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과연 미쿠니 상회는 어떤 회사였을까요?
백령회 종결 시리즈 3부작을 끝내기 전, 김정태의 "등산50년"을 읽는 하나의 독법을 적고 싶다.
책에서는 대략 한페이지에 걸친 이야기인데,각주를 달아 볼까 한다.
한자로 三國이라 쓰고, 미쿠니라 읽는 삼국상회는 백령회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백령회 회장 엄흥섭이 다녔든 회사이고, 백령회 회원들이 태평양 전쟁때 징용?)당하지 않은 방패가 되었으니 말이다.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백령회 회장 엄흥섭인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불의의 병에 걸려 죽기 전 두어달 있으면 일본이 패전될거라고 예상했다는 인물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또 별명이 회사 이름을 따서 '미쿠니 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불리는 게 좋아 했을까?
요즘 시대에 아무리 친미성향이 강한 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식 이름으로 한국에서 행세하는 이 있을까를 염두에 두면 조금은 의아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왜 굳이 일본산악회에 가입했을까?
아래는 그가 다녔고 김정태 등 백령회 회원들이 해방전에 근무한 '미쿠니상회'에 대한 개략이다.
그리고 패전 직전의 징용에 대해 짧은 지식을 덧보탤까 한다.
혹시라도 더 관심이 있을 이들을 위해 짧은 지식을 무릅써고 적으니 질정과 격려의 말씀을...
'''''''''''''''''''''''''''''''''
"등산50년"에서 김정태는 개인적인 삶과 산 바깥의 사회생활은 거의 하지 않는다.
겨우 읽어낼 수 있는 거는 학력과 회사생활에 대한 짧은 언급이다.
프랑스가 영미식 영화 007에 대항하여 만든 라르고 윈치라는 영화가 있다.
보스니아 출신으로 세계적인 그룹을 만든 이가 주인공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네게 무얼 주느냐, 그걸로 무얼 하느냐. 결국 이 두가지가 너를 만든다"
김정태는 '삶'이 그에게 준 게 별로 없다. 집안이 명문이거나 재력이 있거나 학력이 있지 않다.
따라서 밝혀서 인생드라마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면야 모르겠지만 스스로 개인사를 밝힐 이유가 없다.
그리고 사실 조선 남자들이 군대 제대해서 군대생활 구라를 어떻게 치는지 잘 알고,
지금도 학력위조, 논문위조가 일상다반사인 한국인들의 문화를 볼작시면,
김정태가 학력과 회사에 대해 과장하고 거짓언급한 것에 대해 나는 정색하고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가 언급하고, 백령회 주석인 엄흥섭과 관련해서 언급되는 '미쿠니'상회는 다르다.
"경성의 아파트"라는 책이 몇달 전 나왔다.
일제시대 경성의 주택문화와 아파트에 초점을 맞춘 책인데,
이 책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말이 미쿠니 아파트.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쿠니 상회이다.
미쿠니는 경성의 아파트 건설회자 중의 선두주자이다.
그룹본사라 할 미쿠니'상회'는 길거리에 흔히 있는 잡화점, 만물상회가 아니다.
미쿠니 상회가 벌인 사업 중에 미쿠니 석탄이 있다.
(정확한 용어는 다음에 책을 낼 때 교정하기로 하고 일단 대강의 이야기를 하자.)
김정태는 이 책에서 양두철도 무슨 공장의 공장장, 주형렬은 진남포 공장의 공장장, 자기는 경성 본사의 공장장이라고 뻥카를 때리는데, 그런 구멍가게 회사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국책기업, 전쟁수행기업이고, 굳이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전범기업이다.
당시 명문이었던 선린상고(지금의 상고 대접이 아님!)졸업생인 엄흥섭이 미쿠니에 입사했다고
신문에 나오던 시절의 미쿠니이다.
김정태는 엄흥섭에 대해 "백령회의 회장격'이라고 적고 있다.
나이도 많고 재력도 있고, 실제로 중요역할을 한 엄흥섭을 왜 회장이 아니라 회장'격'이라고 했을까?
이 역시 백령회의 성격에 대한 중요한 단서 중의 하나이다.
선린상고 출신으로 회계 부기에 능했을 엄흥섭을 김정태는 삼국석탄기술실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미쿠니는 그런 구멍가게가 아니다. 이역시 뻥카일 가능성이 90퍼센트이다.
기술실장이라면 조선의 전문대 출신도 불가능하고 일본본토의 제국대학 관련학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일본무연탄제철회사의 경성공장이 등장한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려면 무연탄이 뭔지 조금은 알아야 한다.
무연탄의 반대말(?)은 유연탄이다. 무연이 연기 없다는 뜻이라서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당시 철도 운행, 제철공장 가동 등 전쟁 수행을 하는 데에는 유연탄이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1941년 벌이면서 해상 봉쇄가 된다.
미국의 잠수함으로 조선과 일본 무역은 고립된다.
따라서 만주와 일본에서 유입되던 유연탄은 줄어들고, 조선에 무진장이었던 무연탄을 피치못해 개발해야 한다.
(남한에는 유연탄이 없다)
다시말해 무연탄 개발 및 연료 생산을 위해서 아니 전쟁수행을 위해서 일제는 조선에서 최후의 발악을 해야 했다.
