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의 까마귀떼, 그들의 수학여행.

카테고리 없음|2021. 7. 28. 15:21

이리역의 까마귀떼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익산시에서 교육이라는 관점으로 근대를 사진으로 정리하는 작업인데,

여기에는 여행 정확히 말해 수학여행의 여러 면면들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합니다.

 

이런 작업이 다른 시군구에도 전염되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서 압권(!)은 바로 이 길지도입니다.

1940년대 이리시내라고 합니다.

1940년대 이리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다무라 토시코가 강제로 떠나간 뒤 2006년에 그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1923년 이리출생으로, 말하자면 패전후 떠나갈 때, "왜 내 고향에서 떠나야하지"라고 울었을 겁니다.

일제시대 조선에서 나고 자라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일본인들에겐 꿈에도 그릴 고향이 조선의 산과 들이죠.

이들에게 조선은 '경멸과 착취'의 기억이 아니라 추억과 향수의 기억이 많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모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가시적인 효과를 담은 책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사실 이 지도가 너무 부럽습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부경남의 함양과 고등학교를 나온 진주에도 적지않은 일본인들이 살았을텐데,

그들이 고착화된 40년대의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 지도를 그려서 선물로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를테면, 진주 배영초등학교는 일제시대때 일본인학교인데, 최근까지 졸업생들이 일본에서 동창회도 하고,

한국에 와서 추억을 되새기기도 하고 그러죠.

 

그들의 디테일한 기억은 사실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가 되찾으야 할 우리의 일상사, 근대역사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루가 바쁘게 변하는 와중에 살아왔기에 어느 한 시기를 단층적으로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저는 내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할아버지 이전의 먼 나라, 조선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은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걸어 다녔을 그때 그 길과 도시배치가 궁금합니다.

 

 

"익산지역 학생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부여수학여행이 많았다.

가까운 이유도 있었지만 백제 패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기 위한 목적도 없지 않았다"

 

해방된 지 벌써 7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해설은 글쎄요 저는 안타깝습니다.

 

지금이야 명승고적이라 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적명승'이라고 했습니다.

'학습'하지 않는 맨눈으로는 명승을 보기란 쉽지 않고, 그런 까닭에 고적이 앞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익산 주변에 부여말고 또 어느 고적지가 있었을까요?

수학여행은 그냥 볼만한 곳에 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지금 제주도에 가는 고교수학여행단의 대상지 중에 패전국 일본의 흔적이 있는 곳이 있을까요?

일본에 가는 수학여행단 중에 히로시마의 참상을 보러 가는 학교가 있을까요?

개명하고 해방된 국가의 우리 교육당국은 반전과 평화의 아이콘을 찾아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교 있을려나!

 

 

보시다시피.,

익산의 모든 학교는 명승지가 아니라 고적지에 수학여행을 갑니다.

금산사. 부여, 서울. 그리고 중학교때는 속리산이나 경주으로

고등학교때는 제주도나 설악을...

만약에 택도 없는(?) 곳을 선택했다면, 학생들이 고분했을까요?

 

경주 쪽을 택하면 부산이나 울산까지 둘러보는 코스가 대부분이라고 하는데,

이는 말그대로 정치적 의도가 다분합니다. 울산의 산업단지 관람을 통해,

선진조국과 중화학공업,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 고조라는 딱 그 컨셉이죠.

 

이리농림학교는 대단했죠.

글에서 보다시피 진주농고 수원농고와 함께 일제시대 전국 3대 농업고로 뽑혀 전국에서 지원왔습니다.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되었고요.

5,60년대만 해도 서울대 나와도 취직이 안되던 시절입니다.

우리가 명문이라 할 때 그 명문의 암묵적 정의- 취업! -에 이리농고는 정확히 부합니다.

 

그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실, 일제시대 경성제대도 예과는 강제 기숙사생활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대학의 추억의 중심은 기숙사이고, 기숙사가인 "료가'가 추억의 시발점입니다.

김영도 선생도 해방 후 입학한 서울대의 기숙사 노래를 기억한다던가....

 

지금 고교 또는 대학교에서 이렇게 보트연출하는 사진이 있을까 싶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섬나라여서 그럴까요? - 일제 때는 보트 연출이 많더라고요.

 

일제시대에는 세종류의 학교가 있습니다.

일본인 전용, 한국인 전용 그리고 이른바 내선공학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반반인 정책적 학교가 있죠.

내선공학이 아닌 다음에야 일본인학생과 조선인 학생은 서로 '친구'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동선이 겹쳐지도 않고.

(지금 목동 아이들하고 강남 아이들이 서로 친구될 가능성이 0퍼센트이듯이 말이죠)

 

내선공학 학교는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사적인' 추억은 어떠한지 사실 많이 궁금합니다.

1970년대 해인사와 불국사 중요한 수학여행 코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까닭은 무엇일까요?

 

적당히 멀고, 기차여행을 하고, 고적지이고, 뭐 그런거 아니겠어요.

일제시대 수학여행지를 두고서 조선인들에게 '패전의식'을 심으주려는 의도이니 하는 뭐 이런 식으로 보는 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거기 안가면 어디 보낼래?

서해안 가서 갯벌 체험할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최고로 치는 수학여행을 그런데 가면 조선인 학생들이 데모할 걸?

1957년 이리 제일 유치원생들의 생애 첫 소풍이라고 합니다.

아래 해설에 보면 제일교회에서 운영한 사립 유치원이고, 당시 유치원은 좀 있는 사람들의 자녀만이 다닐 수 있고,

소 풍장소까지 풍금을 싣고 온 정성이 대단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유심히 보면 좌측에 풍금치는 한복입은 선생이 있습니다. 놀랍군요.

당시 유치원은 좀 있는 사람들의 자녀만이 다닐 수 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제시대때는 어떠했을까요?

 

이런말 하면 좀 그렇지만,

저는 1929년생 리영희 선생님이 일제 때 유치원을 다녔다는 기록을 읽고 약간은, 상당히 놀랬습니다.

그의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라 교회에서 운영한 유치원을 다닌 건 별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 유치원은 교회에서 전도용으로 만든 '무료' 유치원이었을까요?

아니면 당시 광공업이 제법인 평안북도 운산의 '잘사는' 집안만 가능했을까요?

당시 운산의 다른 평범한 조선인 아해들은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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