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동국대 산악부는 어떻게 해서 에델바이스를 알았을까요?

카테고리 없음|2021. 6. 11. 00:41

한국에서 시민들이 에델바이스를 알게 된 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때문입니다.

그 영화로 인해 설악산 곳곳에 에델바이스가 자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에델바이스는 설악산을 대표하는 기념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문 산악계는 어떨까요?

1950년대 동국대 산악부의 설악산 원정대 기록에 에델바이스가 나옵니다.

마등령 즈음에서 에델바이스를 채취하여 외설악 입구에서 이화여대 산악부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내용으로 기억되는데요.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에델바이스를 알았고, 에델바이스가 고산의 상징 또는 전문산악의 상징이라는 걸 알게되었을까요?

 

1950년대 당시 미국측에서 수입된 산악관련 영화에서 알았을 수도 있겠고요.

그 이전 산악영화 특히 동맹국인 독일에서 제작한 산악영화가 유행했던 일제시대의 유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풍경 1938-일본의 시선으로 본 한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만들었는데요. 이 이전에 이 사진을 찍은 이가 이이야마 다츠오일거라는 추정을 하는 글을 블로깅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지금 이 사진은 부전고원과 부전호를 찍은 사진이다.

부전고원 등 북한의 고원은 수많은 꽃이 만발하여 그쪽이 고향인 박철암 교수는 꿈에도 그립다고 적고 있다.

 

그 중에 화려한 꽃이 아니라 소소한 이꽃을 선택하여 고원의 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원어로 うさきゆみ花(우사끼 유미)라고 했는데, 일본어 사전에 나오지 않으니 번역자가 고원의 꽃이라고 했다.

분명 에델바이스이다.

얼마전 일본의 전화카드를 놓고 쓴 글 - 솜다리, 에델바이스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에 의하면, 철자가 うすゆき(우스유키)가 정확한 철자이다.

 

 

 

그러니까 동국대 산악부가 1950년대 설악산 등반에서 에델바이스를 알게 된 건 이렇게 추정한다.

에델바이스는 조선시대때에는 약재로서 알려져 있지 않은 걸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때 등산 뿐 아니라 여행을 좋아한 이들은 에델바이스를 알게 된다.

게다가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독일의 산악영화는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독일 군대의 한 축이었던 산악부대의 상징이 바로 에델바이스였다.

 

해방 후 새롭게 태어난 대학산악부원들이 에델바이스를 알게 된 건, 

김정태 등 일제와 해방후 산악계를 링크하는 선배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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