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산돌 키우기"를 조금 읽다가.

카테고리 없음|2021. 5. 10. 20:31

 

 

한승원의 자서전 "산돌 키우기"를 잠간 보았다.

그 시절 태생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낯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인 듯 하다.

아래는 그 중에 인상깊은 몇 장면을 모셔왔다.

 

문학동네에서 올해 펴낸 "산돌 키우기"

산돌 키우기라는 뜻이 무엇일까 싶은데, 어려서 이런 이야기를 나도 들은 것 같다.

 

여우를 만났을 때....

나는 이 이야기가 묘하게 인상적이다. 상황이 낯설지 않고 감정이 이입된다.

내 어릴적 산골의 고개, 계곡 굽이길 곳곳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산을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느 산이고 산을 좋아하는 이 많지만 그 누가 그 산 곳곳에 이런 이야기가 박혀있는 줄 알겠는가

숲 해설사와 유적 해설사의 설명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건가

우리는 그 산을 과연 얼마만큼 알고 사랑하는가?

 

산은 울창해졌다는데 글쎄다. 텅 비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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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은 학교 선생님이었다가 자신감을 얻어 전업작가로 출발을 한다.

1980년 1월 18일 입성하는데, 그의 선택지는 1979년 완공하였으나 미분양이던 은마아파트와 우이동의 단독주택이다.

 

그는 우이동을 선택했다.

그런데 우이동 어디쯤인지, 우이동과 북한산 산행 이야기를 담지 않아 아쉽다.

1980년대 소설가가 보는 북한산은 분명 달랐을 텐데 말이다.

 

여기서 은마아파트가 후보지였던 건 작가 S의 권유에서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은마아파트에 미분영된 것들이 많으며 멀지않아 금마 아파트가 될거라며'

그 시절 이렇게 재테크 개념 강했던 작가S는 누구였을까.

 

한승원이 북한산 밑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소설가로 살려면 숲 짙은 산을 오르내리는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며 휴식하고 명상과 사유를 해야 한다고" 

한승원의 북한산 에세이가 없다는 게 아쉽다. 

 

참고로 1980년대 신군부체제하에서 문인 학자 법조계 인사들로 조직된 '거시기 산악회'가 있었다. 이돈명 변호가가 주축이었는데, 한승원은 함께 하지 않았던 느낌이 든다. '거시기 산악회'는 지식인들의 모임인데도 기록이 없다. 아쉬울 따름이다. 참고로 거시기 산악회를 읽으시려면 "진보 인사들의 ‘거시기 산악회’"를 검색하면 되겠다.

 

여기서 잠간, 한승원의 아내가 말한, 197,80년대식 '전라도식 된장국'은 무엇일까?

바지락 몇개, 두부 조금, 얇디얇게 채 쓴 야채 조금으로 모양새를 낸 요즘 된장찌게는 아니겠다.

 

"은혜로운 반면교사"는 짧지만 임팩트가 상당하다.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듯. 한번 읽어 보길 권한다.

"개의 눈에는 바람은 보이는데, 눈(雪)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 구술사회에서나 가능한 말이다.

요즘 같으면 그 어느 무학자가 아니라 유학자라도 할 수 있을까.

 

집에서 개를 키우는 이라면, 개 얼굴을 잡고 눈을 마주 보면서 이 말을 한번 읇조려 보시라.

개는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세계, 신비의 의식구조를 가진 것 처럼 여겨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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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분들에게는 이정도로 소개하고, 아래는 자료삼아 앞뒤없이 모셔온 몇 장면이다. 

 

출판사가 문학동네인데도 말미에 작가의 연보가 없다. 아쉽다.

한승원은 1939년생인데 해방후 호적을 정리하면서 잘못되어 1941년생으로 기재된다. 따라서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할 때는 1957,8년 쯤 될 것이다.

 

그때 동아리의 이름이 배구반, 축구반 탁구반 체조반 생물반...이런 식으로 '반'이다.

이런 '반'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가 퇴행할 때마다 등장하여. 유신체제나 5공때 대학산악부도 '산악반'이라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근원은 언제일까. 바로 태평양 전쟁으로 돌입하면서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아리는 '부'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었다. 총동원체제로 들어가면서 '반'으로 바꾸었다. 그때의 잔재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고, 다음에 필요할 때를 위해 이렇게 일단 적어 놓는다) 

 

한승원은 장흥읍내의 중학교로 진학한다.

"자취생을 제외하고는 반 학생 구십 퍼센트 이상이 고기반찬과 샛노란 김치와 달걀 반숙이 든 쌀밥 도시락을 지참하고 있었다"

 

1939년생(호적상 1941년생)으로, 전쟁이 막 끝난 50년대 중반 전라도 깡촌 장흥 읍내 중학교의 실정이 과연 이랬을까?

시인 김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에 대한 이 일화는 조금 더 이어진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분 "일본인 차장이 일등 찻간에는 조선인이 탈 수 없다고 막아섰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반상의 구별, 신분제 폐지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기차였다. 계급이 아니라 돈있는 자 1등칸에 탈 수 있던 걸 보면서라고 하는데, 이 구절은 한번 찾아보아야겠다.

'세치 오푼 저 너머에 저승을 안고 사는 것'

'나를 이 어둠 속에 묻어 놓는 것도 나이고, 나를 그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도 나이다.'

한승원의 '분투'

통학단이라는 용어.

 

'감재 찐다'라는 표현도 처음 만난다.

 

감재라는 게 무얼까 싶어 검색하니 감자의 전라도 방언이다. 붓감재, 감재, 하지감재 북감재 등으로 불렀다.

심지어 감자의 원말은 감저( )라고도 보는가 보다.

따라서 이 유래가 어디서인지 알 수 있다.

검색을 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할때는 '감탕', '감탕소리'의 감(甘 아마도)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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