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회 3) 조선산악회 간판의 애매모호함에 대하여.

카테고리 없음|2021. 8. 10. 23:06

지난 백령회 2) 글의 말미에서 밝혔듯이 해방전후 조선인 산악운동을 보는 나의 기본 입장은 이러하다.

 

우리랑 똑같이 식민지 산악회로 출발한 대만산악회는 그들의 출발점을 해방 이후가 아니라,

1926년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주동하여 세운 구 대만산악회로 보고 있다.

나는 해방전후 김정태 등 백령회원들의 멘탈리티는 대만산악회의 대만인들과 유사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기존의 가설과 달리 이렇게 볼 경우,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분이 상당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이건 친일이냐 반일이냐라는 흑백논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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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는 일제하 '조선산악회 간의 애매모호함에 관한 애매모호한 이야기이다.

이건 팩트 체크하는 시늉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긴가민가 궁금하다는 이야기이다.

 

무엇을 계승한다는 것은 상호, 간판 그리고 인감 등이 중요한 인수인계 자료가 될 것이다.

조선왕조의 옥쇄가 그러하고, 

우리는 한판의 정치개그를 기억할 것이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 김무성이 옥쇄들고  부산행을 한 해프닝 말이다.

 

만약에 새로운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같은 명칭을 쓰고 같은 간판을 쓰고 같은 인감을 사용한다면

그 정체성과 독립성은 의심받을 부분이 없지 않다.

 

해방 후 조선산악회의 행보는 어떠했을까? 명칭, 일제하 조선산악회와 똑같은 명칭을 쓴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해방 후 난립한 수많은 정치사회문화예술단체의 명칭들이 '조선'으로 시작하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시절 백령회 회원들이 '조선산악회'말고 다른 걸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감, 이 문제는 곧이어 올리기로 한다.

 

간판문제, 일제하 구 조선산악회는 분명히 조선산악회라는 간판이 있었을 것이다.

이 간판은 해방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깃발의 유사성, 엄흥섭 4주기때 왜 백령회라는 명칭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대만산악회처럼 보면 무난히 이해된다.

오늘 볼 간판이나 인감문제도 자료가 더 없어서 그렇지 이해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해방전 일제하 조선산악회는 카도야 운동구점의 한칸을 빌어 회의 사무실로 사용했다.

8.15 해방이 되자 몇일만에 조선산악회 실세인 간사장 하라구치 등이 "산악회 인장과 함께 기록서류, 장서 100여권 책장 1개 등을 당시 사무소인 충무로 2가 등산용구점 '가도야'에서 내어주고 산악회를 인수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패전하고 아무런 비책이 없던 그들은 산악회 인수를 부탁했다. 김정태는 새로운 산악회를 창설한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등산50년"에서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했을까?

 

1946년 6월 당시 조선산악회 비품목록이다.

이 자료는 한국산악회 50년사에도 실려 있지만, 흐릿해서 명확히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국립산악박물관 측 자료집에 세세한 내용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국립산악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산악회전 나와 산 하나가 되다"에서는 일일이 확인을 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는 이종택 산악박물관장(당시 전시유물실장)의 논고 '한국산악회가 걸어온 길 - 결성기반, 명칭, 사무실 이전 등을 중심으로-가 있다.

 

산악계사에 관한 논고 중에 제일 충실하고 전범이 된다고 본다.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중요한 자료의 대부분은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조선산악회와 등행단 접수품의 일부 그리고 본회회원 기증품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회간판2개"라고 적고 있다.

 

회의 간판이 왜 2개나 될까? 설마 입구에 걸려 있는 간판까지 비품이라고 할까?

그걸 하나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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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택에 의하면 1945년 12월 15일 산악회 사무실을 남산에 있는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옮겼다.

국립민족박물관은 한국산악회 초대 회장인 송석하 선생이 관장으로 재직 중이던 곳이다.

이때부터 1947년4월까지 이곳이 회의 사무실이었다.

 

송석하가 지명도 높은 진단학회 회장도 겸임했으니 조선산악회 간판은 못달았을 수도 있겠다.

못달은 간판을 1개라고 한다면, 그래도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해방 후 1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간판을 두개나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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