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 최초로 3000m 를 오른 사람은 누구일까요?

카테고리 없음|2020. 2. 6. 19:32

오늘은 조선 여성 최초로 3000m를 오른 이는 누구일까요? 라는 국립등산대학 수준의 퀴즈입니다.

답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상념, 궁금증을 한번 품어 본 것을 어여삐 여기시압. 

 

1927년 여름 박석윤이 조선 남성 최초로 4000m를 넘어서서 몽블랑을 오르는 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기록은 같은 해에 이루어졌고, 박석윤이 등정에 성공한 다음날 우연히 제네바에서 서로 만나기까지 한다는 거죠. 이게 우연일까요? 신이 미리 작정한 일일까요?

 

이제 이야기는 10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칙칙폭폭...

 

오늘이 어떨지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70살의 시어머니에게

젖먹이 어린애까지 해서 세 어린이를 떠맡기고

남편과 딸랑 둘이서 1년 8개월 23일동안 세계 여행을 떠난다.

 

이런 여자는 뭔 일을 해도 큰 일을 할 사람이다. 충격은 이게 실화이고 더 충격적인 것은 요새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전인 1927년 이야기라는거다.

 

우리는 지금 나혜석을 말하고 있다. 왼쪽이 결혼 직후의 나혜석이고 오른쪽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1927년의 나혜석이다. 근대 초기 각종 기록을 갖고 있는 나혜석 중 좌측 결혼 무렵 그녀의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부터 보고 진행하자.

 

도쿄여자미술대학에 유학중이던 나혜석은 촉망받는 시인 최승구와 사귀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양쪽 집안 모두 극렬하게 반대하던 와중에 최승구는 25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이후 교토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때 나혜석이 내건 조건 중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과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겠다'도 있었고 김우영은 무조건적으로 승낙했다. 그리고 신혼여행은 나혜석이 요구하는 대로 궁촌벽산에 있는 죽은 애인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렇게 전위적인 여자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으려나.

 

그리고 그녀는 위에서 말했듯이 1927년 남편과 둘이서 자그마치 1년 8개월동안 세계일주를 떠난다. 나는 이왕이면 이런 여자가  조선여성 최초로 3000m를 오르고, 나아가 몽블랑도 초등했기를 바란다.

 

그녀는 여행기를 기고하고, 진작에 단행본으로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2018년 가갸날에서 나온 "여성첫세계일주기 - 나혜석"을 보면서 비로소 서두의 의문이 생겨났다. 이제 1927년 6월 떠난 구미여행 중 스위스, 인터라켄을 찾은 때의 기록을 보자.

 

7월 27일 오전 8시에 프랑스로부터 스위스 제네바를 향하여 떠났다.... 터널을 많이 지나나 전기철도여서 연기가 없다.... 스위스의 명산품은 다 아는바와 같이 시계다. 그외 목조와 보석 등이 명물인 듯 하여...... 

 

그녀는 여기서 우리나라 최초로 4000m(몽블랑산 4807m)를 오른 박석윤을 만나게 된다. 이런 것도 인연일 텐데, 100년이 되어서야 우리는 알게 된다.

 

석양에 호텔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박석윤 씨의 명함이 놓여 있다. 너무 의외라 놀라고 반가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더니 박씨가 들어온다. 이국에서 동포를 만나보면 조상으로부터 받은 피가 한데 엉기는 것 같은 감회가 생겨나 감사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27년 7월  1927년 7월 26일 오후 3시 20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함께 유학했던 일본의 등반가 각무양행( 各務良幸 카가미 요시유키)와 함께 몽블랑 정상에 선다. 박석윤은 27일 하산하여 제네바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의 셀레브리티였던 나혜석의 방문 소식을 듣게 된 셈이다.

