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옥 구술사 다시 읽기 2-2 해방직후 행보, 주형렬과 오자와상회

카테고리 없음|2021. 4. 10. 01:10

누구의 산악인생이건 언제 어떻게 어떤 계기로 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는지가 중요하겠다.

1923년생 안광옥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할까?

오늘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50년 전쟁까지의 그의 구술에 각주를 달아본다.

 

오늘의 키 포인트는 주형렬과 오자와 상회이다.

주형렬과 오자와 상회에 대해서는 다시 블로깅을 하겠다. 오늘은 그냥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이야기체로 진행한다.

 

안광옥은 해방후 충무로 사진기재점에 근무할 때 사장인 누구인지 왜 말하지 않을까요?

 

 

2016년 산악박물관의 산악구술조사 보고서중 안광옥 편에는 해방직후부터 1950년까지 역시 2페이지 정도만 할애하고 있다. 해방직후 한국산악회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활약했는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안광옥은 그때 함께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 - 앞으로 조사더해볼 내용 - 아니면 사진자료가 없어서인지 구술 내용이 아쉽다. 인터뷰어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갔으면 좋았을 법 하다.

 

안광옥의 젊은 시절 연보는 이러하다.

 

1943년(21세) 일본인이 운용하던 충무로 사진기 자재점 취업과 등반장비점 운영하던 백령회원 주형렬과 암벽등반 시작.

1945년 일제 징용으로 산악활동 중단

1946년 한국산악회 가입(회번 118번) 전문등반 시작으로 되어 있다.

 

표현이 매끈하지 않다. 암벽등반하고 전문등반하고 무슨 차이가 있지? 이렇게 혼동이 있는 이유가 있다.

그는 일제 때는 하이킹은 했을 터이지만, 전문등반(암벽등반)은 하지 않았는데도 일제까지 소급하려 하기 때문이다.

주형렬이 그 스모킹 건이다.

 

안광옥은 자기 등반의 계보와 시기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1943년, 식민지 시절 주형렬이 장비점을 운영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기억의 오류이다.

 

그 유명한 백령회 회지 중 회원명부이다.

총 14명 중 근무처가 없는 사람은 세명으로 김정태, 그리고 구두만드는 엄흥섭(창씨명도 없음, 무학으로 보임)과 함께 주형렬이다. 주형렬은 집도 누상동이다.

 

주형렬은 학력도 밝혀진바 없고, 집도 누상동인걸 보면(?) 집이 풍요로운 집은 아닌걸로 보인다. 손경석은 자기의 스승(?)격인 주형렬을 와세다대 출신이라고 한곳에서 적은 바가 있지만, 이건 날조에 가까운 걸로 보인다.  지금 이 회원명부가 작성된 때가 바로 1942년, 1943년 경이다. 무직자가 갑자기 지금의 압구정동이라고 해야할까 일본인들의 핵심 상권인 충무로(본정), 그것도 최신식 3층 빌딩의 1층을 세내어서 장비점을 한다?

 

이런 의문을 갖고 안광옥의 구술을 보자.

 

 

그냥 사진회사라고 했는데, 3층을 통으로 쓰는 조선 최고의 사진 자재점이다. 오자와 상회 경성지점이다.

오자와 상회는 일제하 조선인과 일본인 사진가들의 중심에 있었고, 사진계에 많은 후원을 했다. 회의와 강연을 할 수 있도록 몇백명이 앉을 수 있는 강당까지 있었다.

 

주형렬은 이곳에 등산장비점을 운용할 수가 없다. 손경석의 회고에도 주형렬은 해방 후 이곳에 이름뿐인 -장비가 전시용밖에 없는 -장비점을 했다고 하고 있다.

그 건물 1층에 주형렬이 운영하는 장비점이 있었다. 해방전에는 주형렬이... 라는 구절은 기억의 왜곡이거나, 안광옥이 자기의 등반입문 시기를 올리려고 의도한 결과이다.

 

여기서 오자와 상회가 해방 후 어떻게 되었는지 잠간 보자.

