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가 해방전후를 보내는 방법 1

카테고리 없음|2021. 7. 21. 18:29

1945년 해방조국의 한국산악회는 과연 일제 조선산악회를 계승했을까요?

격렬하게 단절하고 새롭게 태어났을까요?

 

해방후 한국산악회와 일제하 일본인의 산악운동과의 거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백령회가 해방 전후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어느정도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로 저간의 사정과 맥락을 원거리에서 조명해 보겠습니다.

김정태는 해방후 조선산악회의 공식관계를 "등산 50년"에서 이렇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바쁜 속에서도 산악회 발족과 그 운영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정 때 있은 조선산악회 하라구치 간사장, 이이야마 다츠오, 가토 등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방현, 박래현 나 셋이 만나 100여권 장서와 기록물들을 인수했으나 이것은 조선산악회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발족 한인 자립의 산악회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해서 받았을 뿐이다"

 

이 문장은 간단히 해석할 문제가 아닙니다.

1) 우선 시점이 문제입니다.

한국산악회가 발족한 1945년 9월 15일 이전인지 이후인지도 소홀히 할 것은 아닙니다. 

2) 그리고 어디에서 만났는지도 당시 주도권을 어디에서 지고 있는지를 밝히는 간접증거가 될 것입니다.

3) "인수했으나"의 해석은 아주 중요합니다. 

 

 

손경석은 "한국산악회 50년사"에서 1)"해방이 되자 며칠만에"라고 적고 있습니다.

2) 김정태의 말의 뉘앙스는 연락이 와서 조선산악회 사무실에서 만났을거라는 내용입니다.

손경석은 조선산악회 간사장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3) '인수'를 '김정태는 단순히 책과 비품들 인수에 그친다고 하는데,

손경석은 산악회 인장까지 언급하고, '산악회를 인해 달라며 아무쪼록 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고 합니다.

 

진실은 어디쯤에 있을까요?

 

 

우리는 해방되기 직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하던 무렵으로 돌아가볼까요.

백령회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인 1942,3년부터 1945년까지 말이죠.

 

한국산악회는 2015년 창립 70주년을 맞이하여 원로와의 대담 자리를 만듭니다. 그 내용이 9.10월 합본호에 실려 있는데요. 해방 전 경기중학교 산악부에서 활동했다고 하는 정명식의 회고가 있습니다. "1943년 백두산 탐험 캐치프레이즈가 '영미를 쓰러뜨리고 일본이 승리해야 한다"

 

지금 말하는 1943년 백두산 탐험이라 함은 1942년과 연이은 1943년 백두산 탐험은 이른바 총독부가 진행한 백두산 '연성' 등행입니다. 지금은 금기어인  '연성'이라는 용어가 저 등반의 성격을 다 말해줍니다.

 

태평양 전쟁 즈음해서 야구 등 귀축미영의 스포츠와 영어는 일본에서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등산은 군인 양성을 위한 신체 정신훈련의 성격이 있기에 형태는 남아 전시총동원에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데,

 

일본인 산악인들은 징병으로 만주로 중국으로 남양으로 끌려간지라, 1942년 총독부가 진행한 연성 등산, 특히 백두산 연성에는 백령회의 조선인들이 단연 앞장서서 활약을 하게 됩니다. 특히 김정태는 '진행간사'로, 주형렬은 사진 담당으로 이끌어 나갑니다. 그래서 1942년과 1943년은 어쩌면 백령회로서는 가장 화려한 시절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지리멸렬한 조선산악회의 핵심으로 산악운동의 독자성에도 자신감을 얻어 금요회도 운영하죠.

 

그러다가 덜컥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는 해방을 맞게 됩니다.

백령회에게는 위기이자 기회가 닥친 겁니다.

 

원로회원 남행수 선생과 한국산악회는 1990년대 초 인터뷰를 합니다.

그 대담을 정리하여 월보에 싣고 있는데요.

 

패전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떠날 때 소지할 수 있는 품목은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가 다였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추후 확인요망) 따라서 그들이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은 팔거나 은닉하거나 무상으로 넘기거나

아니면 조선인들로부터 '접수'를 당해야 했습니다. '접수!'

 

일본인 개인재산과 기업의 합법, 비합법 '접수'가 횡행하게 되는데요. 대체로 비합법이 많았다고도 합니다. 

일본인들의 조선산악회는 자체 비품과 '역사'를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그 이야기를 위에서 김정태는 몇줄 이야기로만 남기고 있습니다.

백령회원이 아니었던 남행수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 종로3가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2층(김정태가 말하듯, 엄흥섭의 회사가 아니라!)에 김정태씨가 사무실을 차려놓고 있었어요. 제가 조선산악회에 접수하러 가지 않겠느냐 하니까 내가 백령회 멤버가 아니라 기피하는 태도 같아요. 한국산악회 조직할 때도......"

 

남행수가 조선산악회를 불법(탈법, 폭력)적으로 접수하러 가자는 제안에 김정태 등 백령회원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시 접수는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현상인데 말이죠. 안광옥의 사장과 주형렬이 각각 접수(?)했던 오자와 상회가 산악계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예이죠.

 

그런데 왜 동의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들이 조선산악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들의 위상이 스스로 어떠하다고 생각했는지에 달려 있을 겁니다.

 

저는 굳이 '얼굴 붉히고' 접수하지 않아도 조선산악회가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라 봅니다.

1944, 1945년 당시 조선산악회는 사실상 개점휴업인 상태였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조선산악회 상층부의 엘리트들과 교통국으로 대표되는 공무원들은 등반이나 산악연구를 할 엄두도 못냈을테고,

젊은 클라이머들이라 해 보았자,

일본인들은 거의 징병되었을거라 보아도 무방하고 겨우 남아 있는게 백령회 조선인들이 주류였으니까요.

 

1942, 1943년 백두산 연성을 조선인들이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자,

그들에게 조선산악회의 깃발을 맡기고 떠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산악인들사이에 그정도의 신뢰가 쌓인거죠. 

 

제 추정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해방 전 이미 조선산악회는 개점휴업상태였다.

백령회로 대표되는 조선인들은 징병과 징용을 피하고(사실상 국내 징용으로 대체) 등산운동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패전후 어떤 것도 갖고 갈수 없었던 일본인 상층부 집행부는 안심하고 '인장과 깃발'로 대표되는 조선산악회의 계보를 넘겨주려 한다. 

김정태는 명예와 전통의  '조선 산악회'를 인수한다.

 

그러나 상황파악에 민첩한 김정태는 '조선산악회 인수'와 함께 다른 생각을 품는다.

자기들로서는, 자기들의 재력과 인맥으로서는 당당히 세상에 명함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조선산악회와 같은 형태의 새로운 국가대표 산악회를 표방한다.

상충부는 엘리트, 오피니언 리더로 꾸려진 회장단과 이사진으로 앞세우고  실무는 간사진이 맡는데 알다시피 백령회원들이 장악한다.

 

이어 회장과 이사진을 구성할 조선인 엘리트들을 포섭하러 다닌다.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송석하, 현동완 김상용 등을 포섭하고 9월 15일 창립하게 된다. 이게 창립당시 조선산악회의 대진표였다.

 

비록 대외적으로 얼굴은 셀레브리티들을 내세웠지만, 

새로 태어난 조선산악회의 핵심은, 한반도에서 산악운동의 주류와 역사와 권위는 자기들 백령회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구 조선산악회 회원이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즉 그들은 단절론자들이 아니라 계승론자들이었다고 본다.

그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과연 무엇일까.

 

2편으로 이어집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