 

나혜석은 1896년생이고 박석윤은 1898년생이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아무래도 주된 대화는 몽블랑 등반 이야기였을 것이다. 등반의 고통과 정상에 섰을 때의 환희심은 나혜석으로 하여금 고산등반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12일에 지인 10여명의 전송을 받으며 제네바를 떠나게 되었다. 기차는 사늘 넘어 또 산을 넘고, 굴을 나와 또 굴로 드러간다. 겹겹이 포개진 산악 사이를 질주하는 동안 알프스 산봉우리를 점점 높이 올라간다.

 

나혜석은 기차여행을 하면서 스위스의 산과 초원 그리고 창가에서 만나는 산간 마을 풍경과 농촌 여자들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리고 해질무렵 산의 변화를 역시 낭만적으로 그린다.

 

 

이제부터 브리엔츠 호수를 횡단하게 된다. 이 호수는 스위스 특유의 고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그 그림자가 비치는 까닭에 아람다움이 극치에 이른다.... 때는 마침 석양이라 이어진 산봉우리는 백옥 같은 흰 눈의 보관으로, 혹은 자색, 혹은 청색, 혹은 적색으로 변화한다. 보는 동안에 연기같은 구름에 싸여버리고, 갈길을 서두르는 범선이 노질을 바삐 한다... 오후 7시에 인터라켄에 도착하였다.

 

 

이제 8월 13일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에 오르는 글로 이어진다.

 

다음날 아침에 구경을 나섰다. 감발을 하고 바랑을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은 많은 등산객으로 대혼잡을 이루는데, 대부분은 학생이요, 부호 피서객들이다. 우리가 탄 차는 아래는 절벽이요 위는 까맣게 보이는 산속으로 한없이 급속히 질주한다. 공기가 매우 희박해지고 기후가 매우 추워졌다.... 

 

 

스위스를 한번도 가보지 못해서 그렇긴 한데, 이어지는 글은 분명히 아이거 터널을 통해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에 오르는 노정인 걸로 짐작된다.

 

 알프스 산봉우리 중 두번째로 높은 11,340척 융프라우를 향하였다. 개미도 능히 기어 오르지 못할 고봉을 전차를 타고 가만히 앉아서 올라간다. 산을 넘어 아이거산 터널로 들어간다. 길이가 70리가 되는 터널로 도중에  돌로 만든 두세 개의 역이 있어 매우 기이하다.

 

절벽 아래 뚫린 사이로  굽어보니 아 소름이 끼친다. 흰 뭉게구름이 천 길  골짜기에 묻혀있고, 쳐다보니 융프라우의 맑고 깨끗한 눈 덮인 바위가 눈앞 지척에 다가와 있다. 첩첩산중에 사철 눈이 쌓여있고, 이것이 빙하가 되고, 빙하가 녹아 물이 되고, 물이 흘러 폭포로 떨어지고, 폭포가 내려 내가 되고, 냇물이 흘러 곳곳에 호수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스위스의 생명이다. 이것을 팔아 스위스 국민이 살아간다.

 

 

검색해보니 클라이네 샤이데그에서 7km에 달하는 융프라우요흐행 기차는 1896년에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했다고 나와 있다. 나혜석이 지금 서서 내려다보고 올려다보고 하는 곳이 바로 융프라우요흐로 짐작된다. 융프라우요흐는  3,454m 높이로 ‘유럽의 지붕(Top of Europe)이라고 불린다.

 

이제 우리는 과연 나혜석이 최초의 조선 여자일까를 추론해내어야 할 차례다. 이 부분은 1927년 이전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서구여행을 했고, 스위스를 찾았는지에 관한 자료를 발견해야 한다.

 

지레 짐작이지만 행여 있을까 의문이고, 그 여자가 스위스를 들렀다 하더라도 중심부인 제네바에서 사교를 즐기는데에 그치지 않았을까 싶다. 나혜석도 제네바에 7월 27일 도착하여 8월 12일까지 머물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그 중에는 영친왕이 스위스 제네바에 들렀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할 것이지만)

 

설령 나혜석보다 먼저 있다 하더라도, '기록상' 최초는 나혜석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여전히 높겠다.

이상 3000m 높이를 깬 최초의 조선 여성이 누구일까 관심을 가져본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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