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이 기억하는 김정태와 백령회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카테고리 없음|2021. 7. 26. 12:48

 

세브란스 의전 산악부를 창설하고 일제하 열정적으로 등반을 한 방현은 1919년생이다.

김정태가 1916년생이니 3살 어린데, 일제하 그들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오늘은 그가 1990년대 초 한국산악회와 인터뷰를 한 기록 일부를 보자

김정태의 '흐릿한 기억'과 '자의적 왜곡' 그리고 이에 편승한 우리의 평화로운^^ 산악계를 짚을 수 있다.

 

김정태는 과연 백령회 창립 멤버인지, 백령회는 1930년대에 창립되었는지,

우리는 이제 거의 모든 자료가 증명하는 바, 이 거짓을 인용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하 자료는 서울대 농생대 산악부 OB인 홍하일 선배의 제공

1991년경 한국산악회는 야심차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 원로회원 탐방의 시간을 갖는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짧게나마 월보에 올리고 오늘 우리는 그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이 자료를 벌써 몇번을 읽었는데, 이제까지 오늘의 주제에 맞는 구절을 눈여겨 보지 못했다.

역시 시절인연이라는 게 있는가 보다.

 

그는 인터뷰에서 꿈 하나가 "책 하나 내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자료도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브란스 의전 산악부를 창설하고 일제하 열정적으로 등반을 한 방현은 대학산악부에서도 잊혀진 인물이다.

2014년 나온 "연산 86년사"에는 그의 흔적을 본 기억이 없다.

연세산악회에 의하면 1928년 창립사료 발견을 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사료 몇장보다,

명확한 실체가 있는 방현의 풍부한 기억과 자료가 더 중요했을 텐데 말이다. 없다.

 

방현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로 활동했으니 아직도 자료는 분명히 후손에게 남아 있을 거라 본다.

산악계에서 정말 필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방현은 해방되던 해 조선산악회 창립에 힘을 보태다가 11월 경 의학공부 때문에 산악계를 떠난다.

이후 중앙 산악계에는 다시 관여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산악계에 대해 과거의 기억에 고착되어 있는 그가 기억하는 백령회와 조선산악회를 보자.

김정태는 등산50년에서 1937년에 조선산악회에 입회했다고 하고 있다. 대체로 1937년 또는 1938년으로 추정된다.

추천한 이는 그를 물심양면으로 뒷배를 봐준 일본인 이시이였다고 하고 있다.

 

조선산악회에 언제 입회했느냐는 질문에 방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인으로서는 내가 처음(먼저- 인용자 주)했고, 8개월 쯤 후에 정태가 들어왔지요.

김정호도 좀 늦게 들어왔는데, 그때 우리 선친이 조폐공사 사장을 지냈어요

그러한 연유로 나하고 일본사람하고는 쉽게 관계를 가질 수 있었죠.

이이야마 하고는 부전공이 같은 관계로 친해지게 되었고.

 

 

자 이제 하나씩 찬찬히 보자.

그의 기억과 입회에 관한 김정태의 두루뭉실한 기억 중에 나는 전자에 동조한다.

 

방현의 기억에 의하면 조선산악회에 그가 김정태보다 8개월쯤 전에 입회했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군번 따지기 좋아하듯이, 이 기억은 아마 정확하기 쉽겠다.

 

왜정 시대에 부친이 조폐공사 사장을 지낼 정도의 집안 배경과 학력으로 인해,

조선산악회 입회가 쉬웠고, 조선산악회에서도 환영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김정태가 이시이를 통해 입회했지만, 방현은 다른 채널이기 쉽겠다.

 

방현은 조선산악회에 몇년도에 입회했는지는 아쉽게도 밝히지 않고 있다.

1919년생 방현은 경복고(당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나오고 1937년 4월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했다.

경복고때 등산을 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고, 입학후 곧바로 의전 산악부를 만들었다고 하자.

이 경력으로 인해 그는 조선산악회 입회가 가능했을텐데,

8개월 후라고 하니 김정태는 빠르면 1937년이 될텐데 아무래도 1938년에 조선산악회에 입회했을 것이다.

김정태가 조선산악회에 입회한게 1938년 설도 있으니 이것도 아마 간접증거가 될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정적인 말을 한다.

우리가 기수 따지기 좋아하듯이 방현은 몇 년 후에 백령회가 결성되었다고 하고 있다.

 

"김정태, 김정호, 엄흥섭과 내가 조선산악회에 입회하고 몇 해 후에 백령회가 결성됐지"

 

방현과 김정태는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조선산악회 회원이었으니, 굳이 실력도 변변찮은 조선인들이 만든 소규모 클럽을 따로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백령회는 양두철의 기억대로 창립 당시 김정태는 없는 게 당연하다. 김정태는 자기가 창립회원이라고 하는데, 그게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다. 격에 맞지도 않고. 해방된 이후에야 그게 좀 그럴 듯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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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산악계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필요에 따라(?) 기억을 다듬는 사람하고,

젊은 시절 치열하게 산행을 하고 산을 떠난 이의 기억하고 어느것이 순도가 높을까?

 

나는 방현의 기억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이 기억은 사실 1952년 나온 라테르네 2호에 김정태가 36살 무렵 회고한 백령회 창립시기하고도 맞아 떨어진다.

이부분은 '발굴) 백령회는 1938년이 아니라 1941,2년 만들어졌습니다.'로 검색하면 된다.

젊은 김정태 역시 1941,2년 경 백령회가 만들어졌다고 적고 있다.

 

자 이제 우리 명확히 하자.

백령회는 1941년 전후(이것도 거의 확실하게 고증 가능함)에 창립되었다.

그 이전의 행적과 그 이후의 행적도 그의 고증이 가능하다.

그동안 많은 자료로 입증을 시도했는데, 백령회의 1937년 창립 가설을 받아쓰기 하는건 그만하면 좋겠다.

 

 

세상 일이라는 게 빠르다고, 앞당긴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니고,

개인의 삶이라는 게, 민족의 외피를 두른다고 더 근사해지는 것도 아니다.

산악운동에 있어서 해방 전 그들의 행적이 설사 그들의 말하고 다르다 해서 폄하되어서도 안된다.

해방 후 그들이 걸은 걸음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해방 후 행적조차 사실은 약간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이 시리즈의 끝무렵 - 곧 -에 밝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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