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지리산 화엄사를 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밤재의 사진.
남원에서 구례 화엄사로 가려면 지금이야 구례구역까지 가서 다리 건너 화엄사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기차도 없고 다리도 없던 시절에는 밤재(栗峙)를 넘어야 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때 그시절 1917년 밤재 사진을 놓고서 밑도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리산 화엄사의 입구인 구례구역은 1936년 12월에 생겨났다. 따라서 그 이전에 남원에서 화엄사로 가려면 밤재(栗峙)를 넘어야 했다. 그때 밤재는 어떠했을까?
1936년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서춘은 8월 5일 '지리산 통로 구례'를, 다음날인 6일에는 '남조선 편력기행'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그때는 신작로가 놓여져 있었는데, 밤재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23일 오전 10시, 남원에서 자동차를 타고 구례로 직행하는 길을 잡았다. 남원 구례간은 약 백여 리로서 소요시간은 1시간 반이다. 양 지역간에 큰 재가 있는데, 그 이름을 율치(속칭 밤재)라고 한다.
이 재는 상당히 크고 준험한 재다. 이 재를 상하(上下)하는 자동차 도로는 실로 양장구곡이다. 가면 갈수록 커브 또 커브요. 핸들을 조금만 잘못 틀어도 자동차는 곧 탈선하여 천인절벽으로 추락될 위험이 있다. 이런 위험한 굽이굽이를.....
지금은 도로도 매끈하고 터널이 뚤려 있어 긴가민가한데, 산의 모양따라 삽으로 신작로를 냈던 시절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리건판을 중앙박물관에서 공개했는데, 그 중에 1915년 지리산 율현(栗峴) 관련 두장의 사진이 있어 모셔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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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가 서울에서 내려갔다고 보면 이건 고개를 넘기 전 남원 쪽에서 찍었다고 보아야겠다. 신작로가 놓이기 전, 동네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길이었으리라. 그래도 군의 경계이니 제법 다져져 있다. 서춘이 '상당히 크고 준험하다'라고 했는데 과장이 아닌 듯 하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지리산 유산기가 적지 않다. 걸어서 넘건, 가마타고 넘건 그들이 넘던 고개길은 대체로 이러했을 터다. 이런 전제로 글을 읽으면 보다 현실감이 생길 것 같다.
"전남 구례 지리산 속현에서 본 산 아래 마을"라는 제목이 붙은 두번째 사진이다. 아무래도 고개 넘어 구례쪽이 아닐까 싶다. 산의 모양대로 만든 논마다 모가 가득한걸 보면 6월달 모심기 철인가 보다. 저멀리 초가집 몇채가 옹기종기하다.
우리가 꿈꾸는 '나의 살던 고향은'같다. 봄이면 온산에 진달래가 필 것이고, 살구나무도 한두그루 있을 것이다. 하룻밤 자는 건 어떠했을까?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이 한여름 함경북도 깊은 산골에 나비 채집하러 갈 때 기록한 글들이 있다. 밤새도록 빈대에 시달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삶에 제법 적응되었을 그도 그러하니, 우리는 하룻밤 묵기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산이 첩첩하고 저멀리 지리산 봉우리가 있어 세상과 절연한 느낌이 든다. 다음번 율재를 넘어갈 때 천천히 운전하면서 이 모습을 떠올려 보며 위치가 어디쯤일지 비정해볼까 한다.참고로 원래 명칭은 '율현'인데, 밤 율(栗)을 조 속(粟)으로 잘못 읽었는지, 아니만 애초 유리건판에 속(粟)로 적혀 있어서인지 학예사는 속현(粟峴)이라 잘못 표기하고 있다.