오자와 상회는 해방 후 많은 적산기업과 적산재산이 그러했듯이 '합법'또는 '비합법'으로 조선인이 '접수'를 했다.

 

손경석의 회상에 의한 건데, 손경석도 오자와상회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카메라부는 백령회(?)의 박종대가, 운동구부는 백령회의 주형렬이 차지했다."고 하고 있다. 사진가 박종대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아야하겠지만, 핵심상권의 3층 빌딩을 합법적으로 매입할 자본이 있었을까 싶다.

 

일제때부터 박종대는 다만 오자와상회와 교류를 했을 거라 보인다. 그렇다면 자산이 없는 주형렬은 어떤 인연으로 방한칸을 장비점 사업을 할 수 있었을까?

주형렬은 1942년 백두산 등행단때 사진을 담당했다. 그 시절 사진작가들과 교류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 결과 오자와상회의 한칸을 빌릴 수 있었을 거라 보인다.

 

지난 글에서 안광옥은 1950년까지 일본인이 운영하는 오자와 상회에서 근무했다고 하는데, 진실은 이러하다.

박종대가 운영하는 사진관 또는 사진재료상에서 근무했던 거다.

 

주형렬은 안광옥에게 로프를 빌려 주었다?

로프는 여느 장비하고는 궤를 달리한다.

 

당시 한국산악회전체를 보아도 로프가 얼마 없었을 것이다.

주형렬은 주봉을 초등한 당대의 클라이머이다. 그런데 그는 성격이 좀 까다로웠던 걸로 보인다.

주봉을 어떻게 오르는지 묻는 후배에게 클라이밍을 100번인가 하면 가르쳐 준다고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안광옥에게 이런 호의를 배풀었다면, 나는 그 이유를 주형렬이 박종대의 빌딩에 무료(?) 임차를 해서가 아닐까 싶다. 안광옥은 박종대 회사의 직원이다. 안광옥은 여느 직원은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1947년 결혼을 한 부인의 기억에 의하면 "시가는 충무로 1가의 3층 가정집"이었다고 하고 있다. 지금 이곳 오자와 상회의 3층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그냥 읽어보면 될 이야기이이다.

이곳에서는 해방 후 주형렬의 이야기이다.

 

경기고산악부와 문리대 산악부 출신 정명식의 회고이다.

주형렬 가게가 조선산악회의 사무실은 아니었지만 -당시 송석하 회장의 사무실이 조선산악회의 사무실이었다, 확인요망 - 김정태와 학생산악인들이 자주 찾으면서 중심이 된다.

 

본문에는  한국산악회를 1945년 가입으로 되어 있는데, 1946년이 맞는 듯 하다.

 

안광옥은 일제 때에도 등산을 했다고 하고 있는데, 전체적은 흐름과 이 부분을 찬찬히 읽으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모르긴 몰라도 1945년 또는 1946년 안광옥이 카메라부에 입사를 하고 난 뒤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필이면 그곳에 주형렬이 있었으니 말이다. 

 

주형렬 가게는 정명식의 회고처럼 당시 서울 산악인들의 회합장소가 된다. 인터뷰어가 이시기 좀 더 상황을 여쭈어 보았다면 좋았을 법하다.

 

그는 마운틴지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해방 전 일본인이 운영하던 명동사진관에서 일했던 선생은 근처에서 장비점을 운영하던 백령회원 주형렬씨를 따라 산으로 간게 등산을 시작한 계기였다고 기억했다."

 

앞부분은 기억의 오류이고, 해방 이후 주형렬과의 인연이 '등산을 시작한 계기'였다는 부분은 진실일 거라 본다.

 

 

 

결론: 

1923년생 안광옥의 구술사 중 일제시기는 2페이지, 해방후부터 전쟁까지도 겨우 2페이지에 불과하다.

그 내용을 여러 자료를 기초로 하여 각주를 달아 보았다.

 

안광옥은 해방 후 적산기업인 오자와 상회가 '접수'된 이후 한국인 카메라 가게에 입사를 한다.

그 빌딩의 1층에 주형렬이 들어와서 장비점-장비전시점-을 한다.

이게 인연이 되어 산을 오르고, 전문등반을 하게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