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종결1) 해방후 백령회는 왜 호명되지 않았을까요?
이 글은 백령회와 해방 이후 조선산악회의 실체 3부작 중의 첫번째이다.
'한국산악회는 백령회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조선산악회의 법적 지위와 역사 그리고 권위를 양도양수했다.
김정태를 위시한 이른바 백령회원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는 커녕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라는 게 주제이다.
부디 바라건대 "한국산악회 70년"의 서문에서처럼
'조국 광복과 함께 시작한 한국산악회는 그 뿌리를 백령회에 둔다"라는 당당한 선언에 대해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어하지 않은 이라면 여기서 더 읽어서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돈도 안되는 이야기를 읽고 굳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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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키아누 리버스에게 파란알약과 빨간 약을 꺼낸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처럼 믿고 싶은 것만 보며 거짓의 세계에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살 것이고.
빨간 알약을 선택하면 진실을 '직면'할 것이며, 그 진실은 고통일 것이라며 말한다.
지금 이 이야기는 그런 거창한 담론에 어찌 견주자는 것이겠는가.
어떤 변방에 서 있는 이가 중얼거리는 게 어쩌면 진실의 한조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우리가 간절하게 '그때 그랬더라면 지금 우리가 좋을'식의 백령회가 아니라도 괜찮아.
뼈대있는 족보가 아니라 하더라도 해방 후 우리 산악회는 충분히 자랑스러워.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정태가 있었다. 그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지금 이 흐릿한 사진은 국립산악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산악회전"의 자료 사진 중 한장이다.
1946년 6월 한국산악회의 소장도서 및 비품 목록이다.
오른쪽 빨간 원은 소장도서의 출처이다.
원래 이 자료는 손경석이 맡아 쓴 "한국산악회 50년사"에도 실려 있다.
화면이 흐릿했지만, 감사해라. 스마트폰의 놀라운 화소 능력으로 읽을 수 있다.
1946년 당시 해방된 조선산악회의 도서와 비품은 저리도 초라했다.
그런데 그나마 그 출처는 어디일까?
1946년 당시 조선산악회의 재산목록은 이렇다.
도서에는 학술 연구 조사서 24권, 회지 7종 70권, 산악문학기행 17권, 등산기술서 5권, 월간지 4종 21권 사진작품 및 포스트 등 모두 217권에 이른다.
기구비품에는 책장 장탁자 지필구 흑판 등사판 천막 회간판 부삽 톱 등 36개의 비품이 기록되어 있다.
놀라지 마시라.
기증인 리스트에는 그 유명한 백령회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인들의 결사체로 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산악회'에 대항했다는 백령회가 아니던가.
해방 조선산악회를 주도한 건 회장단이 아니라 간사진이었다.
그런데 이 간사진은 김정태를 위시하여 거의 전원 이른바 백령회 소속이다.
엄흥섭 회장은 재력이 있어서 김정태 등 4명을 일본에 스키유학을 보낼 정도였다.
그런데도 왜 백령회 소장 도서와 비품은 단 하나도 없을까요?
이걸 어떻게 해석할래?
해방 후에는 '어디서 불법적으로 접수를 해서라도' 당당하게 내어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백령회의 활동에 대해 생색 내려면 적어도 책 한 권, 탁자 하나는 내어 놓아야 하지 않은가.
지금 이 서류는 1949년 엄흥섭 사후 4주기를 맞아 당시 조선산악회 회장인 현동완과 김정태 등
이른바 백령회원들이 주동이 되어 추모제를 연다는 글이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어디에도 백령회라는 단어는 없다.
엄흥섭은 누구인가?
백령회 회장이면서, 일찌기 식민지 시절, 곧 해방이 된다고 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한 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왜 백령회 이야기는 없을까?
현재 공개된 1940년대 해방 이후 그 어떤 자료에도 백령회라는 단어는 찾지 못했다.
식민지 시절도 아니라 금기어도 아닌데 왜 그럴까?
왜 그럴까요?
왜 김정태를 위시한 이른바 백령회원들로 이루어진 간사진들은 왜 백령회를 언급하지 않을까?
백령회라는 자랑스러운 단체명을 통해 정당성과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백령회는 혹시 그때까지는 '호명될 필요(?)' 수 없는, 실체가 없던 단체는 아니었을까를 의심해 보자.
