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무쌍 신식요리제법 - 방아에 대한 첫 기록

카테고리 없음|2021. 4. 27. 17:59

울릉도에 있는 명이나물도 물건너와서 먹게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향'을 탐하지 않는 민족이라서일까. 경상 우도의 향신료 '방아'는 좀처럼 북상하지 않는다.

 

오늘은 방아, 한국의 마지막 향신료 또는 허브라고 할 '방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연 '방아'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 기록되었을까라는 게 주제이다.

그리고 '생깻잎'을 언제 누가 먹었는지도 곁들어질 것이다.

 

방아는 진주를 중심으로 해서 서부경남, 그것도 일부지역의 향민들이 탐닉하는 향신료이다.

한편, 조선시대 부목군현의 장들은 토민들과 토산물에 대해 호감을 가지지 않은 계급으로 보인다.

그들은 대체로 소중화의식이 강해서 '메이드 인 중국'을 최고로 치고, 조선것은 하대했다.

 

만약에 정약용과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같은 이가 진주 쪽에 귀양을 왔더라면 모를 일이거니와,

여느 양반들의 기록에 '방아'가 들어 간 것은 많지 않을 거라 보고, 그 때도 부정적으로 묘사했을 거라 본다.

 

이제 오늘 추정컨데 '한글'로 씌여진 최초의 '방아' 기록을 만나자.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자 위관 이용기 선생은 뭐랄까 전형적인 '한량, 멋장이'인 듯 하다. '위관 이용기'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일제하 조선말과 조선음악의 정리 그리고 그리고 조선음식에 그의 흔적이 깊이 베어있다. 이 세가지 모두 진정한 한량들의 필수 전공 과목 아니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찾고 말하기 좋아하고, 흥이 나면 일어나 노래를 하고...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닌데도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맛', '말' 그리고 '흥'으로 상대방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었을 거다. 민속학자 손진태가 그를 “풍류를 좋아하여 오입쟁이로 일생을 살았다”라고 했는데, 그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는 말그대로 미식가로 보인다. 당시 좀 사는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했던 시절이라  그 역시 전국을 돌아다니다 촉석루의 예향, 진주에 들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량의 관점으로 진주를 보았다. 이 한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

 

 

 

 

 

 

늘  

 

 

고등학교 때 자취를 했다. 늦봄이었을까, 주인집 할머니가 부침개를 주는데,

독특한 향이 있어서 제대로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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