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을 찾아서 - 서울사람들은 언제부터 먹었을까요?
날도 덥고 그러하니 산에서 내려와 먹는 이야기 조금 더 하자.
제목은 '서울사람들은 언제부터 추어탕을 먹었을까요' 로 조금 자극적이지만, 실제는 추어탕과 미꾸라지에 대해 그동안 보고 들은 소소한 이야기를 모아서 언젠가 꾸며낼 재피(초피, 산초) 박물지를 위한 자료로 삼고자 한다.
ㅁ 인천사람들은 추어탕을 먹었을까?

한국 사진사의 산증인이라고 하는 김석배 선생은 1925년생으로 3살때부터 인천에 살았다고 한다. 그가 인천In에 기고한 "한여름 보양식, '인천 鰍湯(추탕)'의 도입부이다.
"해방 전까지 인천에선 유일한 추어탕집이었다.
지금 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개고기를 파는 식당은 없던 시절이다.
세간에 유명했던 이 추어탕은 실은 추어탕이라기보다는 추어가 두부에 박힌 독특한 형태의 추부탕이었다."
그의 기억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방 전 인천사람들은 미꾸라지 요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건 확실해 보인다. 서울사람들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ㅁ 1997년을 뒤흔든 김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 하다.

군대를 제대하고 한석규는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고향은 일산신도시, 백석,대화방면 버스 정류소가 있는 곳이다.
서울외곽이거나 고양쪽 입구일 듯 하다.

형하고 식사를 하는데, 메인 메뉴는 '매운탕'이고, 뼈감자탕과 함께 별미로 솥뚜껑삼겹살 1근에 9000원'이 적혀 있다. 벽에는 별미가 아니라 특별미 미꾸리탕이라는 요리가 눈에 띤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영화에서 뭐 이런게 눈에 띨까.
미꾸리탕이라. 네이버뉴스라이버러리에 검색하니 기사는 하나도 없다.
1970년내 중후반부터 추어탕(미꾸라지)가 건강보양식이라고 널리 소개되면서 추어탕은 국가급 요리가 되기 시작한다.
이 식당은 추어탕보다 조금 다른 뉘앙스를 느끼도록 '미꾸리탕'이라고 한 듯 하다.
구글검색을 해보니

현제 동대문구 제기동에 '황금미꾸리탕'이라는 상호가 거의 유일한 듯 하다.
목포에도 상호없이 그냥 '미꾸리식당'이라는 데가 있고.
ㅁ 손경석 선생님 원적은 경북 봉화인가 그런데,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 말년에는 서울의 옛 풍물을 기록하는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에 의하면 예전에는 서울사대문 안 양반들은 '비늘 없는' 물고기는 먹지 않았다고 한다. 장어가 대표적이다. 여름 삼복더위에 제일 선호한 음식은 장어도 아니고 보신탕도 아니고 '민어'였다고 한다.
짐작컨대 미꾸라지 역시 비늘이 없었고 따라서 서울 양반들은 그리 먹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ㅁ 잊고 있었는데, 군대있을 때 강화도 친구 이야기가 기억난다.
강화도에는 미꾸라지가 바글바글해서 하루 날잡고 논바닥에서 잡으면 바게쓰 한 두개 가득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왜 그리 많았을까?
그 까닭을 생각해보니 두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1) 당시 강화도 논에는 농약을 많이 치지 않았다.
2) 그때까지만 해도 강화도 사람들은 미꾸라지를 안먹다보니 논바닥에 바글바글했을 수도 있다.
내 어릴적 고향을 떠올려본다 논마다 수천수만의 개구리가 와글와글했다. 물뱀들도 엄청났다. 농약을 본격적으로 치기 전이었고, 사람들이 보신한다며 개구리와 뱀에 환장하기 전이어서 그랬다. 아무래도 강화도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미꾸라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수가 있다. 서울도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이다.