서울대 농대 산악회 OB인 홍하일은 2015년 1월, '백령회의 고 이재수가 보관해 왔던 백령'이라는 블로그의 글이다.
여기서 www.re-rock.com은 은 내가 운영하던 홈페이지이다.
백령회에 대한 의문은 지금 불쑥 생겨난게 아니라 이미 그시절에도 의심을 했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김정태의 일기가 있다.
그 일기에 대해 한국산서회 회원인 조장빈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키워드 중시으로 초벌 번역 정리한 자료가 있다.
김정태는 일제하 일기에서 왜 엄흥섭을 회장이 아니라 주석(主席)이라고 했을까?
이것도 궁금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른바 백령회는 서로 회합을 하면서 서고 정리도 하고, 도서관 자료 정리도 했다는 기록의 편린(완역이 아니라 현재로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는 없다)가 있다.
그런데 왜 해방 후 조선산악회에 당당히 양수양도가 되지 않았을까?
조선 경성은 미군의 B29 폭격을 받아 훼멸되지도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946년 비품자료를 보면 그들이 보았던 자료와 서가는 충무로에 있던 조선산악회 사무실에 있던 것이기 쉽다.
1943년 전후해서 김정태 등 조선인 암벽 등반가들은 조선산악회의 주력군으로 맹활약을 하고,
그들은 조선산악회원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회의 사무실에 들락날락했을 것이다.
홍하일에 의하면, 심지어 엄흥섭, 방현, 김정호, 김정태 등은 42년이 되기 전에 굳이(?) 일본산악회에도 가입을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른바 일본인들의 조선산악회에 '대항'하는 조선인들의 모임이라는 백령회라는 증언은 의문이다.
백령회는 조선산악회원 김정태의 제안에 의해, 엄흥섭, 양두철, 주형렬 등 엄흥섭 그룹이 조선산악회에 가입하고,
조선산악회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의 소모임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에 다시 이부분은...
자 이제 다시 정리해보자.
백령회가 조선인의 결사체라는 주장은 오직 1950년대 이후 김정태로부터 시작된다.
해방전후 다른 많은 자료는 그와 다른 방향을 가르킨다.
심지어 그들이 한국산악회를 좌지우지하던 해방 직후에 그 자랑스러운 백령회는 호명되지 않았다.
현재 취합할 수 있는 여러 자료에 의하면 1940년대 백령회 이야기는 없는 걸로 보인다.
왜일까?
백령회라는 단체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들이 백령회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그 실체가 독립적이지 않아서이거나,
일본인들의 조선산악회의 소모임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대신에 일본인들의 조선산악회와의 연관성은 다르다.
1945,6년 당시 그들은 조선산악회와의 커넥션을 은폐하려 들기는 커녕 은근히 자랑하려는 모습도 엿보인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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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이맘 때 발생한 황당무개한 사건으로 인해 시작한 백령회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그 시절 한달여만에 끝내고 책으로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게으르기도 하고, 술자리 가쉽거리로 자리잡기를 원하지 않았고,
해방 후 김정태의 고군분투에 대한 나의 존경이 왜곡될 가능성이 높아 일부러 뜸을 들여 늦추었다.
그 와중에 애초 품고있던 몇몇 디테일의 팩트 교정이라는 '선'. '금기'를 넘어버렸다.
마치 영화 어퓨굿맨에서 톰 크루저가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시작은 장난이었는데,. 백령회의 실체와 한국산악회의 출발에 대해서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어졌다.
다음에 이어질 두편의 글의 주제는
'한국산악회는 백령회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조선산악회의 법적 지위와 권위를 양도양수했다.
김정태를 위시한 이른바 백령회원들은 이 사실을 은폐는 커녕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이 정황증거를 내보이겠다.
나의 궤변은 이제 이렇게 선을 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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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1935,6년경 김정태는 인수봉을 오르고 친구들과 산악회를 만든다.
산악회라는 게 만들기 어려운 그런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2. 현재 남아있는 '백령' 일지에 의하면 백령회는 이른바 '금요회'를 조직하여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책은 일본인이 쓴 그 유명한 '암등술'이다.
그 책은 백령회 소유가 아니었을까?
'뜻을 같이하던 동지를 부르고 찾아서'라는 1945년 조선산악회 결성취지서와 달리 왜 내놓지 않았을까?
기껏 100여권에 불과한 장서인데 말이다.
3. 간사진이 회를 주도하는 것은 일제하 조선산악회와 똑같은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