이때쯤 미쿠니를 다니던 엄흥섭은 43,4년경부터 이 회사의 하청인 삼화공업소를 운영했다.
공업소라는 게 어느 규모인지 느낌이 잘 안오는데, 양두철이 해방 전 자기의 창씨명을 넣어 만든 양천공업소를 운영했다고 하는 걸 보면 소규모 영세기업일 가능성이 높다.
김정태가 당시 무연탄 생산을 했기에, 무연탄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을텐데,
앞뒤 맥락을 빼고, "일본이 전쟁 일으키고..... 한반도에 무연탄이 무진장한데 착안하여'라고 적고 만다.
당시 무연탄으로 움직이던 기차는 화력이 낮아 가다 서고 뭐 그랬다 한다.
패전은 점점 이렇게 사회의 메카니즘이 늦어지는 낌새를 보면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전쟁 수행의 1차 요소인 원료생산을 오래동안 담당한 이로서 이런 판에 일본이 패망할 것을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가 불의의 식중독이 걸려 해방되기 두달 전 병석에서 했던 말은 이런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만주군은 소련군이 처들어 오기 전까지는 나름 편제가 있었다.
그러나 1945년 봄여름이 되면서 본토의 물자가 얼마나 궁핍했는지, 본토에서 훈련받고 오는 신병이 총은 커녕 식기라고는 항고도 아니고 대나무 두쪽을 나누어서 딸랑 목에 걸고 왔단다.
이를 보고 사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만주의 일본군도 알았다는 판에 말이다.
해방이 '몰래 도둑처럼' 왔다고 하는 건, 현장에서 괴리된, 함석헌 선생처럼 지식인들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제 징용을 보자.
우리는 징용을 군함도에 제일 많이 갔을 것 같지만, 만주도 아니고 남양군도도 아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조선인이 징용을 간 곳은 바로 조선이다.
재조선 일본인들이 징병으로 빠져 나간 조선에서 할일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징용도 또 그게 아닌게, 공무원이나 전범기업(?) 등 유관 기업에 다니면 징용되지 않았다.
집안이 좋거나 빽이 있으면 일제시대 징용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김정태와 동갑으로 1916년생, 해방 후 연극계의 거두가 된 이해랑이 그 예이다.
그는 징용이 시작되자, 아버지의 빽으로 부산의 우체국 말단 직원이 되었다가,
미군의 북 B29가 부산을 폭격하자 북한의 오지로 피신가서 여유로이(!) 시간을 보냈다고 하고 있다.
1910~20년대 생인 백령회 회원들은 모두 학력도 낮고, 집안도 좋지 않고, 그들은 대부분 징용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단 한명도(!) 징용은 커녕 징병도 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왜그랬을까?
그건 바로 그들이 전쟁의 핵심 기업인 미쿠니 석탄 삼국석탄의 노동자로 취업했기 때문이다.
미쿠니 석탄의 많은 일본인 기술자들은 전쟁으로 끌려간 상태라 이를 메꿀 조선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뒷배를 바준 건, 김정태에 의하면 엄흥섭이라고 하고 있다.
엄흥섭의 뒷배일 가능성도 높고,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1942,43년 백두산 연성 등 전쟁의 예비 사업인 등행단을 주도적으로 이끈 조선산악회 회원들- 여기서 백령회-
를 조선 안에 두어야 할 필요가 정부측에서도 있었을 거라 본다.
다시말해 등산운동은 전쟁예비훈련과 다름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강제 징용을 당하지 않고, 정식 노동자로서 주말을 보장받았던 걸로 보인다.
-> 가 아니고, 그들은 이시기 삼국석탄에 징용을 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만있자, 백령회는 1,20명인데, 공장에 간 이들은 갑자기 40여명이 된다. 이건 뭐지?)
석탄공장이 무슨 사탕공장도 아니고, 들입다 공장장이라니 말도 안되고, 그냥 생산 노동자였을 것이다.
미군은 일본 도쿄를 B29로 완파했지만, 경성은 손도 되지 않았다. 대신 부산은 폭격을 했다.
만약 그들이 조선을 폭격하려 들었다면 일제의 주 원료생산기지가 있던 진남포와 해주는 폭격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진남포는 부산 인천에 이어 당시 3대 항구였고, 그곳 중화학생산단지에는 김정태에 의하면, 10여명이 징용을 가 있었다.
자 이제 마지막 구절을 보자. 김정태는 이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은 신분보장을 받으며 여유있게 넘기면서 산과 민족애의 정열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었다."
이 로맨틱한 구절 뒤에는 이런 엄청난(?) 뒷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찬찬히 읽으면 이 표현은 조금은 당혹하고 약간은 씁쓸할 수도 있겠다.
이상 미쿠니 상회 그리고 해방직전 김정태를 위시한 백령회원들이 그 험악한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하나의 독법을 소개했습니다.
뭐 이게 꼭 맞다는 것은 아니고요. 그렇지만, 진실은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이거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각주달고 쓰면 논문감이 안될것도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한데,
가만있자, 올해 산서회 회보 "산서"에 투고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