ㅁ 식탁위의 중국사는 재미있다. 중국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해서인지 저자는 그래서 '디테일'한 관심을 갖는다.
'젓가락은 왜 세로로 놓을까?'라는 의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의문을 갖기란 쉽지 않다. 한번 생각해보자. 왜 중국인들과 우리는 세로로 놓고, 일본인들은 가로로 놓을까?
저자는 책에서 '외부에서 전래된 음식에 포함된 향신료는 따로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 그럴 듯 하다. 이탈리아 파스타 요리가 인기가 있지만, 파스타에 들어가는 향신료를 우리는 다른 요리에 전용하지 않는다.
추어탕의 비린맛을 잡는 용도의 '재피'(초피, 산초가루) 는 다른 요리에서는 절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무슨 뜻일까? 반대해석상 서울식 추어탕은 서울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지 않았고, 이후 추어탕은 서울 바깥에서 전해온 음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ㅁ 서울사람들은 미꾸라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1940년 서울 태생의 소설가 김용운의 "고향"에는 한여름 천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의 남매가 미꾸라지를 잡는데, 여동생이 오빠에게 묻는다. "오빠는 미꾸라지가 징그럽지 않아?"
오빠는 '아니 괜찮아'라고 대답한다. 서울사람들이 미꾸라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엿보게 된다.
내가 자란 시골에는 비가 오면 마당에 미꾸라지가 한됫박(^^)정도 꿈틀꿈틀거린다. 한마리씩 잡는 맛이 쏠쏠하다. 나는 한번도 미꾸라지가 징그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ㅁ 물론 서울사람들도 추어탕을 먹었다.
그렇다면 경상도와 전래도권 추어탕이 서울로 입성하기 전 서울 경기권 추어탕은 어떠했을까? 전형성이 없다. 누구는 생강을 많이 넣어라 하고, 누구는 차조기(일본식 회요리에 들어가는)를 넣어라 하고 등등. "조선무쌍 신식요리제법"에서는 심지어 소의 사태살과 업진살로 육수를 만든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때 한양에도 백정들을 중심으로 '추어탕'을 먹었다고 적고 있다. 그때 추어탕은 지금하고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요리이다. 그리고 당연히 재피가루는 들어가지 않았다.
ㅁ 화가 천경자는 전남 고흥출신인데, 기자가 '가을이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이라는 질문에 '추어탕'을 언급한다. 홍어, 과메기, 간장게장 등 세상에 맛들이면 이상한 맛에 빠져들게 되는데, 아무래도 추어탕도 그런 음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 생명력이 긴 것을 보고 보신용으로 즐기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ㅁ 네이버 뉴스 라이버러러리에 추어탕 또는 미꾸라지로 검색해보면 좋다. 기사가 극히 적다. 그 기사들에 의하면 대체로 미꾸라지를 혐오했던 듯 하다. 생김새에서 뱀을 연상했던 것 같다. 1950년대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미꾸라지 살을 발라서 탕을 끓이면 무슨 고기인지 모르고 가족들이 '즐겨' 먹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1930년대 기사에도 역시 마찬가지 식으로 적고 있다.
ㅁ 예전에 한번 쓴 적이 있는데, 대구출신으로 6.25때 북한군 포로가 되어 평양근교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이가 있다.
대구는 추어탕의 한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수용소 바깥 개천(개울)에는 미꾸라지가 바글바글했다고 한다. 책을 읽은지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북한사람들은 미꾸라지를 안먹는 것 같다고 기술한 듯 하다.

네이버 뉴스라이버러리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등의 신문이 포함되어 있다.
추어탕으로 검색하면 1920년 조선과 동아일보 창간때부터 2000년까지 총 433권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1990년부터 폭증한다.
결론
예전 서울권 추어탕은 두부와 함께 하는 등, 미꾸라지 모양을 그대로 온존하여 요리를 많이 한 듯 하다.
어쨋건 소수의 미식가들에게는 호평을, 많은 이들에게는 혐오를 불러 일으킨 듯 하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홍어, 과메기 또는 간장게장처럼 향토음식 또는 소수의 미식가들의 별미음식이거나 강장음식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후반 언론에서는 추어탕을 건강보양식의 대표. 여름을 이길 대표음식으로 추앙하길 시작한다.
아마 그때부터 점점 '뱀과 닮아서 징그러운' 혐오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같다.
(추가 - 하단에 한국산악회 회원 신승모의 글을 보시길)
그때까지 서울에는 재피(산초가루)가 없었다.
향신료는 그 향신료와 함께하는 음식과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걸 염두에 두면, 추어탕은 '새로운' 음식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경상도,전라도식 추어탕이 서울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미꾸라지를 떠올리지 않도록 살로만 또는 뼈를 갈아 탕을 끓이고 재피가루로 향을 더한 방식 말이다.
그 시절 도시화와 이농현상으로 인해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들이 서울에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한 소울푸드로서도 장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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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라이버러리로 미꾸라지 추어탕 등을 더 검색해 볼 것. 기사가 얼마 없으니 흐름을 느낄 수 있다.
* 신승모 - 50년대 충청도에서 자주 먹다가 환도 후에는 뜸했던 것 같아요. 70년대 초 대학 다닐 때 낙원동 뒷골목과 천도교 교회 앞 넓었던길에 추어탕 아주 저렴하게 파는 가게들이 있었지요.
서울,경기,충청 식은 미꾸라지를 그대로 써서 씹는 맛이 좋았구요.
70년대 중반 너머 경상도 기반 기업에 취업하여 다닐 때는 100% 미꾸라지를 완전히 갈아버린 추어탕을 접하게 되 좀 이상했지요. 전라도는 어떤 식이었는지. 손 꼽을 정도로 방문한 터라. 맛있게 할 겁니다.전라도는 그대로 쓰지 않았을가요.
아무튼 추어탕은 피난시절 특식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