가 조선에 돌아와 평범하게 옛 직장에 근무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이상하다. 극악한 일제는 그런 게 아니잖아. 우리가 조금 전까지 군함도의 징용공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잖아.
만주로 징용갔다 온 우리 할아버지의 예를 염두에 두면 내 생각은 이렇다. 징용은 '노예 노동'이 아니다. 계약을 연장할지는 자기가 결정한다. 안광옥은 나고야의 삶이 불안하여 더이상 회사를 다닐 생각을 접고 귀국을 결심한다. 다만 관부연락선을 타려면 당시에는 '여행증명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회사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 위조로 만들었다는 뜻일거다.
안광옥은 해방 후 미군 공보처의 사진작가로 직업을 이어간다. 안광옥은 이렇게 평생 주인집과 사진집 사장의 도움 덕분으로 길을 열어 갔다고 보아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오자와상회.
지금으로 치자면 미국의 한 IT 기업의 한국 지사라 해도 될려나. 오자와 상회-경성지점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길거리 사진점에 근무하던 안광옥이 취업할 그런 회사는 아니다라고 본다. -오해 마시라 - 그럴러면 안광옥에게 다른 뛰어난 능력이나 뛰어난 사진기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의 하나 오자와에 근무했다면, 그건 어떤 이의 후원으로 일본에 사진유학을 다녀온 까닭일 것이다. 안광옥은 평생 사진기자로 살았는데, 그의 산악사진은 어떠한지 아직 모른다.
조선 최고의 사진 자료점인 오자와는 해방후 친분있던 조선인 사진작가에 의해 '합법, 불합법'으로 이른바 '접수'된 곳이다. 그곳에 해방 후 주형렬은 방한칸을 빌어 등산 장비를 전시했다. 이후 산악인들의 사랑방이 되면서 해방후 초기 한국산악사에 이름이 언급되게 된다. 이부분은 다시 글을 올리겠다.
오늘 덥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