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의 혼불.... 남원 양반댁 결혼식 신부의 옷입음새는 이렇습니다.
대하소설 중에 서두부터 압도되기는 최명희의 '혼불'이 으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1930년대 전라북도 남원의 양반가 결혼식에 대한 세세한 묘사 때문이죠. 그때도 제게는 '팩트'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등산을 나름 학(學)으로 보고자 하는 터라 이런 경향은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유명한 이가 쓴 산행에세이라도 팩트가 들어 있지 않고, 산에서 떠오르는 고상한 단상이 중심인 산행에세이들로부터는 점점 멀어집니다. 오히려 B급 책자들에 더많은 자료들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월간 산도 그러하고 제자를 붉은 색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혼불만큼은 빨간 색이어야 하겠죠.
저는 최명희의 혼불을 지금처럼 10권짜리 한길사 판본이 아니라 오래전 동아일보사 창간 60주년 기념 2000만원 고료 장편소설 당선작으로 보았습니다. 한길사 판본으로 보자면 1권과 2권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랫만에 "혼불"이 눈에 띠길래 결혼식 장면, 그 중에 신부가 어떻게 옷을 겹처 입는지를 찾아 자료삼아, 소개삼아 여기에 올려 봅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서두의 결혼식 장면 중 신부가 옷입는 장면이 3,4페이지에 달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네는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고쟁이를 입고, 그 위에 또 너른 바지를 입었는데, 너른 바지 위에 대슘치마를 입었다. 대슘치마는 모시 속치마였다. 모시 열두 폭에 주름을 잡아 만든 이 속치마의 단에는 창호지 받친 흰 비단이 손바닥만한 넓이만큼 대어져 있어....."
"그 대슘치마 위에, 드디어, 속옷으로는 마지막인 무지기를 입었다. 무지기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모시 열두폭을 층층히 폭을 넓혀가며 한 허리에 달아 붙인 것이라, 예닐곱가지나 포개 입은 속옷 위에 더욱 더 부하게 부풀어보였다.... 그것은 삼층짜리도 있고 오층짜리도 있는데, 신보옷이라 효원은 호사스럽게 일곱층짜리를 입는다. '무족'이 치마라서 무지기인가 무지개같이 물들어서 무지기인가.
"무지기 위에 다홍치마를 입히며 수모인 당숙모는 발원 축수하는 사람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래 옷을 치장하는 것에 비하여 윗도리는 오히려 허술했다. 살빛 같은 연분홍으로 물들인 명주 속저고리 하나를 입고는 그 위에 바로 초록 삼회장 저고리를 입었다. 나비처럼 가벼운 저고리였다.
그리고는 끝으로 도포보다 커다랗고 호화로운 다홍의 활옷을 입고, 붉은 공단에 심을 넣어 봉황 무늬를 금박으로찍은 대대를 띠어 단단히 묶었다."
등산에서도 옷입는 것은 레이아웃(layout)이라 해서 한겹한겹 겹쳐 입게 됩니다. 특히 겨울산행에서는 말이죠. 산행에서 입는 옷을 이렇게 섬세하게 쓴 글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워킹 산행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일이라 이렇게 디테일을 보여주는 글은 쓰기 어렵습니다. 대신에 심리묘사는 이렇게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한걸음한걸음 거북이처럼 올라야 하는 암벽등반은 다릅니다. 암벽장비들의 다양함이나 용도 등에 대해서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하는 글도 구사해 봄직 합니다. 그냥 '카라비너 - 로프와 장비를 연결하는 도구'식으로 짧게 쓰는데 그치지 말고 말이죠.
산행 에세이도 이런 식으로 '팩트'를 중시하여 쓰면 또 먼 훗날 세월이 흘러 좋은 사료가치가 될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족인데요. 나라가 망해도 지방 양반들은 저렇게 해서 결혼을 했군요. 1919년에 태어난 우리 할머니는 13살이라던가 그렇다면 1932년, 혼불의 여주인공과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합니다. 혼수라고는 뭐가 있었을려나. 결혼식 당일 신부옷이라도 제대로 입었을려나. 분칠이라도 제대로 했으려나.
결혼에 대해 무슨 기대같은 것이 있었을려나. 낯선 집으로 간다는 불안감 말고 말이다. 동네에 있는 가마타고 이웃마을 총각한테 결혼을 했더라죠. 신혼살림이라고는 밥그릇 2개 국그릇 2개였다고 할아버지는 회상을 하곤 했습니다. 이런 까닭도 있어서이겠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민족이라는 말보다 '계급'이라는 말이 더 '살갑게',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